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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누릴 존재에 대한 갈망

- 나는 또 가끔씩 우리를 도회로만 떠돌게 한 어머니의 피해망상에 대해서도 의심이가. 어머니는 언제나 연좌제와 경찰을 들먹였지만, 어쩌면 어머니가 더 무서워한 것은 바로 이 오늘과 같은 형태의 살이였는지도 몰라. 그때 그대로 여기 눌러앉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국민학교 졸업을 최종 학력으로 하는 농군으로 자라고 어머니도 별수 없는 농촌 아낙으로 늙어 가야 했겠지. 언덕 위 천석꾼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가마를 타고 시집온 만석꾼의 딸로서는 그게 남 안 보는 도회에서 동냥질하는 것보다 더 겁났을지도 몰라.

 

- 한 집안이 망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헌번 망한 집안이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지.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 있어. 대를 이어 누려 온 기쁨과 안락만큼의 땀과 눈물, 그런데 우리가 도회에서 쏟은 것은 진정한 땀과 눈물이 아니었어......

 

- 인철은 차츰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게 되었다. 해결되었다기보다는 잠시 미뤄 두었던 자신의 문제가 고의적인 둔감과 방심의 벽을 뚫고 인철의 의식을 건드려 오기 시작한 탓이었다.

 

- 학교 진학이 늦어진데다가 인철을 한층 더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공부 그자체였다. 개간에 매달려 있었던 그 여섯 달도 책 읽기만은 게을리하지 않은 그였으나, 오히려 그런 마구잡이 책 읽기는 철이 다시 시작하려는 학과 공부에 예상치 못한 걸림돌이 되었다. 그전부터 은연 중에 길러 왔고 그래서 달로 완연히 몸에 밴, 몽롱하여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들큰한 포만감을 주는 그 잡학 취향은 범위와 방향을 가지고 구체적인 지식들을 정확하게 이해햐 하는 정규 학과 공부에 이전과 같은 집중을 허용하지 않았다.

 

- 그날 갑작스레 대면한 설경의 아름다움이 준 충격과 도취에서 깨어난 인철이 다음으로 느낀 것은 바로 그 함께 누릴 존재에 대한 갈망이었다. 누군가 말하였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거기 있다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함께 대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모르겠어.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뭔가 제가 가진 걸 팔아서 사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은 힘을 팔고, 어떤 사람은 지식을 팔고, 어떤 사람은 목소리를 팔고....그럼 왜 몸을 파는 것은 안 되는 거야?

 

- 그녀가 말한 것이 노동이라 할 수 있더라도, 그 노동에 의해 팔려나가는 것이 단순히 시간과 에너지가 아니라 인격과 밀접하게 연관된 귀중한 그 무엇이라는 것, 더구나 그 무엇은 휴식으로 회복되지도 않고 영양의 보충이나 약물로 치유되지도 않는 것이며, 일반의 노동과는 달리 상품화의 기한도 몹시 짧다는 것 그 한시성 때문에 종종 교환가치는 다른 어떤 노동보다 극대화되지만 또한 그로 인해 그 주체가 입는 영육의 감가상각은 그만큼이나 더 급속하고 처참하다는 것....

 

- 호되게 때려 쫓은 강아지가 비명이 채 멎기도 전에 되돌아와 꼬리를 흔들 때와 같은 역겨움과 안쓰러움이 한꺼번에 일어 잠시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하던 영희가 

 

- 초기의 고속버스 안내양이 오늘날 항공사 스튜어디스보다 더 사회적 대우를 받았던 것처럼 이제 막 대중화되기 시작한 비어홀의 여급도 그 문화의 생소함 때문에 오늘날의 고급 요정이나 룸살롱의 호스티스보다는 더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변경6 / 이문열 / 민음사>

 

혼자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산비둘기는 함께 누릴 존재를 찾고 있을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