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밑줄긋기

삶에서 가장 어둡고 괴로운 시기

- 모든 것이 없는 아이, 가난쟁이, 떠돌이가 다 말과 글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독학의 끝장이 반드시 한 작가 지망생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그런 내 성장 환경이 이 오늘에 중요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이 쓸쓸하고 하염없는 쓰기를 내 일생의 일거리로 정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 대학교 졸업장은 그를 정신과 배움의 사람으로 결정지어 주는 마지막 증명서이며, 그의 삶에 풍요와 합법을 동시에 보장하는 부적이었다. 

 

- 반성이나 참회 같은 과거 지향적 감정에 무딘 것은 영희가 가진 성격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였다. 과거에 짓눌리는 법이 없고 그 상처로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런 영희의 특성은 삶에 여러가지로 유리했다. 그녀의 전반생은 남이 보기에도 불행하고 가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그렇게 괴롭지 않았으리란 추측을 하게 하는 어떤 대범함 같은 게 그랬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대범함은 또한 미래에 대한 맹목으로 이어짐으로써 그녀의 삶에 치명적인 불리도 입힌다. 뒷날 진창과도 같은 삶에서 벗어나면서 그녀도 미래에 대해 조금씩 준비할 줄 알게 되었지만, 그 미래는 사실 현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 나도 자유당이 옳고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아. 솔직히 말해 해 처먹어도 더럽게 해처먹고 있지. 그러나 이제는 모두 그럭저럭 배에 기름들이 차가. 어지간히 배가 부르면 정치의 모양새도 생각하겠지. 기특하게 역사와 민족까지 떠올려 줄지 몰라. 그런데 민주당으로 갈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 사람들은 여러 해 굶주리고 허기진 사람들이야. 나라를 차지하고 들어앉으면 한동안 허겁지겁 처넣는 데 정신없을 거라고. 지금 자유당처럼 체면 차리고 옆 돌아볼 만큼 배가 부르려면 다시 10년이 더 필요하단 말이야, 알아? 내가 자유당을 민건 그래서야.

 

-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너의 논리나 태도가 이 추악한 자유당 정권의 유지를 도와주고 있다면 너무 끔찍하지 않아?

나의 그런 견해가 내 개인적인 가족사에 불필요하게 얽매인 결과이며, 지금은 더욱이 내가 애써 확보한 삶에서의 유리한 위치 때문에 다분히 자기방어적인 데가 있음도 솔직하게 고백한다. 

 

- 어쨌든 권력의 특징은 합법적인 폭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야....군대와 경찰같은....

 

-거리의 사태가 변혁에 대한 기대나 들뜸보다는 파국이나 위기의 예감으로 명훈에게 와 닿게 된 것은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그 변혁에 대한 지분이 없다는 야릇한 소외감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내 삶에서 가장 어둡고 괴로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내가 살고 있던 곳은 그 역사의 태풍 진로에서 약간 비켜선 작은 읍이었다. 거기다가 무슨 천형처럼 어릴 적부터 강요된 정치적 무관심은 가능했던 기억과 이해조차 가로막아 버렸다.

<변경3 / 이문열 / 민음사>

 

 

그림자처럼 살아야 했던...... 빨갱이로 몰린 자의 가족들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