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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소중한 경험

  작가 김형경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국민일보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지금에도 상상하기 힘든 1억원 상금에 당선된 당선작<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쓴 작가라는 것이다. 당시에 속으로 ' 후원한 현대 그룹이 배포가 크긴 크네.'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인터뷰하는 어린 작가, 김형경의 모습이 선하다. 그리고 그 후에 자신의 내밀한 사연을 담은 자전적 소설 <세월1,2,3>을 읽으면서 작가의 나이답지 않은 단단함이 어디서 나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세월>에서 언급된, 작가의 성폭행 가해자가 궁금해서 찾아 보려고 이리저리 뒤지면서 보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 당시 그 가해자 남성은 잘 나가는 사람으로 TV 프로그램의 사회자이기도 한 명사(?)였다. 지금 같은 시대라면 진즉에 <미투> 운동으로 매장되었을테지만......당시의 사회분위기는 그런게 아니었다.

 

전에 '내면아이'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어, 종종 나의 감정을 그 내면 아이가 해소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스스로 하면서 나를 다독여 보곤 했었는데, 이 책을 읽곤 내면아이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알게 되었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와 자전적 소설 '세월'을 읽고 나서 이 작가의 책을 찾아 읽었고, 실망하지 않았으며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충실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류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땐,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을 보거나 들으면서, 일일이 분석하는 버릇이 생겼었다. '아하~ 저 사람은 이래서 저런 행동이나 말을 하는구나' .........그런데 이젠 그것에서 벗어나,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게 되고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덜 민감하게 된 건 다행스런 일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아봤자.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효과적이지도, 마음 다스림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다. 아직도 한참 멀었지만 조금씩 수양을 쌓는 것 같긴 하다.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이라 생각된다.

 

작가가 독서모임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 내용들이 알차게 기록되어 있다. 다른 이들에게 자기 삶의 주인이되라고 이야기 하지만 현실에선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작가 자신의 일화를 소개한 대목은 안타깝기도 했다. 어느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작가가 참여 했을때 선배 작가가 당선감이라고 추천한 작품이 여성을 성적 소모품 취급하는 남성의 판타지였단다. 그 작품이 당선작이 안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하고 결국 그 작품이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뒤이은 식사 자리에서 불편한 속내를 토로하더란다. 그 장면을 잠시 소개하자면,

<내 입장에선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그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불쾌한 존재였다. 열 살 이상 많은 선배 의견에 대놓고 반대한 것, 남성 중심 사회의 약자로서 감히, 또박또박 자기 의견을 주장한 것. 그 자리에서 사과하고, 또 다시 사과의 편지를 보내고, 편지를 받은 그 분이 전화했을 때 화해의 대화를 나누며 또 한 번 사과했다.>

 

작가가 사과는 했지만 마음 깊이 사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지성인들의 세계에서도 그런데 일반 사람들 사회에서는 얼마나 심할까?

어떤 이론이 사회전체적으로 일반화 되기 까지는 참 지난한 세월이 흘러야 가능할 것이다.

 

소설가가 쓴 내용이라 신경 정신과 의사가 쓴 것과는 또 다른 면에서, 섬세한 느낌이 들었다.

 

<소중한 경험 /김형경/ 사람풍경>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

-내면아이의 상처 치유하기

-내 안의 어린아이

-독이되는 부모

-좋은 부모의 시작은 자기 치유다.

 

-. 사람들은 가끔 몸속에 이야기가 가득 찬 생명체처럼 보인다.

그 생명체는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간절히 열망한다.

연인이든 선배든 혹은 독서 모임이든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을 만나는 순간 사람들은

비를 머금은 식물처럼 싱싱하게 자라나기 시작한다.

 

- 심리 에세이를 쓴 이후 독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늘 받는 요청은 책을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혼자라도 책을 읽으며 마음을 돌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진행하는 독서 모임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는 모임에 동참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 성인이 된 후 내게 한 가지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타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만드는 힘이었다.

배후에 어떤 작용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누군가와 마주앉아 대화를 시작하면 상대방은 무심결에 지난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곤 했다. 어둡고 축축하고 얼룩덜룩하여 마음 깊은 곳에 억눌러둔 비밀 같은 것이었다. 무장해제당한 듯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서 그들은 한순간 정신을 차린 듯 말했다. "아니,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 들을 때 벌써 "아니, 이 사람은 어쩌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싶었다.

