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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상실의 시대

 또 다시 읽는 '상실의 시대',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다.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몇 번 다시 들어봤지만 비틀즈의 다른 곡들에 비해 확~ 끌리는 곡은 아니었다.

여주인공 나오코가 요양원에서 환자이자 음악 치료사인 레이코에게 들려달라고 하는 대목에서 언급될 뿐,

노르웨이의 숲과 많은 연관이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출간되었다가 큰 호응을 받지 못했는데,

나중에 <상실의 시대>라고 바꾸어 출간되어 대박난 작품이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음울하고 고독함에 몸부림 치는 상처많은 인물들이다.

초반에 바삭하게 말라 죽은 매미를 밟아서 소리가 나는 장면이나, '알맹이만 빠져나간 허물처럼 흔들거리는 빨랫줄의 흰셔츠'라는 표현에서도 우울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등학교 2학년때 만난 나오코는 화자인 나(와타나베)의 유일한 친구, 기즈키의 애인이었고 함께 더블 데이트도 한 사이다. 이 묘한 삼각관계는 보통 통속적인 잘못된 만남으로 인한 질투와 치정의 삼각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세사람이 있어야 완전체가 되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사람의 관계를 하루키는 '그건 마치 내(와타나베)가 초대 손님이고, 기즈키가 유능한 진행자이고, 나오코가 보조 역할을 하는 텔레비전의 토크프로그램 같기도 했다.' 고 표현하고 있다.

 

 어느날 기즈키는 유서도 없고 자살 동기도 없이 와타나베를 만나고 당구를 친 그날 집에 가서 자살을 한다.

남은 두 사람,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공유자로 볼 수 있는 기즈키를 잃은 심정에 영혼을 치유하는 심정으로 마냥 도쿄 거리를 걷는다. 기즈키를 잃은 빈 공간을 메워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채, 비어서 몸은 부자연스럽게 가벼웠다. 두 사람은 각기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서 조용히 살아간다. 학교 건물도 아파트를 개조한 교도소거나, 교도소를 개조한 아파트로 묘사하고 있어 스스로를 유폐시킨듯 한 삶을 살아간다.

 

어쩌다가 두 사람이 만나더라도 기즈키의 이야기는 화제에 올리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상당 부분 잃어버린 것 같은 두 사람을 하루키 특유의 시니컬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나오코의 생일날 그녀의 집에서 밤을 함께 보낸 와타나베는 전화를 걸어달라는 메모를 남기고 돌아오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전화가 없었다. 찾아간 그녀의 아파트에서 이사를 갔다는 관리인의 말만 들을 수 있었다. 편지를 보내고 오래지나서야 답장이 왔다. 대학을 휴학하고 병원에 다니다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요양소에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가뜩이나 외부와 단절된 상태인데 더욱 깊이 숨어들어 바깥세계와의 차단을 통해 신경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편지 말미엔 너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즈키 없이 만난다는 건 스스로도 용서 못한다는 뜻일까?

 

와타나베는 유일한 대화 상대인 나가가와 선배와 어울려 낯선 여자들을 만나 의미없는 잠자리를 하곤 하며 세월을 축내곤 한다. 여기서도 삼각관계가 등장하는 데 역시 질투와 뺏고 빼앗는 삼각관계가 아니다. 바로 나가가와 선배의 애인인 하쓰미 - 나중에 자살을 하게 된다.

 

 대학해체를 주장하던 아이들은 동맹 휴학을 철회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학점을 따지 못하는 것이 두려워 꼬박꼬박 출석하는 모습이 비열하게 느껴진 와타나베는 강의는 듣지만 출석을 부를 땐 대답하지 않는다. 일본 제국주의 철폐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도 그타령이 그 타령이고 오히려 그들의 상상력의 결핍만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학생 운동 후일담 문학이 한창 전성을 누리던 시기가 있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허망함에 상실감을 느낀 운동권에서 상실감을 그린 소설들. 그때 침을 튀기며 외치던 운동권들이 지금은 정치권에 들어온지 한참이 지났고, 어떤 이는 전혀 다른 극우쪽에 서서 태극기 부대를 대변하여 아연실색하게 하지 않았던가.

