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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바오밥나무-한택식물원>

 #. 아주 오래전에 신달자의 사진을 보고

 아무런 걱정없이 곱게 자란 부잣집 맏며느리같은 인상을 받았고, 손에 물도 별로 묻히지 않고 살았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남편의 병수발을 하며 고생한 것과 문단에서 곱지않은 눈으로 보았던 시인이란 이름. 잔잔하게 내밀한 이야기까지 풀어놓는다.

 딸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이야기하는 글이 진솔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인간에게도

생애 단 한 번은 완전한 주목을 받으며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숨을 거둔 내 남편은 하나의 인간에서 하나의물체로 변하고말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혼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무겁고 은밀한 생의 깊은 비밀이고 상처이므로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을 꺼내면 모두 그래그래 하면서 정말 하지 못할 말들은 꼭꼭 숨긴 채 말해도 될 것들만 하는 것이지.

아니 말해도 될 것들을 하기보다 남들과 비슷한 것들만 골라서 말하게 되는 것이지.

 

-.희수야 다시 말하지만 인생이란 너무 눈부시게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내용이 들어 있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시간은 재촉할 필요가 없는 말 잘 듣는 아이같이 시키지 않아도 명령하지 않아도 제 속도로 잘 가는 것이다.

행복한 시간도 흘러간다. 이 세상엔 영원히 머무는 것은 없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모든 것이 다 사라져 가고 있는 것 아니냐.

 

-.언젠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거의 90%가 물가에 있었다는 고백을 다룬 책을 본 적이 있거든.

 

-신달자 남편 심현성 시상하부과오종환자

 

-나는 세상에 관심이 없었고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 친구들은 스웨터에 봉투를 찔러 넣어주면서

‘너 혼자만 봐.’라고 말했다. 그 봉투에는 ‘축 사망’이라고 적혀 있었다.

 

-백치애인 뿐만이 아니었다.

후속으로 내놓은 ‘물위를 걷는 여자’는 10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모든 경제적 부채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남편에게 자동차와 운전기사까지 선물했다.

 

-한번은 새벽에 산책을 나갔다.

이른 새벽인데 농부들이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

팔을 걷어붙이고 허벅지를 다 내놓고 일을 하고 있는 그 농부들을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나한테는 없다고 믿었던 까마득하게 지나간 그 욕망이 물컹하게 가슴에서 만져지는 거야. 그때 나는 쉰이었다.

어릴 적에는 쉰은 성욕과 전혀 무관한 나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나에게 놀랐다. 남자라면 누구든 상대가 될 수 있다는 비릿한 생각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까마득하게 죽어 누웠던 여성성이 살아나는 놀라운 변화에 나는 두 손을 떨면서 서 있었다. 그런 여자가 거기 있었다. 몸이 말하는 여자,몸이 외치는 절규를 나는 거기서 경험했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의 한토막인 내 가당찮은 감정이 잊혀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놀라워 그러나 그것도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감정이었을 거야.

근데 그 마음을 누구에겐가 들키지나 않을까 나는 조바심을 했다. 무슨 큰 죄라도 짓는 것 같은 두려움이 날 붙잡고 있었다.

그 시절 참 잘 보냈지. 어떤 생각이든 키우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도 알았어. 곧 그런 감정은 내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 속으로 묻혀 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중요한 감정이라는 것을 나는 알아. 살아 있는 증거이며 내가 다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불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느님도 이 생각만은 용서하셨을 것이다. 여자는 때때로 한순간의 열락에 생을 던지는 수도 있다. 어리석은 것이지만 인간적인 그런 감정....

이제 다 흘러갔다.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신달자/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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