타인의 비밀을 알게 된 자의 숙명이 두려웠고, 비밀을 지켜야 하는 부담감이 무거웠다. 하지만 곧 내게 또 한가지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망각의 능력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듣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 모든 내용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남다른 망각 기능은 타인의 이야기를 유도하는 재능에 포함된 옵션 같았다.

 

- "금강경을 백 번만 써보자."하고 마음 먹었다.

왜 사경이고 왜 100번인지를 설명할 수 없지만 직관적으로 그런 선택을 했다.

 

- 금강경 사경을 시작한 이후 새롭고 낯선 경험들이 찾아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삶을 변화 시키는 역동적인 것이었고, 좋은 일과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섞여 있었다. 수행을 통해 의식과 삶의 변화를 꾀하면 이전에 없던 사건들과 맞닥뜨리게 된다고 들어둔바 있었기에 입을 꾹 다물고, 주먹을 꼭 쥐고, 묵묵히 그것들을 감당했다. 그렇게 감당해야 한다고 느꼈던 일들 중 하나가 독서모임에 참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요청이었다.

 

- 사람은 어떤 한 가지 감정으로 살아갈 수 없다. 공감은 좌절되고, 사랑은 이별을 수반하고, 희망은 실패를 품고 있다. 좋고 나쁨이 빛과 그림자로 함께 하는데 이 모두를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 독서모임에서 이야기 할 때 처음에는 대부분 사회적 얼굴이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를 내보인다. 평소에 하던 대로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모습만 보여준다. 그 모임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도 의식의 지하 1층 정도에 묻어둔 경험이나 감정을 내 놓는다. 불안 , 금기, 보복 등이 두려워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여전히 할 수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누군가 가장 아픈 이야기를 꺼내면,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면, 비로소 그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 독서는 한 사람의 정신영역을 풍부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내면 공간에 경험, 지혜, 인물들을 무수히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다. 또한 독서는 무의식적 심리 치유 방법을 돕는다.

 

- 독서는 이야기와 함께 세상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다양한 삶의 문제에 대해 대응 능력을 갖는다는 뜻이다. 내면에 간직한 인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동일시할 대상이 많아 폭넓은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 독서를 통해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외부에 투사했던 모든 문제를 끌어와 자기가 끌어안는다는 뜻이다. "모두 내 문제구나" 진심으로 그렇게 인식하게 될 때 패러다임의 전환이 온다. 의존적 패러다임에서 주체적 패러다임으로 바뀌면 타인의 존재와 무관한, 주체적인 삶을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다. 아픈 자기 성찰이나 전복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 용기는 저절로 따라온다.

 

- 어떤 이는 책을 조금만 읽어도 걷잡을 수 없이 졸음이 쏟아져서 중단하게 된다고 말한다. 실은 모두 내면의 불안과 저항의 표현이다.

 

- 트라우마 경험을 가해자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왜 그랬느냐고 물을 때 중요한 것은 상대의 반응이 아니다. 억합한 분노를 정당한 분노 대상에게 정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사실 상처 자체보다는 상처를 준 대상에 대한 두려움에 여전히 짓눌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을 해낼 수 있다면 그 경험을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이다.

 

- 공감 능력은 자기 마음을 알아차린 깊이만큼 만들어 가지게 된다. 자기 내면에 어떤 감정들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기 어렵다. 공감 능력은 그러므로 자기 성찰 능력과 비례한다.

 

- 세 사람 이상이 모이면 그때부터는 이전과 다른 감정 작용이 일어난다.

단 둘이 있을 때는 다정하던 연인이, 친구나 선후배가 등장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대상관계 심리학과 집단 심리학의 차이는 바로 그 연인의 태도만큼 다르다. 그만큼 다른 역동이 일어난다.