 

나오코가 사라지고 나서 모든게 시시하게 보이고, 그런 의미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 마치 봄을 맞아 바깥 세계로 막 뛰어나온 새끼 동물 같은, 싱그러운 생명감을 분출하는 미도리라는 여학생이 다가왔다. 미도리도 그런 밝은 겉모습과 달리 부모로 부터 받지 못한 사랑에 목말라하는 아이였다. 미도리 아빠는 미도리 엄마가 돌아가자 '난 지금 몹시 억울하다. 너의 어머니를 잃기보단 너희들 자매를 잃는 편이 훨씬 나아겠다.'라는 말로 미도리 자매를 어이없게 만들곤 우루과이로 떠났다고 했지만 나중에 거짓말이었음을 밝힌다.

 

와타나베와 미도리가 화재현장을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는 부분에선 영화 '버닝'이 떠올랐다. 비닐 하우스가 불타는 장면이.

 

기숙사로 돌아온 어느날 나오코에게서 편지가 왔다. 자기가 있는 요양원에 와줄 수 있느냐고.

나오코에게 찾아가서 만난 환자 겸 음악 치료사로 나오코의 룸메이트인 레이코를 만난다. 레이코가 이곳에 들어오기까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레이코는 어느날 손가락이 마비가 되고 꿈꾸고 박수 갈채를 받으면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다 7년 전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다.

 

여기 요양원에서 나오코의 어린 시절 언니도 기즈키와 똑같이 유서도 없고, 이유도 알 수 없이 자살을 한 사실을 듣게 된다. 읽는 도중 내가 가 보았던 기치죠지 이야기가 나와서 옛 사진을 뒤적여 기치죠지에서 찍은 사진을 둘러 보았다.

 

레이코가 와타나베를 찾아와 나오코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짧고 강렬한 만남 후  떠난다.

그렇다면, 과연 미도리와의 만남으로 와타나베는 삶을 잘 이어나갈까?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삼각관계를 정리해 보면,

 

와타나베 - 기즈키(자살) - 나오코(자살)

와타나베 - 가와사키 - 하쓰미(자살)

와타나베 - 나오코 (자살)- 레이코

와타나베 - 미도리 - 미도리의 언니(자살) : 이 경우는 현실적인 삼각관계는 아니다.

 

이 모든 삼각관계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삼각관계가 아니다.

일반적인 삼각관계에서는 한 사람이 사라지면 나머지 두 사람이 잘 살아야 정상이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셋이 있어야 완전체가 되는 경우인데, 뚜렷한 동기없이 한 사람이 자살을 하고 남은 두 사람은 깊은 상실감을 갖게 된다.

 

현실에 충실한, 나가사와와 '돌격대'라 불린 와타나베의 룸 메이트는 다른 인물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라, 1970년대의 일본에 대해 살펴보니, 일본의 고도성장 시기였다.

경제적 고도 성장기에 반대급부로 느끼게 되는 정신적 허기와 삶의 허무를 그리려 한 것인지.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노골적인 묘사가 눈쌀을 찌푸리게 하지 않는 것은 그런 허무주의가 배경으로 한 애잔함 탓일 것 같다.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그래도 기억은 확실히 멀어져만 가고, 이미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가며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씩 몹시 불안한 마음이 되곤 한다. 어쩌면 내 자신이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속에 기억의 변방이라고 부를 만한 어두운 장소가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전부 거기에 쌓여서는 부드러운 진흙으로 변해버린 건 아닐까 하고.

 

- 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은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나이였다.

 

- 학교에서 기즈키는 나 말고는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토록 머리가 명석하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 어째서 그 능력을 좀더 넓은 세계로 돌리지 않고 우리 세 사람만의 작은 세계로 집중하는데 만족하는지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 그가 나를 친구로 선택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 어쩌면 나오코가 나에 대해 화를 냈던 건, 기즈키와 마지막으로 만나서 이야기 한 것이 그녀가 아니고 나였다는 사실 때문이지도 모른다.

 

- 나와 당구를 치고 차 한잔씩 마시고 담배를 피운 그날 밤 기즈키는 자기 집 차고에서 자살을 했다.

