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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작가 박완서가 미워했던 나무

겨우내 갈색 잎을 달고 있던 낙우송도 아직 그 누더기를 벗지 못하고 있다.

참 딱한 나무다. 나는 그 나무를 누더기 나무라 불렀었다. 침엽수인데 상록수는 아니어서

가을에는 아주 짙은 갈색으로 잎이 변하건만 낙엽지지 않고 그냥 달고 있다.

그게 마치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누추해 보여서 그렇게 부르며 좀 미워했었다.

 

 겨울나무가 봄이나 여름 가을 나무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걸 안 것은 나이 든 후였다.

겨울에 길 가다가도 문득 가로수를 쳐다보면 그 섬세한 가지 끝까지 낱낱이 드러난 벌거벗은 모습에서

감동에 가까운 기쁨을 느끼곤 했었다. 어떤 나무든지 잎이나 꽃을 완전히 떨군 후에도 오히려 더 조화롭고

힘차 보이는 게 그렇게 신기해 보일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누더기 나무라 부른 나무는 겨울에 청청할 수 있을 기개도 없으면서 한 번쯤은 자기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낼 자신도 없는 게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렇게 나쁜 별명을 붙여주었는지 모르겠다.

 

 그 누더기 나무가 낙우송이라는 걸 안 것은 우리집에 온 손님을 통해서였다.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던 손님이

그 나무를 바라보며 "어머 저기 낙우송이 있네"라고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말했다.

그가 덧붙이는 말로는 잎이 질 때 깃털처럼 가볍고 아름답게 떨구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누더기 나무가 낙우송이 된 후에 난 비로소 그 나무를 애정을 가지고 주목해보기 시작했다.

 

그 나무는 가을에 갈색으로 단풍든 잎을 겨우내 달고 있다가 봄에, 이른 봄도 아니고,

봄이 무르익어 제 몸에서 새 잎이 걷잡을 수없이 솟아올라야 할 수 없이 잎을 떨군다.

딴 나무에서는 꽃을 떨굴 때, 그는 비로소 지난해의 누더기를 벗는다. 그러니까 상록수도 아닌 주제에

일 년 내내 거의 한 번도 자신의 맨몸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수줍은 나무다.

 

잎을 떨구는 모습도 정말로 깃털처럼 섬세하고 가볍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이름을 안다는 게 친교의 시작이듯이 나무도 이름을 알고부터 이렇게 달라보였다.

 

<노란집 / 박완서 / 열림원>

 

 

 

 

낙우송은 이렇게 뿌리의 일부를 땅 밖으로 내놓고 숨을 쉬는 독특한 나무이기도 하다.

나무를 키우는 일을 하는 매형이 알려 주셨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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