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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여행의 이유

작가 김영하가 TV프로그램인 '알쓸신잡'에 나오고 나서,

이 책이 출간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읽다보니 알쓸신잡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가 있었다.

 

작가의 역량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김영하의 그 어느 책보다도 읽는 재미가 있었지만, 이 책이 베스트셀로 1위에 곧바로 등극한 것은 어느 정도 그 프로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출간한 출판사 입장에서는 그런 호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출간된지 보름도 안된 기간에 6쇄까지 찍은 책이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일들을 제쳐두고, 이 책은 독서의 품격을 높이는 느낌이 드는 책이다.

아울러 여행에 대한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이 정리되는 것 같아 독후에 포만감도 느껴졌다.

 

'파리 증후군'을 설명한 대목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돈을 모으고 오랜기간 계획을 세우고 벼르고 별러서 온 난생처음 파리여행을 온 여행객들이

지저분하고 불친절하고 냄새나는 파리에서 겪는 환상이 깨지면서 아뜩한 멀미를 느끼는, 그 현실과 상상의 괴리감.

 

내 주변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나역시도 첫 유럽여행지인 파리에서 내리자마자 가방을 도난당해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것들로 부터 달아나기>의 첫 문장은 '나는 호텔이 좋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혼자 웃다가, "김영하 작가가 당신과 똑같은데~~ㅎㅎ" 하면서 이 부분 읽어보라고 책을 건넸다.

"맞아 나도 이래서 호텔이 좋다니까~~"

떠나고 싶은 일상에서 떠나 완전히 리셋되는 기분 그게 호텔을 찾는 이유라고.....

 

 인터넷이 보급될 무렵 미래학자들이 세계여행이 줄어들 것이라 예견한 것과 달리 여행이 폭증한 것은 어느 철학자가 말한 '인류는 여행하는 동물'이란 말처럼 인간의 DNA에는 이동의 본능이 새겨져 있을 것 같았다.

 

김영하 작가 자신도 자기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여행 본능을 가지고 있는듯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작가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짠한 안쓰러움을 느끼게 된다. 군인인 아버지가 임지가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일 년이 멀다하고 이사를 가서 친구 사귀는데 애로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바람에 매 번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삶이 아직도 계속되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자세히 드러나 있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 적응하려 얼마나 애썼을가? 그리고 친구와 화해하는 방법과 사과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하는 데선 안타까움도 들었다.

 

어제 우연히 카카오TV에서 김이나 작사가가 김영하 작가와의 톡터뷰한 걸 보게 되었는데 역시나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 그리고 같이 보자고 해서 또 한 번 보았다.

 

2018년 이태리 여행중....피렌체 베키오 다리에서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풀리지 않는 난제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소란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고요하고 싶을 때,

예기치 못한 마주침과 깨달음이 절실하게 느껴질 때,

그리하여 매순간, 우리는 여행을 소망한다.

 

-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귀환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 긴 여정을 통해 그가 진짜로 얻게 된 것은 신으로 표상되는 세계는 인간의 안위 다위에는 무심하다는 것, 제아무리 영웅이라 하더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의 삶은 매우 연약한 기반 위에 위태롭게 존재한다는 것, 환각과 미망으로 얻은 쾌락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 등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처음 길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고향인 이타케에 도착한다.

 

- 우리는 명확한, 외면적인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이런 목표는 주변 사람 누구에게나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와이에 가서 서핑을 배우겠다. 치앙마이에서 트레킹을 하겠다. 유럽전역을 떠돌며 미술관을 둘러보겠다 같은 것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준비한다.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고, 숙소를 예약하고, 이동수단을 검토한다. '추구의 플롯'에서는 주인공이 결말에 이르러 '뜻밖의 사실'을 알게되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뜻밖의 사실'이나 예상치 못한 실패, 좌절, 엉뚱한 결과를 의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각성은 대체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 인생과 여행은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 한 선배 작가는 장편 출간 즈음하여 가진 한 인터뷰에서 소설을 탈고하고 밖으로 나오니 자기만 겨울옷을 입고 있더라는 말을 했다.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이라면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 작가는 대체로 다른 직업보다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우리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이다.

 

- 국내 언론들이 사회주의 중국을 폄훼하기 위하여 진상을 조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사회주의의 미래를 확신하는 젊은 청년들을 만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망적 사고였을 뿐이었다.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아직은 건재하리라는 희망. 현실보다 믿음을 우선시하는 태도였다.