 

- 도쿄에 올라와서 기숙사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 그것뿐이었다.

 

- 아무리 잊어버리려해도 내 안에는 뭔가 뿌옇게 흐린 공기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덩어리는 단순하면서도 뚜렷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이런 말로 바꿔 놓을 수가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나오코는 꼭 한 번, 좋아하는 여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헤어진 여자 이야기를 했다. 좋은 아이였고, 그녀와 자는 건 좋았으며, 지금도 가끔씩 그립긴 하지만 왠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고 나는 말했다. 아마 내 마음속에는 딱딱한 껍데기 같은 게 있어서, 그걸 뚫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제한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그렇게 해서 나는 열여덟 살에서 열아홉 살이 되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국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죽은 친구의 연인과 데이트를 했다. 도대체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 나가사와 선배는 나같은 사람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굉장한 독서가였는데, 죽어서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에는 원칙적으로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책 외에는 신용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현대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니지. 인생은 짧아."

 

-나가사와 선배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그에 대해 조금의 경의도 복종도 감탄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인간성의 매우 기묘한 부분, 굴절된 부분에 흥미를 갖긴 했지만, 우수한 성적이라드나, 영묘한 기운이라든가, 남자다운 풍채라든가에 대해선 한 가닥의 관심도 갖지 않았다. 나가사와로서는 나의 그런 태도가 아주 신기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가사와 선배는 몇 가지 상반되는 특질을,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때로는 나조차 감동하고 말 정도르 친절했지만, 그와 동시에 지나치게 심술궂은 면이 있었다. 그는 깜짝 놀랄 만큼 고귀한 정신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별수 없는 속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이끌어 낙천적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면서도, 그 마음은 고독하게 음을한 진흙 구덩이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이율배반성을 처음부터 명백히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이 어째서 그의 그런 면을 보지 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나름의 지옥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 스무 살이 되다니 어쩐지 바보 같애. 난 스무 살이 될 준비 같은 거, 전혀 안돼 있었어. 묘한 기분이야, 어쩐지 누군가에 의해 뒤에서 무리하게 떠밀려 온 것만 같다니까.

 

-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이야기의 말끝이 잡아뜯긴 듯한 꼴로 공중에 떠 있었다.

 

- 고등학교 1학년 때, 난 아무래도 계란 굽는 기구가 사고 싶었어. 국물 계란 말이를 만들기 위한 가늘고 길쭉한 동제품이었어. 그래서 난 새 브래지어 살 돈으로 그걸 사버린거야. 덕분에 혼이 났어. 한 3개월쯤을 브래지어 한 개로 버텨야 했으니까. 믿을 수 있어? 밤이면 빨아서 열심히 말려 아침에 그걸 하고 나갔어. 가끔 마르지 않으면 그런 비극이 없었어. 세상에서 축축한 브래지어를 하는 것만큼 서글픈 일은 없을 거야. 더구나 그것이 국물 계란말이 기구 때문이라 생각하면.(미도리)

 

-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빠는 이렇게 말했어. '난 지금 몹시 억울하다. 너의 어머니를 잃기보단 너희들 자매를 잃는 편이 훨씬 나아겠다.'(미도리)

 

- 미도리는 잽싸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며 한꺼번에 네 가지 정도의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쪽에서 조림의 맛을 보는가 하면, 뭔가를 도마 위에서 재빨리 다지고,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어 담아 놓는가 하면, 다 사용한 냄비를 물에 깨끗이 씻기도 했다. 뒤에서 보는 미도리의 그 모습은 마치 인도의 타악기 연주자를 연상케했다. 저쪽 종을 울리는가 하면 이쪽 판자를 두드리고, 그러곤 물소 뼈를 두드리기도 하는 식이었다. 하나하나의 동작이 민첩하고 낭비가 없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들을 차례대로 하나하나 돌이켜보았다. 생각나는 일마나 유리판 두세 장을 끼워 넣은 것 같은, 이상하게 어색하고 비현실적인 일들로 느껴졌지만, 틀림없이 나의 신상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 이곳에 있는 한 우리들은 타인을 괴롭히지 않아도 되며, 타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자신이 '비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바로 그 점이 바깥 세계와 전혀 다른 점이야. 바깥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뚤어짐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거든.