 

-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인생이 이 모양이지,

자문하는 이들은 대체로 잘못된 유아기 생존법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 한 여성은 내면 아이를 인식하던 시기에 마트에 갔는데 분유에 시선이 닿는 순간 절박하게 분유가 먹고 싶었다.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기어이 분유를 구입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분유를 퍼 먹었다. 그러면서 알아차렸다. '아, 이것이 내면 아이가 원하는 것이었구나.'

 

- 옷차림도 감정이 표현되는 중요한 도구이다. 오이디푸스기를 잘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성을 유혹하는 옷차림을 즐긴다. 노출이 심하거나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는다. 내면에 불안감과 위축감이 많은 이는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는데 공을 들인다. 멋진 옷차림을 한채 화려한 액세서리로 치장한다. 자폐성향이 있는 사람은 사회성이 없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기 입장에서 편하게 생각하는 옷만 입는다. 내면에 우울감이 가득한 사람은 어둡고 칙칙한 옷을 입고 꼭 그만큼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처음에는 그토록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던 이들이 서서히 자기 모습을 객관적 시각으로 인식하는 지점이 온다. 그러면 서서히 옷차림과 태도가 변한다. 유혹하기 위한 옷차림이 아닌 자기를 존중하는 옷차림을 하고, 과시하기 위한 옷차림이 아닌 자기 정체성이 드러나는 옷차림을 한다.

 

- 삶이 힘들다고 호소하는 젊은이들을 드물지 않게 만난다. 그런 이들은 부모 마음에 들기 위해 지나치게 애써야 했던 성장기를 보낸 경우가 많다.

 

- 가끔 생의 목표를 성취한 후 슬럼프에 빠지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꿈이 없어졌기 때문에 방향을 잃은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실망했기 때문에 힘없이 주저앉은 것이 아닐까 싶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목표에 도달했지만 원했던 사랑이나 인정은 쏟아져 들어오지 않는다.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구멍이 채워지지 않자 오히려 그 구멍에 삼켜지고 만 것이다. 그런 이들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재능이나 삶의 소명을 점검해보면 좋을 것이다.

 

- 최근에는 인큐베이터에서 양육된 성인의 내면에 근원적으로 불안한 내면 아이가 자리잡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 지금 우리 사회의 건강에 가장 필요한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자기성찰'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는 내면을 보지않기 위해 중독물질에 매달리고, 내면을 회피하면서 타인과 상황을 탓하고, 내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화가 날 때마다 화를 낸다. 무의식의 의식화, 내면 아이 돌보기, 화광반조는 모두 같은 뜻이다.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릴 줄 아는 것, 그런 사람은 최소한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

 

- 자주 만나자고 보채는 남자는 부담스러웠고, 지나치게 자신에게 몰입하는 남자는 매력이 없었다. 거듭 남자를 유혹했다가 떠나곤 하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맞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내면의 시기심 때문에, 혹은 성장기 차별 경험에서 비롯된 분노 때문에 엉뚱한 남자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모든 남자를 정서적 용도로 잠깐 사용 후 버렸으며 그 행위의 배경에 복수심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 박해감을 가진 이들은 타인을 악한 이나 공격자로 만드는 기술에 능하다. 선한 얼굴, 온순한 태도로 상대가 자기를 공격했다고 말하면서 경쟁자를 제거하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한다. 혹은 약자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상대방의 공격 행동을 실제로 유도한다. 박해감을 가진 이들에게 공격하고 협박하는 부모가 있었던 것처럼 그들 역시 부모의 행동을 내면화해 가지고 있다.

 

- 실은 모든 사람이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느라 타인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 자기를 공격한다고 느끼는 마음은 "땅바닥이 벌떡 일어나 이마를 때렸다."고 말하는 만취자의 농담이거나 망상이다."

 

- 무엇보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이었던 원시시대부터 기억이 새겨져 있다. 폭력의 경험과 위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회공동체를 만들었고 인간은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 신용사회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단어의 뒷면에는 기본적으로 불신사회가 전제되어 있다. 자연환경을 관리함으로써 이전의 물리적 위험은 줄었지만 문명화된 자연은 원시 자연보다 더욱 예측할 수 없는 것이되었다. 세상과 외부 환경을 믿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 이상한 점은 병리적 나르시시스트의 미숙한 인격에서 나오는 행동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혹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의 행동이 간혹 터무니없고 비상식적인 경우에도 대중은 그것을 성공한 사람의 특권으로 여기며 관대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을 선망하고 숭배하면서 그들을 모방한다. 대중의 마음을 읽은 자본주의는 나르시시즘을 훌륭한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다. 시중에 범람하는 나르시시즘의 코드는 다시 대중을 휩쓸어가는 기호가 된다.

