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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내가 생각하는일반적인 평론가들에 대한 인식은

소설이나 시를 쓰는 작가에 비해 한 단계 낮은 수준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신형철의 이 책을 보고 나서는 그게 얼마나 편협되고 저급한 생각인가하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림을 평론하는 사람은 화가들보다 그림을 못그리는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그림에 대한 수준과 안목은 더 높고, 깊을 수 있고,

문학 평론가는 소설가나 시인에 비해 시나 소설을 더 못 쓸런지는 모르지만,

문학에 대한 안목은 더 높고 깊을 수 있는 것이다.

 

표지 그림 때문에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독일화가 Time Eitel 이 그린 <녹색벽>이란 제목의 그림이다.

우리네 아버지 세대 처럼 고생을 많이 했을 것같은 남자가 약간 등이 굽은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뒷 모습임에도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쪽 무릎을 꿇고 벽을 향해 있다. 책의 제목같은 슬픔이 느껴지는.....

 

아마도 작가는 저런 뒷모습에서도 저 사람의 내면을 느끼는 예민하고 따스한 사람일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다양한 층위의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듯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들춰내어 보여주는 것 아닌가.

 

슬픔과 시에 관하여, 소설,사회, 문화에 관한 작가가 심사숙고하여 농축시킨 생각을 담은 보석같은 산문집이다.

 

 공감이 가는 대목 중 하나는 박정희의 죽음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가 충분히 탈 신화화 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고 그 대신 그를 그 자리에 신화적으로 못 박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부 노년층에게 그 사건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리비도를 부권적 대상으로부터 회수해야만 했지만 그것을 다른 곳에 대투자하지 못하고 제 안에 품게 만든, 그래서 그 에너지로 자신을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맹렬하게 동일시하도록 유도한 사건이다.>

 

 

 

 

 

 

 

-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예컨대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사건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 박완서의 그 어떤 소설을 펼치건 우리는 거기에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문장들이 인간 심리의 진상을 분주하게 실어나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에게는 청첩장을 건네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 별안간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

 

단편 <그남자네 집>의 한 대목이다. 그리고 선생은 정확히 네 문장을 더 적는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가 이 네 문장과 더불어, 언젠가는 졸업해야 하는 학교가 되면서, 소설에서 퇴장하고 만다. 대가의 문장이다.

이별을 고하는 자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자기 합리화의 양상을 세 개의 단문과 잔인하리만큼 정확한 비유하나로 장악한다.

비유란 이런 것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해버리는 것이다.

 

- 같은 영화를 봐도 A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어떤 장면을, B는 어색하다며 진저리를 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작품의 객관적 보편적 결함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유형의 관객에게만 감지되는거북함이다.

 

- 어렵고 지루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거나 그것을 칭찬하는 평론가를 볼 때 화가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들로부터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가장 대중친화적인 소설이나 영화라고 칭송되는, 그러니까 쉽고 재밌기만 한 작품을 보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작품들이 나를 포함한 대중을 아무 생각없이 재미 만을 탐닉하는 소비자정도로 얕잡아 보고 있는 것 같아서다.

나는 거기서 지갑을 열어, 그리고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즐겨, 넌 원래 그렇잖아하는 속삭임을 듣는다.

 

-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폭력에 대한 묘사가 읽기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실제 벌어진 일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해서 소설에 쓸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 쓴 것들도나중에 지웠고 겨우 남은 것이 그 정도라 했다.

그는 본래 폭력적인 장면을 쓰는 데 특히 더 애를 먹는 작가다.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소설을 쓸 수 있었으리라.

이것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말을 쉽게 해왔다는 뜻일 수 있다.

 

-말이 있는 세계에 글도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래서나는 육체적으로는 말하기가,정신적으로는 글쓰기가더 편하다.

 

-내게 연재의 간격과 사유의 깊이는 반비례 관계였다.

일주일마다 쓰는 글에는 딱 일주일 생각한 만큼의 깊이가 담기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종류의 글이 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글쓰기의 영역에서도 눈부신 단거리 주자는 있는 법이다.

자주 빨리 쓰는 분들 중에는 내가 한 달을 생각해도 가닿을 수 없는 깊이의 글을 써내는 이들도 있다.

 

- 불쑥 찾아뵈어서 죄송하다는 말은 이제 거의 할 일이 없어졌다.

특별히 불가피한 상황이아니라면 미리 전화를 하지 않고 누군가를 찾아가는 사람은 이제 없는 것 같다.

그 대신 이제 우리는 불쑥 전화드려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럴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문자메시지를 먼저 보내기도 한다.

 

-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가 충분히 탈신화화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고 그 대신 그를 그 자리에신화적으로못 박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부 노년층에게 그 사건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리비도를 부권적 대상으로부터 회수해야만 했지만 그것을 다른 곳에 재투자하지 못하고 제 안에 품게 만든, 그래서 그 에너지로 자신을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맹렬하게 동일시하도록 유도한 사건이다.

이를  '냉전 멜랑콜리'라고 하자. 안타깝게도 그들은 '박정희'와 함께 자신의 일생을 영웅적으로 회상하고,

'박근혜'와 함께 고아처럼 살아온 제 삶의 고독을 재음미한다.

이 강력한 자기 동일성은 자기 자신과읭 영원히 끝나지 않는 대화를 지속하게 한다.

프로이트가 1915년 무렵에 나르시시즘이라는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멜랑콜리 연구를 시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멜랑코리 자체가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박근혜 두 사람은 박정희의 두 가면을 각기 쓰고 권좌에 올랐다.

박정희 신화가 가진 두 얼굴은, 공세적 개발주의자의 얼굴과, 가진 것은 애국심뿐인 고독한 단독자의 얼굴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독재자의 낮과 밤이었다.

그러나 두 전직 대통령이 실제로 행한 것에는 더 정확한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그것을 물신정치공작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물신 정치를 상징하는 사건은 용산참사와 4대강사업이다.

이 물신 정치는 인간생태라는 최상위 가치에대한 몰이해와거부감에 기초한 폭력적 성과주의다.

그 과실은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몫이었을지언정 국민의 것은 아니었다.

박근혜의 공작정치를 상징하는 것을 물론 세월호참사와 불랙리스트다.

세월호 참사는 사실상 죽게 내버려둔’ 결과를 낳았고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내버려두지 않고 죽이는데 있었다.

전자로 육체가 수장됐고 후자로 상상력이 검열됐다.

그들은 전자를 무릅쓰고라도 후자에 몰두하는 것,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좌파를 척결하여냉전 왕국을 부활시키는 것만이 애국이라고 믿은 시대착오적 편집증자들이었다.

 

- 어쩌면 태극기 집회는 정치적 저항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적 축제일지도 모른다.

 

-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 ‘죽은 노무현'을 풍자할 수는 있어도 노무현의 죽음을 풍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무슨 학문의 자유가 아니라 언어로 행하는 시신 훼손일 뿐이다.

 

-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와 싸워 얻어낸 대통령 직선제로 독재자의 딸이 합법적 대통령이 됐다.

이 사태를 두고 참혹한 아이러니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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