하지만 우리들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비뚤어짐이야말로 전제 조건이지. 우리들은 인디언이 머리에 그 부족을 나타내는 깃털을 꽂고 있듯이, 비뚤어짐을 몸에 달고 있어. 그리고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조용히 살고 있는 거야.

 

-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무의미한 외침, 과장된 표현등이 그리웠다. 물론 나는 그런 웅성거림엔 진저리가 나 있었지만, 그래도 그 기묘한 정적 속에서 생선을 먹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 지난날 나오코의 아름다움의 그늘에 보였다 사라졌다 하던 어떤 날카로움 - 상대방을 문득 서늘하게 만들곤 하던 그 얇은 칼날과 같은 날카로움 - 은 멀리 뒤로 물러서 있었고, 그 대신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한 독특한 차분함이 감돌고 있었다.

 

- 나오코에게 나가사와 선배 이야기를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묘한 인간성과 독자적인 사고 방식, 그리고 편견에 치우친 도덕성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마지막엔 그녀도 대강 내가 말하고자 하는 듯을 이해한 것 같았다.

 

- 너와 매주 만나 이야기하는 건 난데, 네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는 건 기즈키뿐이라는 사실이 말이야. 그걸 생각하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잔 것 같아.

 

-"전혀 몸이 젖어 오질 않았던 거야."하고 나오코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열리지가 않았어, 전혀. 그래서 몹시 아팠지. 말라 있어서, 아팠던 거야. 이런저런 방법을 우린 다해 봤어. 하지만 어떻게 해도 안 되었어. 뭘 가지고 부드럽게 적셔봐도 역시 아픈거야. 그래서 난 줄곧 기즈키 것을 손가락이나 입으로 해줬어. 알겠어, 무슨 말인지?"

 

- 나와 기즈키는 정말 특별한 관계였어. 우리는 세 살 땐가부터 함께 놀았어. 우린 언제나 함께였고, 그렇게 자랐어. 처음 키스를 한 게 초등학교 6학년 때였지. 정말 멋있었어.

 

- 기즈키가 죽은 후로는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도대체 어떤 건지 조차도

 

- 나(레이코)는 여기에 7년 동안 있으면서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걸 지켜봤어. 아마 너무 많이 봐왔는지도 몰라. 그래서 어던 사람을 보고만 있어도 그 사람이 회복될 거라거나 안될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파악하게 되었어. 그런데 나오코의 경우는 전혀 짐작이 안돼.

 

- 내 인생 최고의 부분이 스물 갓 넘어 끝나버렸지 뭐야. 너무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온갖 가능성을 손에 취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은 거야. 피아노를 더 이상 치지 못하니 더 이상 박수 치는 사람도 없고, 떠받들어 주거나 칭찬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다, 허구한 날 동네 아이들에게 바이엘이나 소나타를 가르치는게 고작이었으니까.

 

- 만일 기즈키가 살아 있다면, 아마 우린 함께 있으면서 사랑을 나누다가, 조금씩 불행해져 갔을 거라고 생각해.

 

- 성장의 고통 같은 과정을 치러야 할 때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바람에 그 고지서가 이제야 돌아온 거야.

 

- 티셔츠 바람으로 독일어 문법표를 암기 하고 있으려니 언뜻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엌의 양지바른 곳에서 독일어의 불규칙 동사와 이 부엌의 테이블은, 거의 상상도 못할 만큼 멀리 격리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우리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지.

 

- "그런데 왜 넌 그런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야"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우린 모두 어딘가 휘어지고, 비뚤어지고, 헤엄을 못쳐서 자꾸만 물 속에 빠져 들어가기만 하는 인간들이야. 나도 기즈키도 레이코 언니도, 모두 그래. 어째서 좀더 정상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못하는 거야?" "그건 내겐 그렇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야. 나오코나 기즈키, 레이코씨가 어딘지 비뚤어져 있다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거든. 내가 생각하는 어딘지 비뚤어진 사람들은 다들 힘차게 바깥 세상을 활보하고 있어."

