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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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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보니 60년대의 이야기여서

내가 어린 시절 어렴풋한 기억을 떠 올리게 하는 것들이 많다.

우선 '전보'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전화가 집집마다 있던 시절이 아니니

급한 용건은 전보를 이용했던 시절이었다. 글자 수에 따라 돈을 내야하는 지라 가능한 짧게 써야 하는 것이다.

<다녀가라><조모위독><내일 부 상경> 등으로 이야기에도 등장했었다.

또 처음 라면이 등장한 60년대 초의 광고도 흥미롭다.

아빠의 직장에....엄마의 손님접대에...우리 가정 주식과 영양식에...야외 휴대용으로.....

 

그리고 삼발이로 된 다리를 접었다 폈다 했던 둥근 알루미늄 상처럼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물건들도 그 시절 모습을 되살려 주었다.

 

오빠에게 성공하리란 다짐을 했건만 삶의 막장에 들어선 영희는 자기 합리화를 위해

동생 인철을 서울로 불러 올려 그를 뒷바라지해서 훌륭하게 키워내는 목표를 그린다.

 

한편 열일곱 살 인철은 인간답게 해줄 도회의 삶에의 꿈을 그리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아메리카와 소비에트 두 강대국 사이의 <변경>인 우리나라.

약간은 통속적인 소설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이 어우러져서 결코 품위없는 소설로 떨어지지 않는다.

 

일용직에서도 쫓겨나고 월남에 파견될 태권도 교관 선발 요원 시험에서도 신원조회 결과 탈락한

맏아들 명훈은 다시 또 아버지로 인한 연좌제에 낙담한다.

 

전라도말의 '거시기'처럼 후뚜루 마뚜루 만능 대동사로 쓰인 경상도의 '조지다'란 말의 쓰임도 흥미로웠다.

 

 

<변경7/이문열/민음사>

 

- 각박한 도회에서 팔 것이라고는 설익은 노동력밖에 없는 철이 걸어가게 될 길은 뻔했다.

영희의 경험으로 보아서는 피로와 저임의 진창이거나 범법과 악의 뒷골목이 있을 뿐이었다.

 

- 그런 교태의 효용성은 이미 어둠과 함께 사라져 버린 뒤였다.

오히려 명훈에게는 그것들이 무슨 날카로운 비수처럼 옛날의 격노와 모욕감을 상기시킬 뿐

 

- 비록 오빠 명훈이 별 가망 없는 땅에 파묻혀 허우적거리고는 있어도

그 삶의 건강함과 깨끗함은 영희에게 은근한 자랑이었다.

 

- 뒷날 철이 상당히 나이가 든 후에도 어쩌다가 그걸 떠올리면 가슴히 서늘해 오는 우울한 삽화였다.

 

- 인철은 고통을 못 이긴 환자가 진통제를 찾듯 빌려 둔 소설책 더미를 뒤졌다.

 

- 어떤 때 집안에 홀로 앉아 있으면 마치 가라앉는 배속에 있는 것 같아 견딜수가 없었다.

 

- 그러나 그의 눈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누나의 재빠르고도 눈부신 성공에 대한 감탄이나 갑작스럽고도 열렬한 자기희생의 각오에 대한  감격이 아니라 무언가 그 뒤편에 숨겨져 있는 어둠을 향한 깊숙한 우려와 의혹이었다.

 

- 날치가 삼류 뒷골목 영화에서나 본듯한 관대하고 인정 많은 보스 흉내를 내는 걸 보면서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 사내가 그렇게 무릎꿇는 게 아니야 처가에는 무존장(어른이 없다)이란 말도 있다.

 

- 세상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것을 몇 번씩이나 본 쉰 줄의 여인네답게,

그리고 전쟁의 생이별을 겪고도 어린 사 남매와 함께 불 같은 1950년대를 헤쳐 온 홀어미답게

어머니는 아주 실리적인 유예를 주된 대응으로 선택했다.

 

- 어쨌거나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우연히 눈길을 끈 인상적인 장면 하나, 알고  보면

그리 심각할 것도 없는 감정의 과장같은 것이 얼마나 자주 우리 삶의 중대한 고비들을 결정짓는가.

 

- '조지다'란 말은 바짝 힘주어 일해 밭이랑 만드는 일을 마침으로써 다음 날 모종까지 끝낼 수 있도록 해 두자는 뜻인데, 그들에게 '조지다'란 말은 거의 만능의 대동사였다. '망치다'라는 원래의 뜻에다 나무를 자르는 것도, 밭을 가는 것도 고랑을 일구는 것도 모종을 내는 것도, 심지어는 여자와 자는 것도 그 한마디면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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