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사람이 책을 선택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때론 책이 무언의 손짓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은 제목과 장정, 그리고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간 듯한 모습에 눈길이 간 책이다.
64회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작인데
저자 마쓰이에 마사시의 데뷔작임에도 완성도 높아보여 데뷔작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무라이 건축 설계 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라이 건축 설계 사무소 직원들은 여름이 되면 별장 가루이자와로 옮겨가서 일을 하는데
그 여름 한철 별장에서 일을 하는 기간이 주를 이루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화자인 나(사카니시)는 존경하는 건축가 무라이 선생 건축 사무소에 들어간다.
몇 해째 새로 신규채용을 하지 않는 무라이 건축설계 사무소에 주인공 사카니시가 뜻밖에도 채용이 되었다.
국립현대 도서관 프로젝트를 앞둔 일환으로 채용되었다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마음에 들어 채용했는지
무라이 선생도 별 말이 없다.
이 책은 소설에 나타나는 여름 별장의 풍경만큼이나 잔잔하게 흘러간다.
격한 사건의 소용돌이가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등장인물들의 격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지에 습기가 스미듯 그렇게 들어오는 기분....싱겁고 온화한 책이다.
특별식을 먹는 기분이 아니라 매일 먹는, 하지만 정성스럽게 차려진 밥상을 대하는 기분이랄까.
디테일한 글 덕분에 상상할 필요가 없이 그대로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졌다.
마치 내가 무라이 건축 설계 사무소 직원 중 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스승 무라이는 누구나가 우러러볼 기념비적 건축물을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짓는 일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기념비적 외관은 피하고, 삶을 위한 건축을 추구하는 노 건축가 무라이.
그 건축가의 철학을 존중하는 주인공 사카니시.
이를테면 자연재해가 일어나 다른 건물들이 다 모두 무너져 버렸는데
내진설계까지 완벽한 내가 설계한 집만 달랑 온전하게 남아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에 대해 끝없이 사유하게 만든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건축 이상에 열정을 쏟는 스승 무라이.
그럼에도 공공도서관 건축 설계 경쟁에 참여하게 된다.
사무소 직원들이 심혈을 기울이지만 무라이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공공도서관 건축 설계는 경쟁사에게 넘어가게 된다.
신규 직원을 아무도 채용하지 않으면서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주인공 사카니시를 채용했는지?
무라이 선생은 왜 조카와 사카니시가 결혼하기를 바랬는지?
무라이 선생이 돌아가셔서 무라이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는 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어렴풋이 주변 사람들의 전언을 통해 나름대로 짐작을 할 뿐이다.
많은 것들이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하고 안개가 낀듯 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소설이다. 나도 애매모호하고 갈팡질팡하는 타입이니 말이다.
주인공과 무라이 선생의 조카와의 혼인은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고 점점 멀어져 간다.
어느 것도 내가 원하고, 상상하던 방향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꺼림직하지 않고 불편하지 않으며 삶을 관조하듯 자연스럽게 읽힌다.
집과 건축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더 흥미롭게 읽을 것 같다.
다가올 어느해 여름
빛이 사선으로 들어오는 숲 속에 앉아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저 / 김춘미 역 /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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