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말하는 '옳다'라는 의미는
당신(모든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감정이 옳다는 것이다.
저자가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관점은 개별자로서의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다.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고 그 감정을 어떻게 치유해야 옳을지
의사로서가 아닌, 진정한 치유자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이론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교과서적으로 배워왔던 지식과 이론을 현장에서 왜 적용하기 힘든지 실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고 있다. 정서적으로 '지금 현재의 네 마음이 이해가 돼.' 라는 사실을 상대에게 일깨워주는 게 피해자들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데에 고개가 끄덕여 졌다. 그게 제대로 된 순서고 인간에 대한 예의 인 것이다.
우리는, 나는 숱하게 다른 누군가가 고통이나, 자신의 상처등을 어렵게 꺼낼 때, 조언을 한 많은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 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전혀 쓸데 없는 짓이라고 말한다. 일단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것. 그후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면서 그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감정이 옳다는 생각을 먼저 갖는 것.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사람의 마음이 옳다고, 그 사람이 한 잘못된 행위까지도 옳다고 생각하는가?
그 사람의 현재 마음과 그 사람의 행동을 대하는 마음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 사람이 물건을 부수거나, 사람을 해치려 한다는 것까지 옳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책을 읽다가 어떤 부분은 다른 저서에서도 한 이야기가 또 들어있었다.
중요하고 생각되어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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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폭력이든 가정사든 불행한 사고든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집단적 고통을 보이는 일도 한 개인에 따르면 각자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개별적 고통이 된다.
- 엄마는 그러면 안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줘야지. 그 애가 나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고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그러면 안 되지.
- 적정기술은 화성 이주를 꿈꿀 정도로 환상적인 과학 기술이 넘쳐 나는 시대에 간단하고 일상적인 기술의 결핍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주목에서 비롯한 개념이다.
- 초기에 많은(심리치유)전문가들이 현장에 왔지만 이내 거의 사라졌다.
대신 "집에 앉아만 있을 수 없어서 무작정 왔다."는 자원활동가들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들의 행동과 눈빛은 트라우마를 받은 이후 세상과 사람을 통째로 불신하게 된 피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결정적인 위로다.
- 내가 관련 자격증을 가졌으니 오해를 무릅쓰고 정신의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정신의학은 신경증, 정신 질환 등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임상적, 학문적 틀 위에 세워진 의학의 한 분야다. 이 틀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고통과 갈등을 질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통을 유지한다. 그래서 정신의학은 사람을 '사람'보다는 환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자격증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치유자다.
- 만약 조리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 음식을 할 수 있다는 법이 있다면 우리 일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사람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거침없이 나를 표현할 때다. 모든 아기가 아름다운 것도 그때문이다.
-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던 곳에서 일군의 노인들이 서명대 집기를 부수고 유가족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일이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소동이 끝난 후 행패를 부리던 노인 중 한 명과 얘기를 나누게 됐다. 나는 그 소란에 대해 묻지 않고 "고향이 어디세요?"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내와 살았던 시절로 갔다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들과 며느리 이야길 옮겨왔다. 거리에 버려진 부서진 장롱같은 그의 삶을 듣다가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한참 만에 노인이 불쑥 말했다.
"내가 아까 그 아이 엄마(세월호 유가족)들한테 욕한 건 좀 부끄럽지."
-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노인이 보였던 뜻밖의 합리성도 사실은 자기 존재가 주목받은 후에 생긴 내면의 안정감에서 나온 것이다.
- 젊든 늙든 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젠 알 것 같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노인도 그렇고 청년이나 아이들도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 A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건 조언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서적인 내 편이 필요해서다. "부모님이 그랬으면 당연히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A는 그 밤의 분노와 억울함에서 순간적으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 사람은 괜히 집을 나가지 않으며 괜히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물며 괜히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없다.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백가지 이상은 찾아본 이후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 우선적으로 그 마음을 인정한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당신 마음은 옳다고. 다른 말은 모두 그 말 이후에 해야 마땅하다. 그게 제대로 된 순서다. 사람 마음을 대하는 예의이기도하다.