 

- 사회주의 중국에 환상을 가진 서울의 대학생과 자본주의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게 꿈인 베이징 대학생의 대화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 이어졌다.

 

-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어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 나의 동료 작가들을 만나는 일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그들이 동시대 최고 수준의 언어로 독특한 화제들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1995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5억2천만명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났으나 2016년이 되면 12억 4천만명으로 두 배가 넘게 늘어났다. 전 세계 항공 승객은 1995년에는 13억명 가량이었는데 2017년에는 39억명을 세배나 폭증했다. 인류는 여행을 포기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더 많이 이동하고자 한다는 것을 통계는 보여준다.

 

- 일본의 한 코미디언이 비싼 포르셰를 샀지만 막상 자기가 운전을 해보니 포르셰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더라, 그래서 친구에게 포르셰를 운전하라고 시킨 뒤 택시를 타고 따라갔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그가 택시 기사에게 저기 가는 저 포르셰가 자기 차라며 정말 멋지지 않느냐며 자랑을 하자, 택시 기사는 어이없어하며 그런데 왜 택시를 탔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바보 아니세요? 내 차에 타면 포르셰가 안보이잖아요?"

 

- 사람들은 거울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각도로 얼굴을 돌린다고 한다. 그래서 무방비 상태에서 찍힌 스냅 사진을 볼 때 그게 자기 모습이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고 한다.

 

-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 20세기 이전에는 힘든 여행은 아랫사람을 시키고 지체가 놓은 이들은 유람의 범위를 벗어나는 모험은 삼가왔다.

 

-나 역시 일련의 일들을 통해 태도를 정했다. 나는 내가 모국어로 쓴 것까지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한계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작가와 독자로서 소통할 수 있는 채널도 모국어로 한정했다. 번역된 작품은 더이상 내 소유가 아니라 해당 언어권 문화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해외의 초청에 응할 때는 그저 일종의 상징이나 증인으로 모셔지는게 내 역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 미국에서 출간된 전작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나 <빛의 제국>에 비하면 <검은 꽃>은 반응이 아예 없다시피 했다. 좌절은 공격성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마침 나의 손에는 조이스틱이 쥐여 있었고, 나는 스크린에 나타나는 적들을 향해 원없이 총을 쏘아댔다.

 

- 인간은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과 대면한다. 어린아이들이 고아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은 부모를 잃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아가 되고 싶은 아이가 거의 없듯이 매년 낯선 곳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은 아이도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어린 날의 나도 마음속 깊이 안정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며 이런저런 일을 같이 겪는 삶. 내가 어디에 사는지, 누구 집 자식인지를 모두가 아는 동네에서, 나도 그들을 그만큼 알면서 성장하는 삶, 그러나 나의 삶은 그렇지를 못했다. 그래도 딴에는 최선을 다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투쟁했을 것이다.

 

-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야 하는 이주자와 자기 결정에 따라 여행하는 자가 보는 풍경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것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주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반면 여행자는 정제된 환상을 경험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현실은 줄거리가 없다. 어떤 일들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때로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난다.

 

-어린날의 내가 경험한 갑작스런 이주들. 겨우 사귄 친구들과의 반복된 이별. 나는 누군가와 오래 알고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친구들의 부족함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법. 내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법,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는 법을 몰랐다. 알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헤어질 테니까. 잦은 이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부모는 자신들의 삶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하루하루 닥쳐오는 일들을 처리하기에도 벅찼을 것이다. 삶이 끝없는 이주일 때, 여행은 사치였다. 우리 가족의 사전에는 여행이나 바캉스, 여름 휴가 같은 단어가 없었다. 당연히 가족여행의 추억 같은 것도 전무했다.

 

- 소설은 재미있는일들을 집어넣는게 아니라 무의미한 사건들을 배제하면서 쓰인다.

 

- 현지인들이 겪는 자잘하고 어지러운 일상을 잠깐 맛볼 수는 있지만 오래 지속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여행자는 도시의 정수만을 원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살핀다. 현지인들이 심드렁하게 지나치는 건물과 거리에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댄다. 여행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항해를 마치고 육지에 오르면 마치 육지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걸 땅 멀미라고들 부른다. 흔들림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찾아오는 낯선 단단함.

 

<여행의이유/김영하/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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