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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울

연상녀에 나이 든 궁녀의 능력

 조선 시대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집에서 자신의 딸을 직업여성으로 만들고자 했다. 당시 여자가 20세의 나이라면 아이가 1~2명 있을 정도인데 장희빈의 20대 입궐은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히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장희빈의 5촌 당숙 장현은 당대 유명한 역관으로 청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많은 부를 쌓았고, 장희빈의 후견역할을 하였다. 장현은 돈은 있으나 권세를 갖고 싶었기에, 남인들과 친하게 지내던 중 조카인 장희빈을 궁궐로 보낸다. 장희빈의 미모라면 충분한 역할을 하고 정현 자신도 권세를 누릴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숙종은 2살 연상의 조선 최고의 미인이라는 장희빈에게 빠지게 된다. 워낙 출중한 미모가 능력이었던 셈이다.

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알려져서 장희빈의 아들 경종과 관련한 일만 적어보면,

 

숙종은 훗날 경종이 될 세자에게 늘 학문의 갈고 닦음을 강조했다.

세자는 4살 때 천자문을 익혔고, 영특함을 칭찬받았지만 14세 때 비극적인 사건을 겪는다.

생모인 장희빈이 자신의 거처에 신당을 짓고 인현왕후를 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바람에 폐위되고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희미한 꼬리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 심상치 않은 혜성이 궁궐의 밤하늘에 보였던 날의 일이었다. 

 

일설에서는 사약을 받은 장희빈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고 숙종은 마지못해 세자를 데려다 준다. 이때 독기서린 눈빛으로 변한 장희빈이 세자에게 달려들어 세자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 당겨버린 것이다. 곁에 있던 환관들이 겨우 떼어놓았으나 세자는 기절하고 만다. 

 

경종은 평생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병환에 시달렸고 자식도 낳지 못한 채 승하하고 말았다. 

어쩌면 엄마인 장희빈이 하초를 잡아당긴 때문이 아닐런지....

 

경종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인형왕후를 마음으로 섬겼고, 엄한 아버지인 숙종이 병석에 들자 십 수 년 동안 약시중을 들었다. 

 

실록은 "받아들이는 아량이 넓으시어 무릇 대신들에게 가슴을 열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었는지라, 식자들은 훌륭한 보좌가 없어 이상적인 정치를 도와 이루지 못하였음을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는 기록을 보면 안타깝다.

 

 

아파트 사이의 의릉은 좋은 공원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는 듯
의릉(경종과 선의왕후의 능)

경종(1688~1724)은 제 19대 숙종과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의 아들이다.

자식이 없어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왕세자로 책봉시켰으나 이 일로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대립하여 옥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재위 4년에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의왕후는 경종의 두 번째 왕세자빈이 되어,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대비가 되었으며 영조 6년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석호의 꼬리가 몸통을 지나 목 뒤까지 이어지도록 묘사한 것은 다른 능의 석호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

의릉(조선 제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의 능) - 의릉의 위치 : 서울 성북구 석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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