- 청년 고독사를 취재하러 강남을 누빈 기자에 의하면 원룸촌이 밀집한 그곳엔 분명 사람이 있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사람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고 했다. 강북에 청년들이 모여 사는 곳에선 밤이면 술마시고 떠드는 소리 때문에 자잘한 문제들이 많은데 강남의 원룸촌은 놀랄 만큼 조용하다는 것이다. 강남에 사는 한 청년은 "여기서는 떠들면 남한테 폐를 끼친다는 강박관념이 심해서 극도로 조심하게 된다"고 소리 죽여 말했다.
-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그걸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다. 도움은 산소 공급이 필요한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 고급 정장에 계급장이나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 때 나를 주목하고 인정해 준 사람보다 내가 맨몸이었을 때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극진히 보살펴 준 사람은 뼛속에 각인된다.
- 직장생활이든 감옥 생활이든, 부자든 빈자든 모든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나 집중을 받는 경험이 적으니 사람들은 아플 수밖에 없다. 충전기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배터리처럼 내 존재 자체가 계속 방전만 거듭하다 꺼져간다.
- 아이 옆의 어른들은 수건 돌리기 하듯 아이의 고통을 다음 사람에게 순차적으로 넘기고 있었던 셈이다. 상담교사는 부모에게, 부모는 정신과 의사에게 정신과 의사는 약물치료와 다음 만남으로 공을 넘겼다. 이런 행태는 '일상의 외주화'다.
- 사람들은 누군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 여긴다. 아니다. 정반대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심각한 고통을 드러냈을 때 바로 그 마음과 바로 그 상황에 깊이 주목하고 물어봐 준다면 위로와 치유는 이미 시작된다. 무엇을 묻는냐가 아니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이다.
- 식수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정물이라도 마신다. 배탈이 나더라도 그건 나중 일이다. 구정물이라도 못 마시면 배탈 이전에 생존이 어렵다. 내 존재가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있다고 느끼면 자기 존재증명을 위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 심지어는 폭력적 행사도 불사한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끔찍한 말과 행동을 화살처럼 퍼붓던 일베 회원들 몇 명을 붙잡고 보니 고립된 처지의 유약하고 위축된 개인들이었다. 일상에선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허약한 존재들이었다. 경찰도 피해자도 허탈해할 만큼.
-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 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해 줄 말이 별로 필요치 않다.
그때 필요한 건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물어줘야 한다. 무언가 해줘야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 한다.
"지금 네 마음이 어떤거니?"
- 결론부터 말하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힘 중 가장 강력하고 실용적인 힘이 공감이다.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고 정확하다. 공감은 최첨단 의학과 연구를 통해 개발된 그 어떤 항우울제보다 강력하다. 동시에 그런 약물과 다르게 부작용이 전혀 없다. 비유적으로 항우울제의 약물이 극심한 갈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동네 어귀에 살수차가 와서 물을 쏟아놓고 가는 것이라면, 공감은 목이 타는 사람에게 다가와서 나뭇잎 띄운 물 한잔을 직접 건네는 것이다.
- 공감은 내 등꼴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낼 수 없다. 둘 다 늪에 빠진다.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너를 공감하다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도 공감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잇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분명했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당신’이 궁금하다고 ‘그 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공감적 대화의 과녁은 언제나 ‘존재 자체’다.
- 속마음 이야기나 사람 관계의 영역에서는 ‘나 자체, 내 마음’에 맞춰지지 않은 얘기는 결국 공허해진다. 내 마음을 건너 뛰어 내 지식, 내 권위, 내 신념이나 내 주장 등에 의지해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종착역은 아무리 치열할수록 공허함이나 외로움이 커진다.