 

- 문제는 정서적 도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나르시시트들이 힘을 가졌을 때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리더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자기 가치만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들을 키워줄줄 모르는 사람이 된다.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사용한다. 타인을 착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성공이나 특별함의 증거라고 믿는다. 자신의 잘못이나 약점이 드러났을 때는 겸허하게 인정하기 보다는 끝까지 부정하는 쪽을 택한다. 그들에게 겸손함이란 약자가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 나르시시트들이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 채 내면에 숨겨두고 있는 감정은 수치심과 시기심이다.

 

- 처음 사랑을 경험하는 젊은이들이 그 어려움에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잘못이 있다면 사랑이 오직 달콤하고 행복한 것이라는 환상을 증폭시킨 문화나, 사랑이 본래 고통을 감수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어른들에게 있을 것이다.

 

- 가부장제 같은 집단 문화도 개인이 자기 경계를 갖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자주 부모의 명예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교육받는다. 내 삶과 부모의 삶에 경계가 없고, 내가 할 일과 가문의 업적에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문화에서는 자기만의 감정이나 소망을 갖는 일에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국가와 민족을 칭송하는 사회도 개인의 자기실현 노력을 비겁한 이기주의로 오해하기 쉽다.

 

- 많은 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기'가 어려운 이유는 정서적 자기 경계를 지키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적 자극뿐 아니라 평가, 판단, 심지어 글이나 농담에도 격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기 일수이다.

 

-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많은 부분이 실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나아가 그 근거 없는 감정이 본래부터 실체가 없는 것임을. 실체없는 감정에 반응하지 않고 있으면 그것이 마침내 파도처럼 스러진다는 사실을. 그러면 삶의 에너지가 절약되어 보다 창의적인 일에 힘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심리적 자기 경계를 학립하는 일이다.

 

-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대물림된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감정의 전달 방식은 '동일시'이다. 부모가 세상 그 자체인 시기에 아이들은 부모 행동을 고스란히 흡수하듯 배운다.

 

- 이따금 부모의 잘못된 양육방식을 일깨우는 공익광고를 만나는 때가 있다. "아동 폭력 가해자의 80%는 부모입니다."라거나 "엄마는 나를 사랑합니다. 내가 말을 잘 들을때만" 그런 카피와 함께 슬퍼하는 아이의 영상이 TV화면에 비치곤 했다. 그때마다 혼자 놀라는 마음이 되었다. 카피는 참인 명제이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상식이지만, 대중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있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일었다. "내가 옳고 선하고 정당하다"는 나르시시즘적 자기인식 조차 깨지못한 문화인데 저렇게 크고 강한 것을 내밀면 이제 한 발 내디디기 시작한 자기성찰 분위기가 역풍을 맞은 듯 움츠러들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광고는 한 두 번 비치다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고 그때마다 혼자 또 그배경을 궁금해 했다.

 

- 정신분석학이 부모의 양육이 자녀의 정신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밝혀나가는 동안 부모가 반드시 좋은 역할만 하지 않는다는 점도 동시에 밝혀졌다. 부모가 항상 옳다는 전제군주적 양육 방식이 잘못되었으며, 부모의 잘못된 양육에 해악을 입은 자녀가 성인이 된 후 삶에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알고 있었던 그 지식이 대중의 보편적 상식으로 자리 잡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 심리 문제의 대물림 현상에 대해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세르주 티스롱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 탓에 자기도 모르게 인성이 왜곡된 2세대 부모는 그 자녀에게 전체적으로 뒤틀린 거울 역할을 하는 셈이다. 손자 세대에 이르면 부모 세대와 동일한 장애가 나타나는데, 그 증세는 훨씬 심각하다. 이런 장애들의 공통적 특징은 외견상 아무 이유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 욕동 즉 생의 추진력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에너지가 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자기 보전 본능과 자기 파괴 본능이다. 누구의 내면에서나 사랑과 불안감이 서로 싸우고, 소망과 시기심이 대립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래도록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삶의 추진력으로 사용해왔다. 식민지의 분노, 전쟁의 불안, 가난의 복수심 등을 에너지로 사용하여 거의 한 세기를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 탈진한 듯 보인다.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사용하면 밖으로 성취하는 것만큼 안으로도 내상을 입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중년의 위기에서 맞는 무력감도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삶의 추진력으로 사용한 결과라고 한다.

