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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오래 준비해온 대답

읽다보니 익숙한 내용이라 다시 살펴 보니 전에 내가 읽었던 책의 개정판이었다.

 

2007년 EBS 〈세계테마기행〉의 제작진이 작가 김영하를 찾아와 작가에게 어떤 곳을 여행하고 싶냐고 물어보았을 때, 작가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칠리아라고 답했던 것에서 개정판을 내면서 책의 제목도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 되었다. 당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작가는 제작진과 함께 시칠리아를 다녀온 후, 교수직을 사직하고 서울의 모든 것을 정리한 뒤 다섯 달 만에 아내와 함께 다시 시칠리아로 다녀와서 쓴 여행기에 해당하는 책이다.

 

두번째 읽는데도 여전히 읽는 뿌듯함을 주는 김영하의 글들.....

아주 적확한 단어를 사용해서 읽는 나로 하여금 저자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공감을 한 대목은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는 대목이었다.  여행에서 다녀와 내가 찍은 사진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었을 때 내가 흥분하며 보여주었던 사진에 대해 심드렁했던 사람들을 보았던 나로서는 내 심정을 대신 표현해준듯 싶어 큰 위안이 되었다.

 

책을 읽고나자 시칠리아가 아니더라도 어디든 가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똑같은 아파트숲 속, 똑같은 상가, 같은 언어, 음식에 관한한 지독하게도 보수적임에도 매일 먹는 같은 음식... 이런 것들로 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 때문에 저자의 고생스런 부분조차 부럽게 만든다.

 

이 책에선 최근의 트렌드를 반영해서 일까?

아니면 요리하는 개인 김영하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는지 요리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작가 자신이 나이 마흔에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되어 부족한게 없었지만 그닥 행복하지 않았던 것을, 다른 어느 누군가는 그런 꿈을 가지고 매진하고 있을텐데, 이 책을 읽으면 허망할 거 같다.

 

물론 작가 자신이 선생으로서 별 재능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기도 했지만,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그곳에서 빠져 나왔는데, 아직 그렇게 지내는 너흰 행복하냐?' 하고 묻는 거 같기도 했다. 정말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빠져나가고 싶어. 하지만 너처럼 그런 능력이 안되어서 그냥 힘든 터널 속을 지나 출근하는 거야"라고 혼잣말로 말할 것 같다.

그렇게 매일 쳇바퀴돌 듯 힘든 출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뒷통수에 빨대가 꽂힌 기분으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딴지를 걸어본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뒤돌아보며 사람들의 표정에서 흐믓한 사람의 표정을 보듯, 자신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서 그런 표정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치하고, 김영하 작가의 책은 충분히 독자로 하여금 읽으면서 지적 충만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못가는 여행에 대리만족을 하면서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들었다.

 

 

오래전 읽었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를 개정한 책이 <오래 준비해온 대답>

 

목차

Prologue 언젠가 시칠리아에서 길을 잃을 당신에게
내 안의 어린 예술가는 어디로
첫 만남
소프레소, 에스프레소
리파리
지중해식 생존요리법
리파리 스쿠터 일주
리파리 떠나던 날
향수
메두사의 바다, 대부의 땅
아퀘돌치해변의 사자
천공의 성, 에리체
빛이 작살처럼 내리꽂힌다는 것은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신전
죽은 신들의 사회
Epilogue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밑줄긋기>

 

- 그때까지 나는 방송 프로듀서나 카메라맨도 나와 같은 일종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들은 예술가라기보다 군인에 가까웠다.

 

- 카메라 맨과 프로듀서는 이십 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사이라더니, 눈빛만 봐도 손발이 척척이었다. 나약한 소설가가 이불 속에서 끙끙대는 동안 그들은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르고 벌판으로 나가 찬바람을 맞으며 촬영을 했다.

 

- 이탈리아의 기차를 시간표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가고싶을 때 가는 것이었다.

 

- 우리는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노력을 하면 보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미신적 기대감때문이었을까?

 

- 다족류를 닮은 산맥들이 바다를 향해 뻗은 발을 마치 꼬치를 꿰듯 관통하는 것이다.

 

- 굴곡없는 해안선에 , 드문드문 서 있는 익명의 차량들, 참을 수 없는 적막감과 의미없음

 

- 농장의 인간들은 말이 없었지만 동물들은 하루종일 이런저런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다. 

 

-인간의 소음이 사라진 밤에는 동물들의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그들은 마치 그곳의 주인이 자기들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 나는 그런 곳에서 자랐고 지금의 나를 만든 그 무엇인가의 일부는 거기에서 왔음이 분명하다.

 

- 여름에 사하라사막으로부터 시로코(지브리)가 불어와 세상을 바싹 말린다면, 겨울에는 미스트랄이 불어오 저 북서쪽에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노르만족이 지은 건물들은 마치 레고블록으로 만든 것 같다. 

 

- 목동이 뱃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듯이 뱃사람 역시 목동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신화라고 생각하면 그냥 심상히 감상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 역사는 오직 책에만 기록될 뿐이며 바다와 허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엄청난 사건들도 시간이 지나면 말 그대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렇게 태연하게, 그리고 기습적으로 알려주는 책은 여행안내서밖에 없는 것 같다.

 

- 도시를 벗어나면 대지를 억세게 움켜쥔 올리브나무들이 드문드문 보였고 도시로 들어서면 싼값에 대충지은 콘크리이트 아파트들이 바다를 가렸다.

 

- 노토에 머무는 닷새동안 노토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에는 그런 마음에서 우러난 불편한 겸손이 얹혀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자긍심이 부족해 보였고 관광객들에게 송구스러워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 그는 무뚝뚝했지만 정중했다. 자신의 힘과 위세를 충분히 과시하면서도 필요한 친절은 잊지 않았다. 

 

- 지중해에서는 겨울을 같이 나야 비로소 이웃으로 인정해준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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