- 아이에게 칭찬할 때 “와우! 성적이 그렇게 올랐구나. 참 잘했다.”는 식으로 오른 점수에 방점을 찍는 칭찬보다는 “성적이 그렇게 많이 올랐구나! 네가 이번에 정말 노력을 많이 했나 보다. 참 애썼어”라고 한다면 오른 성적보다 아이의 존재 자체에 집중을 한 것이다. 성적이 오르는 상황을 이끌어낸 ‘아이 자체’에 집중을 한 것이다. 외형적 성과나 성취 자체에 대한 과도한 방점은 사람에게 성과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가져오지만 존재 자체에 대한 집중은 안정과 평화를 준다. 부작용이 없다.
- 현재의 감정이 공감 받지 못하면 과거의 상처를 꺼낼 수 없다. 지금 여기의 감정이 공감받지 못하면 그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힘이 생기지 않는다.
- 평소 스마트한 사고와 태도로 인정받던 사람이 이해 불가할 정도로 억지와 비상식을 주장하는 경우, 공감받지 못해 그럴 가능성이 높다.
-“운전면허만 있었다면 트럭을 몰고 경찰청 정문을 들이받고 싶어요. 다 불태우고 나도 죽고 싶어요.” 내가 바로 대꾸했다. “운전 명허가 왜 필요해요. 들이받고 말건데. 면허 없어도 돼요!”
- 그녀의 격한 그 말은 ‘다 부수고 나도 죽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 부수고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지금 내가 억울하고 화가 난다는 말이다. 그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받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사람은 억울함에서 벗어난다.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음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비로소 분노의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만약 그녀가 실제로 부수고 누군가를 해코지했다면 그래도 옳은가. 자해하는 행동을 했다면 그래도 옳은가.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으니 그녀의 파괴적 행동도 옳은가. 아니다. 사람의 감정은 늘 옳지만 그에 따른 행동까지 옳은 건 아니다. 별개다.
- 공감자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마음이 있지만 나도 마음이 있다는 점, 너와 나는 동시에 존중받고 공감 받아야 마땅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힘도 공감적 관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너와 나를 동시에 보호하는 불가피한 선택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 문이 ‘존재 자체’라면 문고리는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이다.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에 정확하게 눈을 포개고 공감할 때 사람의 속마음은 결정적으로 열린다. 공감은 그 문고리를 돌리는 힘이다.
- 사위에 대한 탐탁치 않은 엄마의 감정은 딸이 해결해 줘야 할 과제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은 엄마 자신이 해결해야 할 엄마의 숙제다. 딸의 경계 바깥에서 벌어지는 엄마 영역 안의 엄마 과제다. 엄마가 힘들어하면 경계 바깥에서도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딸인 자신의 책임이거나 딸이 제대로 하지 못한 무엇 때문은 아니다. 그런 경계를 분명히 자각하고 엄마의 몫으로 돌려줘야 엄마의 감정도 딸이 개일할 때보다 더 빠르게 수습된다.
딸이 경계에 대한 인식없이 계속 개입을 하면 엄마도 자신의 불편하고 싫은 감정이 딸 때문이라고 여기게 된다. 자신의 과제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한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엄마의 과제를 엄마에게 돌려줘야 한다.
- 공감은 본래 상호적인 것이고 동시적인 것이다. 지구가 자전을 하느라 공전을 멈추거나 공전을 하느라 힘이 빠져서 자전을 쉬면 자연의 모든 이치가 깨지듯 공감도 마찬가지다. 상호성과 동시성을 잃으면 공감도 없다.
- 트라우마 현장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자원활동가나 사회복지사, 시민운동가 같은 공감자들 중에 심리적으로 탈진(번아웃)하는 사람들이 많다. 탈진의 가장 흔한 이유는 공감 강박이다.
- 상대방은 힘들고 다급해보이는데 내가 피곤하고 심란해서 공감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때도 우선은 자기 보호다.