 

- 도대체 열세 살짜리 여자애가 서른 살 넘은 여자에게 동성 연애를 걸려고 했다면, 어느 누가 그 말을 믿겠어? 무슨 소리를 하든 세상 사람들이란, 자기들이 믿고 싶은 말밖엔 믿지 않는 법이거든, 발버둥치면 발버둥칠수록 우리들의 입장만 더욱더 난처해질 뿐인걸.

 

- 나는 도중에 몇 번이고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별 의미없이 한숨을 쉬어 보기도 했다. 어쩐지 마치 어딘가 중력이 다른 혹성에라도 와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미도리는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줍기라도 하듯이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로 가져갔다.

 

- 환상이라고 보기에는 세밀한 부분까지 너무 뚜렷하게 기억났고, 정말로 있었던 일로 보기에는 모든 게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나오코의 몸매나 달빛마저도.

 

- 혹시 에우리피데스를 알고 계세요? 고대 그리스인인데, 아이스킬로스 그리고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비극의 빅쓰리라고 불리고 있어요. 그의 연극의 특징은, 모든 사람들이 엉망으로 혼란에 빠져서 옴짝달쌀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점입니다. 아시겠어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각기 제나름의 사정과 이유와 주장이 있고, 또 모두들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에요. 그리고 그 덕분에 모든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마는 거죠.

그건 그래요. 모든 사람의 정의가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의 행복이 달성되는 일은 원리적으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카오스가 닥쳐 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아주 간단하게 풀려요. 마지막에 하느님이 나타나는 거죠.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예요. 너는 저리로 가라. 너는 이리로 와라. 너는 저자와 손을 잡아라, 너는 거기서 잠시 가만히 있어라, 하는 식으로 말이죠. 중개인 같은 거죠.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죠. 이걸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부르고 있어요. 에루리피데스의 연극에는 언제나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오죠.

 

데우스 엑스 마키나 ( 라틴어: deus ex machina )는 문학 작품에서 결말을 짓거나 갈등을 풀기 위해 뜬금없는 사건을 일으키는 플롯 장치 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기계 장치로 (연극 무대에) 내려온 신" (god from the machine)이라는 뜻이다. 호라티우스 는 시학 (Ars Poetica)에서 시인은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신을 등장시켜선 안된다고 일렀다. 신고전주의 문학 비평에서 갑작스러운 기적으로 풀리는 이야기는 나쁜 연극의 특징이다.

 

- 나는 어느날 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도리를 떠올리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잘되질 않았다. 할 수 없이 도중에 나오코로 바꿔 봤지만, 나오코의 이미지도 이번에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쩐지 바보스런 기분이 들어 집어치우고 말았다. 결국 위스키로 마음을 달랜 후 이를 닦고 잤다.

 

- 나오코가 매일 아침 새들을 돌보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나 자신의 태엽을 감고 있는 거야.

 

- 와타나베도 나처럼 본질적으로는 자신에게만 흥미를 느끼는 인간이야. 오만하다든가 그렇지 않다든가 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야.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그런 것밖에는 흥미를 못 가져, 그러니까 자기아 타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있지. 내가 와타나베를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점이야. (나가사와 선배)

 

- 나오코는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레이코씨는 기타로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속에서, 그들이 있는 그 작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격한 그리움이 소용돌이쳤다.

 

-하쓰미씨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나가사와 선배라면 그런 여자를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쓰미 씨라는 여성 속에는 뭔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녀 스스로가 강한 힘을 내어 상대를 뒤흔드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발산하는 힘은 작았지만 그것이 상대의 마음에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 하쓰미씨는 - 내가 아는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 인생의 어느 단계에 이르자, 문득 생각난 것처럼 스스로의 생명을 끊었다. 그녀는 나가사와 선배가 독일로 가버린 2년 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그 2년 후에 면도칼로 손목을 그었다.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은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그리고 8년 후, 나는 여자의 집 부엌에서 한밤중에, 그것도 여자 친구의 죽은 아버지가 생전에 입었던 사이즈가 작은 파자마를 입은 채 같은 제목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뭔가 참 기묘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 나는 스무살이 되었고 가을은 겨울로 바뀌어 갔지만, 내 생할에 변화다운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대학에 다니고, 일주일에 세 번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하면, 이따금<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었고, 일요일이 되면 빨래를 하고, 나오코에게 긴 편지를 썼다. 때때로 미도리와 만나 식사를 하거나 동물원에 가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 나가사와 선배가 몇 번인가 걸 헌팅을 가자고 유혹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일이 있다고 거절했다. 모든 것이 번거롭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오 자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밤거리에 나가 술을 마시고, 적당한 여자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나누고, 호텔을 간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지겨웠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염없이 되풀이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싫증도 내지 않는 나가사와라는 사람에게 새삼스럽게 외경스러움을 느꼈다.

