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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은교

 나이가 들어서 남성적, 또는 여성적 매력이 없어졌다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데

이성에 대한 욕망은 넘치도록 남아 있다면 어떨까?

쓸쓸함과 서글픔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되고, 지나온 세월이 허망하지 않을까?

 

“아빠~~이 책 정말 대단해요.” 하며 딸내미가 추천한 책 ‘은교’

더구나 ‘연애소설이 예술가 소설로 육박한 사례’라는 이야기를 듣는 소설이라

선뜻 펼쳐 들었다.

 

평생 다른 잡문을 쓰지 않고 오로지 시만 써온 존경받는 노시인이 있다.

이름은 이적요. 나이는 70줄에 들어섰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남아 있지도 않고, 그런 값싼 욕망쯤이야 스스로 절제할 줄 안다고 자부하는 이 노 시인에게

‘은교’라는 여자 아이가 이성으로 다가왔다. 서른일곱 스물일곱도 아닌, 손녀뻘이라 할 열일곱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 노시인의 제자, 피붙이 보다 더 가깝고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제자가 자신의 이성에 대한 라이벌이 될 줄이야.

 

이 노시인(이적요)은 제자의 젊음이 부럽고,

제자(서지우)는 노 시인의 문학적 재능이 부럽다.

제자는 노 시인의 미공개 작품을 훔치기에 이르고

노시인은 제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늙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이적요는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근육들이 빠져나가면서 쭈글쭈글해지기 시작한 몸은 검버섯의 비늘을 군데군데 달고 바야흐로 산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탱탱했던 어깨와 팔은 살이 닳으면서 털레털레해졌고, 가슴은 쭈그러들었고 배는 나와 있었다. 그리고 나의 페니스는,

죽어 부식하기 시작한 해삼처럼 늘어져 있었다. 불과 삼 십여분 전에 머리를 들고 일어섰던 몰염치한 기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불알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 메추리알 같은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힘줄들이 마구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동굴보다 어둡고 시든 풀보다 무력했다.

 

 

일년이 지난 손바닥정원의  마른 장미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노시인의 입장을 두둔하게 되고 마른 장미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는 나 자신도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이리라.

당연히 제자 입장보다는 노시인에게 감정이입 된다.

하지만, 노시인에게 있어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노시인의 열일곱과 어린 은교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과연 그것뿐일까?~~ㅎ

그 벽을 향해 이 노시인 이적요는 끝없이 두드린다. 나이듦에 대한 반항이다.

 

유신시대엔 삼 년이나 차가운 옥방에서 살기도 한 노시인은

그렇게 헌신해 겨우 얻은 것들을 카페 안의 저 젊은 것들이 독점하고,

나를 늙었다고 물 흐린다고 내치고 있다. 희희낙락하는 저들을 보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다.

 

은교와 촛불이 켜진 카페에서 마주 앉아 와인으로 건배를 하면서

저녁 한때를 보내고 싶은 꿈이 그렇게 용서받을 수 없는 꿈이던가.

감미로운 발라드 음악이 들려오는 카페에서 그 애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면서,

낮에 있었던 일이며, 앞날의 희망이며, 그리운 사랑에 대해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는 꿈이

혁명보다 더 불온한 꿈이던가.

다 발라먹고 버린 탁자 위의 돼지 뼈들이 늙은 자신의 꿈처럼 느끼기도 한다.

 

열일곱 어린 여자애를 향해 가는 아침은 그리하여 혁명보다 더 환한, 아침이다.

 

 

 반면

어린 은교를 쳐다보는 늙은 스승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한 제자는

스승에게서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그럴수록 은교를 향한 열망이 더 격렬해지는 묘한 심리를 느낀다.

그래서 은교는 내 것이에요. 라고 저 스승에게 소리쳐 외치고 싶다.

당신은 너무 늙었잖아요. 라고도, ‘당신이 은교에게 뭘 줄 수 있어요, 라고도,

혼자이고, 당신보다 한참 젊은 내가 왜 당신 때문에 은교를 잃어야 하는가.

당신은 그 애와 함께 갈 길이 전혀 없다. 그애도 잠시나마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제발 거울 앞에 서서 보라. 늙고 병든 당신을... 황혼녘 시간의 벼랑길을 브레이크 없이 쓸려 내려가는 당신을,

아, 어째서 선생님은 자신을 보지 못할까. 이것은 노망이다.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 미친 질주를 막아야한다. 막지 못하면 끝내 내가 선생님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스승이 제자를 죽일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다.

 

제자는 스승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

제자의 죽음은 자의반 타의반이다. 죽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눈물 속에 그는, 스승의 의도대로 죽음을 택한다.

제자를 죽인 스승도 마침내 그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최후를 맞이한다.

 

시인은 자신이 죽은 일 년 뒤에

자신의 노트를 변호사를 통해 공개하도록 유언을 남긴다.

그 속에는 은교와의 있었던 모든 일,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를 자신이 살해했다는 자백등 모든 이야기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스승과 제자는 죽고 은교만 남았다.

 

 

 마침내 노시인이 죽은지 일 년이 지났다.

변호사는 고민에 빠진다. 과연 시인의 유언을 받아들여야 할까?

노트를 공개하였을 때 일어날 엄청난 파장을 어찌 한단 말인가?

더구나 존경하는 시인의 일 주기를 맞아 기념관이 건립되는 시기에 말이다.

예민한 기자들은 변호사 주변을 맴돌고,

은교는 시인의 노트가 공개되고 난 후의 자신에게 닥칠 일이 걱정이다.

제자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은교. 스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변호사.

결말은? 앞으로 책을 보실 분들을 위해 여기까지만.

 

이제 나도 나이가 들아가면서 추레하게 욕망만 남은 모습으로 살기는 싫은데,

떨쳐내려 애써도 떨어지지 않을 욕망들을 어찌 감당하면서 살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고 나서 생각 난  전혀 다른 이미지의 두 사람.

한사람은 시인 신달자.

어느 여름날 아침. 시인이 자신도 몰랐던 내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수필이 생각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몇 년 전 자신의 배에 탄 여행객을 성추행 하려다 바다에 빠뜨려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보성어부 연쇄살인사건’의 70대 어부.

 

이 한마디.

여성에게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 이런 저런 생각해 본 것들

 

-감정이입

- 박범신(46년생) 최인호(45년생) 이외수(46년생) 이문열(48년생) 조선작(40년생) 조정래(43년생)

화려한 40년대생 작가들과 신문연재 소설

- 최근 박범신의 소설 : 소소한 풍경

- 70대 보성 어부 - 신달자 - 김수영 시인의 자기 고백

-영화 이끼(박해일)

- 우리나라 남성화장품 시장 세계 1

- 중년남성이 개인의 욕망을 표출하는 시대(40)

 

 

                                                                                                                             <은교/박범신 지음/2010년 문학동네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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