자기 보호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가 힘들어보인다고 개입하는 것은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다급한 마음에 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둘 다 불행해진다.
- 공감은 모아니면 도가 아니다. 엄마가 담배피우는 거 허용하고 공감해 주었다고 담배까지 사다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담배를 사다주지 않았다고 담배 피우는 것을 허용한 엄마가 아닌 것을 바뀌는 것도 아니다. 두 사안은 별개다. 담배 사는 문제는 아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엄마 자신의 경계를 아이에게 분명히 그어줘야 한다.
- 국가의 국경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경계가 존재한다. 국경 수비대가 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경계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지키는 일이 어렵다. 그 경계를 인지 할 수 있어야만 나도 지키고 상대반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다.
- 경계란 개념은 이상향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너와 나의 관계를 갑과 을로 나눌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갑대 갑이다. 갑과 을 같은 사회적 관계로 너와 나의 관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인지할 수 있어도 갑을 관계를 갑갑의 관계로 바꿀 수 있다.
- "내가 완전히 미친년이에요. 미친년"이라고 꺼이꺼이 우는 그녀에게 내가 그랬다.
"아이가 사라졌는데 아이 엄마가 미치지 않으면 누가 미쳐요. 딸이 없는데도 하루하루 잘 살아가면 그게 엄마예요? 미치면 어때요. 엄마니까 미치는 거지!"
슬픔에 몸도 가누지 못하는 자신을 "미쳤다. 쓰레기 같다"고 몰아붙이고 있는 아이 엄마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맞섰다.
"아름 엄마의 친구가 아이를 잃고 힘들어해도 쓰레기 같다고 할거예요? 미쳤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어요? 남한테도 하지 않을 말을 왜 자기한테 함부로 해요. 자기한테 사과하셔야 해요!"
나는 조금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 순간 나는 피해자인 그녀'의 마음도 몰라주고 질책한 몰인정한 사람인가. 아니다. '미칠 것만 같은 것이 당연한 그 마음'에 미친년이라는 딱지를 붙이던 그녀의 반공감적 시선에 맞섬으로써 그녀의 고통에 무한 공감을 한 것이다. 공감을 방해하는 허들을 치운 것이다. '미친년은 누가 미친년이냐. 잘 지내면 오히려 그게 미친거지.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를 왜 그렇게 나쁘게 말하느냐. 죽을 만큼 아프니까 숨이너머가는거지. 그러면 엎어져 울고불고 할수도 있지. 그걸 왜 나쁘게 보느냐'는 말을 한 셈이다.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판단자의 입장에서 모질게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던 그녀 자신의 공감 허들과 싸운 것이다.
- 성찰이 깊고 스스로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 불안하고 흔들리게 된다. 상황을 더 깊고 입체적으로 보는 과정에서 만나는 불안은 불가피한 것이다.
- 그런 과정을 거치며 심리적 토대는 더 튼실해진다. 이럴 때의 불안은 건강한 불안, 건강한 혼란이다. 입체적 통합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건강한 불안을 외면하면 이 모든 과정이 생략되고 사라진다. 좋은 감정이 항상 좋은 감정이 아니듯 부정적인 감정도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황마다 다르다.
-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공감에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은 더 많이 오해하고 실망하고 그렇게 서로를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서로에 대한 저서적 욕구, 욕망이 더 많아서 그렇다. 옆집 사는 이웃에게는 친절하고 배려심이 있게 대해도 내 배우자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더 어렵다. 남에게는 특별한 기대나 개인적 욕망이 덜해서다. 그러나 내 배우자나 가족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로부터 받고 싶은 나의 개별적 욕구와 욕망이 있다. 그욕구만큼이나 좌절이나 결핍이 쌓인다.