 

- 진정한 생의 에너지는 이타성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타적인 유전자가 인류를 살아남게 한다는 진화 심리학자들의 연구, 사랑이 가장 힘이 세다고 제안하는 세계 종교의 지혜가 그 명제를 뒷받침한다.

 

- 한사람이 내보이는 자랑질은 다른 사람에게 결핍감을 선사하고 결핍감은 즉각 그들 내면에 억압된 시기심을 촉발 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랑, 박탈감, 시기심, 분노, 공격으로 이어지는 매커니즘이 얼마나 빈틈없이 작동하는지 일상에서 목격할 때마다 놀라웠다.

 

- 자본주의 시장은 자랑하기와 시기하기를 주요 마케팅 전략으로 사용한다.

 

- 역설적이게도, 치열한 경쟁의 장에서 최종 우승자는 대체로 경쟁하지 않는 사람,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쓰지않고, 타인들의 갈등에 휩싸이지 않은 채 고요한 내면 상태를 유지하려 애쓰는 듯 보였다. 불필요한 감정 에너지를 퍼올리지 않는 그들이야말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 사춘기에서 부터 25세때 까지가 정체성 형성기인데 정체성 형성이 어려운 이유는 양육환경과 산업화로 인한 공동체 해체를 가장 먼저 꼽는다. 공동체가 제공해주던 삶의 비전, 지혜 등을 상실한 채 도시의 허허벌판에서 홀로 자기 삶의 명분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 나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붕괴, 심리적 파행이 식민지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조선 시대까지는 계급 사회이긴 해도 개인이 개인에 대해 그토록 파괴적이고 모욕적인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35년에 걸친 피지배자로서 사는 동안 분노, 모욕, 멸시, 결핍, 슬픔 등의 감정이 국민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지 않았나 싶다.

인간 심리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식민지 피지배경험은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가장 작은 단위로, 가령 누군가 내 집을 함부로 침범해서 내 행동을 규제하고, 내 물건을 함부로 내어가고, 사랑하는 가족을 전쟁터나 공장으로 끌고가고.....잠시 상상했을 뿐인데 머리로 피가 몰리면서 심장 박동이 거세어졌다. 그런 날이 35년 쯤 지속된다고 상상하자 딱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해방조차 우리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심리적으로 피지배 경험을 제대로 극복한 적이 없다. 해방이후 곧바로 발발한 한국전쟁도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것도 아닌 이데올로기를 외부에서 들여와 목숨 걸고 그것을 수호하며서 동족을 죽인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할뿐이었다. 인간 심리에 대해 공부하면서 어렴풋이, 일본을 향했던 분노가 다른 대상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그 전쟁의 실체를 이해하게 되었다.

 

-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을 받을 여건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혼자 할 수 있는 '자기 역사 쓰기'를 권한다.

학자들은 자기 역사 쓰기를 할 때 '삼대 삼차원'의 관점에서 기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부모와 조부모가 살아온 역사부터 이해해야 그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현재모습을 짚어낼 수 있다. 또한 개인사와 가족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역사를 기록해봐야 한다. 가령 1930년대 우리나라에서 '아내에 의한 남편 살해율이 세계 최고 였다. '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 강점기 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 부모 세대가 해결하지 않은 문제, 회피하고 봉인해온 기억들로 인해 젊은 세대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목격하곤 한다.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은 늘 불안과 수치심 때문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곤 했는데, 그녀가 찾아낸 불편한 감정의 뿌리는 자신이 혼전임신된 아기였다는 사실이었다. 요즘에야 혼전임신을 축복받은 혼수처럼 여기지만.....

 

 <소중한 경험 / 김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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