 

-특별히 나쁜 상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 파도 같은 것이 일고 있을 따름이다.

 

- 나가사와 선배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이고, 게다가 매일매일 그 의지를 강화해 나가고 있어요. 그래서 뭔가에 얻어맞으면 더욱 강해지려는 사람이거든요. 남에게 등을 보이느니 차라리 괄태충이라도 삼키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에게 하쓰미씨는 뭘 기대하는 건가요?

 

- 조용하고 환경도 좋고, 레이코씨도 좋은 사람이고. 하지만 오래 있을 곳은 못 돼. 오래 있기에는 이곳은 너무 특수하니까. 오래 있을 수록 나가기 더 힘들어질 거야.

 

- 눈구름이 어둡게 해를 가리며 낮게 떠 있어서, 눈으로 뒤덮인 하늘과 대지 사이에는 아주 작은 공간밖에 열려 있지 않았다.

 

- 조금씩 환청이 시작되었어. 편지를 쓰려고 하면 여러 사람이 말을 걸어 편지쓰는 걸 방해하는 거였어.

 

- 나는 가능하다면 와타나베도 참가하는 상담을 하고 싶다고 제안했고 의사도 찬성했지만 나오코가 반대했어. 그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만날 때는 깨끗한 몸으로 만나고 싶으니까'라는 게 그 이유였지.

 

- 어째서 이렇게도 아름다운 육체가 병을 앓아야 하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 레이코 씨의 편지를 받고 내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쾌유 쪽으로 믿고 있었던 나오코에 대한 나의 낙관적인 생각이 일순간에 뒤집힌 데 있었다.

 

- 미도리의 언니도 그녀 자신도 한동안은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지질 못했다. 그때까지 살아온 그녀들의 인생에 비해서 너무나 편안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누군가의 병간호를 하거나, 가게 일을 거들어 주면서 매일을 바쁘게 보내는 데 너무 길들여 있었다고 미도리는 말했다.

 

- 4월은 혼자서 지내기엔 너무나 외로운 계절이었다. 4월엔 주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코트를 벗어 던진채, 양지 바른 곳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거나,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외톨이였다. 나오코도 미도리도 나가사와 선배도, 모두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겐 '안녕'하고 인사할 상대조차 없었다. 그 '돌격대' 마저도 나는 그리웠다.

 

- 우리는(정상인과 비정상적인 사람을 다 포함한 총칭이야)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야.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서 은행 예금처럼 빡빡하게 살아 나갈 순 없어.

 

- 나는 기차나 버스로, 때로는 지나가는 트럭 조수석을 얻어타고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이동했으며, 공터나 역, 공원이나 냇가, 해안, 그밖에 잠잘 곳이 있으면 어디서든 침낭을 펴고 잤다.

 

- 그녀의 이미지는 밀물처럼 잇따라 나에게 밀려와서, 내 몸을 기묘한 장소로 밀어내고 있었다.

 

- 우리는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 이봐, 기즈키. 너는 옛날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어. 그리고 지금 나오코오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 버린 거야. 때때로 나는 박물관의 관리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휑뎅그렁한 박물관 말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는 거야.

 

- 생각해보면 나오코와 둘이서 도쿄 거리를 함께 걸을 때도, 나는 꼭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예전에 나와 나오코가 기즈키라는 죽은 자를 공유하고 있었듯이, 지금 나와 레이코 씨는 나오코라는 죽은 자를 공유하고 있었다.

 

- 나와 나오코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어요. 생각해보면 우린 처음부터 생사의 경계선에서 맺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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