- 서로의 사랑에 대한 욕구를 지겨워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채 기꺼이 공급하며 공급받는 일은,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동력을 마련하는 일이다. 미룰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휘발유나 전기의 도움없이 굴러가는 차는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 수영을 못하는 것이 콤플렉스인 남자가 자기 아이에게 다른 것은 빼먹어도 수영강습을 빼먹으면 불같이 화를 낸다. 아들에게 수영강습을 강요할 게 아니라 수영을 배워야 할 사람은 정작 그 자신이다. 오랫동안 허기진 사람이 자기가 먹어야할 밥을 배부른 옆 사람에게 억지로 먹이는 격이다. 합리적 사고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 자신에 대한 성찰을 건너뛰고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일로 넘어갈 방법은 없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자전거의 왼쪽 페달이라면 자기를 살펴보는 일은 동시에 돌아가는 오른쪽 페달이다. 한쪽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 즉시 자전거는 멈추고 넘어진다. 자기에 대한 성찰이 멈추는 순간 타인에 대한 공감도 바로 멈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기 성찰의 부재는 공감을 방해하는 허들이 된다.
- 예전에는 딸을 결혼시키면 '그 집 귀신이 되라'며 딸의 퇴로를 다 막아버렸던 야만이 횡행했다.
- 퇴로가 막힌 밀봉된 삶속에서 무슨 수로 자유롭고 인간답게 사나.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에게 행했던 협박성 계몽이 부모의 도리나 역할인 줄 알았던 폭력의 시대가 지금은 아니다. 그런 시대는 끝났다. 끝나야 한다.
- 내가 외롭게 살아서 사는 게 힘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외로웠던 시절의 마음이 충분히 공감을 받지 못한다면 부모가 되었을 때 자녀에게 "외롭게 살면 절대 안 돼."라고 강요할 가능성이 높다. 공감을 받지 못하고 넘어간 상처는 일방적 계몽과 충고의 형태로 상대방의 마음에 칼로 꽂히기 쉽다.
-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 주변의 동료들에게 마음이 아닌 판단의 잣대로만 대했던 것이 미안합니다.
- 타인을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공감까지 가는 길 굽이굽이마다 자신을 만나야 하는 숙제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문제를 해결하며 한고비 한고비 넘는 스무 고개 같은 길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랬듯 수 십 년 전에 헤어졌던 혈육을 찾은 것처럼 쪼개졌던 내 심장의 일부를 찾는 뜨거운 설렘과 횡재의 길이기도 하다.
- 성공한 사람이나 재력가가 세상사 모든 일에 뛰어난 판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름지기 성공한 사람이란 이러이러할 것이다는 집단사고가 만연한 것 같다.
- 성공한 사람은 부지런할 것이다, 머리가 좋을 것이다, 합리적일 것이다 등 집단적 제레짐작이 집단 사고다. 모른지기 여자란, 모름지기 장남이란, 모름지기 성직자란, 모름지기 학생이란..........우리 사회의 이런 집단 사고들은 자연의 곡선을 직선으로 밀어버리는 포크레인 같은 심리적 폭력이다.
- 집단 사고에 충실한 삶은 역할놀이 중인 삶이다.
- '고3 엄마들은 거의 다'라고 말하며 고3 엄마라는 집단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덮어버리는 주부, '지잡대 출신이라서'라는 표현으로 자기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규정하는 청년, 자기의 무뚝뚝함을 '공대 출신들은 원래'라며 전공으로 자기를 대체해 버리는 남자, 심지어는 비극적 상처를 입은 국가 폭력 피해자도 자신의 통증을 말하면서 '우리 유가족들은'이라는 표현을 쓴다.
- 그런 표현 속에서 개별적 존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 한류 스타인 정상급 여배우는 엄청난 인기와 막대한 부를 함께 얻었다. 그녀 덕분에 생활 형편이 확 달라진 엄마는 예전처럼 딸에게 잔소리를 못하고 오히려 눈치를 본다. 그녀의 오빠도 여동생의 지원 덕분에 유학 생활 중이라 예전의 그 오빠가 아니다. 스타가 된 그녀는 밖에서 뿐 아니라 자기 집에서도 연예인이다. 가족 안의 그런 미묘한 변화 속에 그녀는 딸도 동생도 아닌 낯선 존재가 되어간다.
