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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다시 오지 않는 것들

 문단의 거목에다 노벨 문학상 후보까지도 거론되던 시인 고은은

최영미 시인에 의해 성추행이 폭로되면서 하루 아침에 추락한다.

최명자 시인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오랜만에 서랍 속 깊이 넣어 두었던 시 한 편을 꺼내 세상에 내보냈다.

그 시가 날아오르자 거대한 피라미드에 금이 가더니 끝내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과 같이

에둘러가지 않는 시인의 시는 여전하다.

 

사교의 테이블에 억지로 앉혀 박수치게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어쩌면 그 사교장의 일인분을 생활보호 대상자인 시인은 돈으로 달라고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이 서툰 시인이, 재판 준비하랴, 병상에 계신 어머니 돌보랴.

대충 사는 것조차 전쟁만큼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는게 피곤해 시도 달아난다.

 

독이 묻은 종이(고소장) 앞에서

싸움을 위해 밥을 먹어야 하니, 사는 게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이 벌레들과의 전쟁하느라 아픈 엄마가 어찌될까 걱정스럽다.

 

그리하여

2019년 새해 소망은 안쓰럽게도 괴물과 싸울 수 있게 노트북이 망가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사랑과 죽음이 같은 승강기에 탄 환자처럼 가까웠다 멀어지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을 어머니를 모신 병원에서 시인은 아보카도 주스로 견딘다.

 

최영미 시인이 이 시집을 출간하려고 간 출판사에서는 난색을 표했단다.

그래서 본인이 출판사를 차려서 출간한 시집.

본인이 생활보호 대상자라는 사실을 본인도 몰랐을 정도로 생활인으로서는 무지했다.

 

 시인은 배가 고프다. 이 시집이 채 한달도 안되어 초판 3쇄를 찍었으니 생활이 조금은 나아졌으려나?

파아란 가을하늘 처럼 내용도 시원 시원하다.

시가 어렵다고 시집을 접하기 꺼려하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읽히는 시집이리라.

 

 

 

 

 

<다시 오지 않는 것들 / 최영미 / 이미출판사>

 

<밑줄긋기>

 

-내 생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며,

정신이 사나워져 시를 잊고 살았다. 길을 가다 번뜩 떠올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 멋진 구절이었는데, 나중에 아까워했지만.....

가슴을 두드렸던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

되살릴 길 없는 시간들을 되살리려는 노력에서 문자 예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괴물 / 최영미 >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 내가 정말 여류 시인이 되었다는 말인가

 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밤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

고, 고급 거시기라도 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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