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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일본 히로시마) 아버지와 히로시마

 벤치에 앉아 잠깐 쉬는데 휴대폰을 한참 동안 들여다 보고 있길래 뭐보고 있느냐고 하니 김장 배추 주문한단다.

주부는.... 여행 중에도 열일한다. 

"마누라 잘 만난 줄 알아~~ㅋㅋㅋ" 이러면서 웃는다. 

 

종종 내가 어이없는 실수를 하면 농반진반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잘 못 키웠어...." 

"그래~ 맞아.... 지금은 마누라가 날 잘못 키우고 있는 중이야~ㅋㅋ"

딸도 가끔 내 어설픈 행동에 "모두 다 엄마가 아빠를 잘못키워서 그런거야~ㅋㅋㅋ" 하며 놀린다.

 

그럼 난 쿨하게 인정을 한다.

어려서는 부모님이, 결혼 전에는 누이들이, 결혼 후에는 아내가.....날 잘못키운 것이라고....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치기도 많이 했다.

그러자 부모님들은 나를 무엇이든 못하게 하셨다.

일종에 손발이 묶인 채 살았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가는 소풍이나 수학여행 이외에 어딜 가서도 안되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약속을 했다가 내가 참석 못하는 바람에 친구 사이가 어색해진 경우도 많았다.

나는 어디든 가서는 안되는 아이였고, 특히 아버지는 절대 보내지 않으셨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나는 고분고분 말을 듣는 아이였다.

그런 영향인지 아직도 혼자 무슨 일을 하려면 주저하고 뜸을 들이며 걱정부터 앞선다.

 

아버지는 징용으로 히로시마에 끌려가셨던 분이시다.

히로시마는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하도 "내가 광도현에 있을 때"란 말을 많이 하셔서 익숙한데

바로 히로시마의 한자말이'광도' 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거나 녹음을 해둘껄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히로시마에서 가장 먼저 원폭돔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아직 이런 공중 전화부스가~~

 

 

 

 

한참을 걸어 도착한 히로시마 원폭돔........정치인 김종필씨가 서거했을 때,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몸이 좋지 않으시자 푸념처럼

아 ~ 내 나이 또래의 JP는

골프도 치고 저리도 건강한데

난 이게 뭐냐...... 하시던 아버지.

 

2차 대전때 히로시마에 계시다가

원폭이 떨어지던 바로 그날.

배가 아프셔서 지하에 계시다

기적처럼 살아나셔서

 

그 끔찍한 현장을 보시곤

작은 배를 타고 보름 동안에 걸쳐 현해탄을 건너신 아버지.

그때 함께 탈출하셨던 분을 몹시 찾으시더니......

 

한일협정인가

김종필 오히라 외상 메모인가

이야기를 듣고는 분노하시기도 하고

 

해방이 되어서

북한 인민군에 나오라고 해서

버티다 버티다

함흥인가 원주인가로 끌려가셔서

지하 감옥에서 고생 고생하시다가

다시 평양으로 끌려와서도

‘나 추수하러 고향가야 한다’고 버티다

반동분자로 찍혀서 죽음 직전 도망치기도 했고

 

그리하여 6.25때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시다 삼남매를

홍역과 병으로

가슴에 묻으시고

 

서울에 정착해서 위로 딸 둘을 낳고

마침내 바라던 아들을 낳으시더니

그 아들을 어디도 함부로 내 보내지 않으려했고

나는 무척 벗어나려고 애썼고

지금에야 후회되는 일 많지만

오늘 별세한 김종필보다 18년 먼저 떠나셨다.

 

떠나시기 전 1년 동안  걷지도 못하셨고

지금은 비무장 지대 안의

농사짓던 땅을 바라보고

누워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