-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에게도 연예인이 된다. 자기가 사라진 곳에는 두려움이 자리를 잡는다.
- 꼭 같은 감정을 느껴야만 공감이 아니다.
엄마가 아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정해 주는 느낌을 아들에게 전달할 수 있으면 된다. 그게 공감이다.
- 하지만 내 성격 때문에 내가 그동안 외롭게 살았다. 그래서 나를 닮은 아들을 다그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절반만 동의한다. 그녀가 외롭게 산 것은 예민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예민한 성격을 잘못된 성격, 좋지 못한 특성이라 규정당하고 공감받지 못한 채 위축돼서 살아서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민하면서도 당당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 누군가의 속마음을 듣다 자기를 만나면 버선발로 뛰어나가서 반겨야 한다. 내 지난 세월을 누군가에게 다시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도 동시에 공감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들 얘기를 한다지만 실은 계속 자기 얘기를 하게 된다. 아들 걱정을 한다지만 사실은 지난 시절 자신의 상처와 불안, 회한을 무한 반복하게 된다.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만날 수 없다.
- 누구든 타인을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가 자극돼 떠오르고 뒤섞이면 혼란에 빠진다. 그때의 혼란은 자기 치유와 내면의 성숙을 위한 통과 의례같은 반가운 혼란이다. 어떤 종류이든 혼란은 힘들다. 에너지 소모가 극심해서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혼란은 반가운 손님이다. 꽃 본 듯 반겨야 한다. 그 혼란에 주목하고 집중해야 한다.
- '아팠던 이야기를 다시하는 것은 고통을 다시 떠올리게 해서 당사자를 더 힘들게 하는 일이다'사람들이 흔히 하는 생각이다. 정설로 믿는다. 아니다. 예전에 상처받았을때 그 사실을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몰랐겠지만 엄마에게 거부당해서 얘기를 더 할 수 없었을 뿐이다.
- 상처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파서 못 꺼내는 것이 아니라 꺼낸 고통 위에 소금이 뿌려졌던 경험이 상처를 꺼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이중 삼중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기 전까지 상처를 다시 꺼내기가 어렵다. 심약한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다.
-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심리적 참전'이라 할 만큼 에너지 소모가 필요하다. 당연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덜어내는 일이므로.
- 아이의 고통에 공감하기 위해 그랬다지만 어쨌든 부모가 아이에게 거짓말을 한 것인데, 그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에 대한 찜찜함과 부담감도 클 수 있다. 하지만 공갈 젖꼭지의 존재를 알고 난 후에 엄마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듯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준 엄마의 행동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생길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거의 백퍼센트다.
- "오늘 부장한테 욕을 실컷 먹었는데 오후엔 다시 사장실에 불려가서 또, 에이 참."
그럴때 아내가 "당신처럼 성실한 사람한테 어따 대고 욕이야! 내가 가서 다 박살을 낼거야. 다 나오라고 그래!"라고 한다면 남편의 마음이 어떨까. 아내가 진짜 회사에 쫒아가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순간 자기 편을 들어주는 아내의 존재 때문에 마음 한쪽에서 해빙이 시작된다. 신기하게도 그렇다.
- 헌정 사상 가장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동시에 집요할 정도로 돈에 집착했다고 평가받는 한 전직 대통령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어머니는 실제로 그렇게 사셨다 들었다. 하지만 그 아들인 전직 대통령은 새빨간 거짓말로 온 나라를 속이고 엄청난 뇌물을 수뢰한 혐의로 감옥에 갔다. 계몽은 계몽이고 사람은 사람, 서로 별개였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계몽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