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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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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이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에는 가장 잘 나가던 소설가인 이문열의 책인데다가

시대상황을 어느 정도 아는 지라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워낙 오래전 읽었던 터라 기억이 나질 않는데

첫 출간 당시 거대한 시대의 벽화를 그려 보이겠노라는 야심찬 작가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잊힌 기억을 되살리며 다시 읽어본다.

 

자랑스럽던 혁명가인 아버지는 초라한 도망자가 되고 그의 가족들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리하여 어린 자식들에겐 혁명가란, 죄악이나 저주의 뜻과 같은 것으로 읽혀지던 그런 시대였다.

 

5,60년 대의 우리나라는 보편적 빈곤의 시대라, 우리 나라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어렵고 곤궁한 삶을 살던 시대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먹고 사는데 급급한 어려운 시대임은 말할나위 없지만, 주인공의 가족은 

좌익으로 활동하던 아버지가 월북하고 엄마와 남은 아이들은 감시를 받으며 생활을 한다.

빨갱이의 자식들이니 보편적인 시대의 고통에다가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해져 힘든 삶의 여정을 이어간다.

 

안동 뒷골목을 벗어난 명훈은 서울로 올라와 여동생 영희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아버지 친구인 상건이 아저씨의 소개로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로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영희는 치과 병원에서 일을 갖게 되고,

한편 작가 이문열을 연상케하는 명훈의 동생 인철이는 밀양에서 지내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작가 이문열이 1948년생이니 그가 직접겪은 전후의 암울한 시대상황이 잘 그러져 있다.

 

명훈의 시점, 영희의 시점, 그리고 인철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는 직접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내 어린 시절 동네에서 상이군인을 많이 보았던 기억도 나고, 그들의 울분과 과격한 행동도 뇌리에 박혀 있다.

그만큼 전쟁의 상처는 우리 곳곳에서 발견되곤 했던 시절이었다.

 

 

 

- 처음부터 기필한 것은 아니지만 꼭 12년 만에 <변경>12권을 다시 출간한다. <변경> 절판을 결정한 그해 봄의 분개와 격앙이 이제는 울적함으로 떠오른다. 도와주러 올 이 없는 외딴 참호에 홀로 남아 자발없는 디지털 포퓰리즘의 첨병들과 가망없는 진지전을 별여야 했던 그 우울하고 참담했던 봄날.

 

- 분단된 남과 북은 각기 아메리카와 소비에트 두 제국의 가장 끄트머리 변경이 되어 두 제국의 이념적 우위를 선전하는,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전시장으로 기능했다.

 

- 옥경이보다 겨우 두 살위지만 조숙한 그에게는 이미 삶이 몽롱한 꿈은 아니었다. 나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깜박깜박 잊어버리기는 해도, 삶이란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고 편안함보다는 수고로움이 더 자주 요구되는, 어둡고 혹독한 그 무엇이라는 게 벌써 오래번 부터의 짐작이었다.

 

- 낯선 사람에 대한 철의 단련된 경계심을 한꺼번에 허물어 버리려는 듯한 공세였다. 먼저 철의 굶주린 위가 손을 들고, 이어 파들거리던 자존심도 저항을 멈추었다. 그러나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듯한 풀빵 맛에 취한 것도 잠시, 이번에는 그 뜻밖의 행운이 더럭 겁이 났다.

 

- 간혹 어머니의 흐느낌 섞인 기도 속에 아버지로 추정되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지만 그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고, 그때만 해도 어머니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는 두려움과 원망과 한이 서로서로를 부추겨 가며 혼합된, 입에 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어떤 추상일 뿐이었다. 

 

- 무슨 부끄러운 짓을 하다 들킨 것 같은 낭패감과 까닭 모를 멋쩍음이 뒤얽혀 변형된 감정이었다.

 

- 만날 수 있는 날은 어김없이 만난다 해도 일주일에 한두 번꼴이다.보니 , 드디어 글이 동원되고, 글이 동원되다보니 감정의 과장이 끼어들고, 감정의 과장이 한번 시작되자 걷잡을 수 없는 상승작용이 일어나 그때껏 애매한 구석이 많았던 그들의 연애감정을 급속하게 진전시켰다.

 

- 슬쩍 넘겨짚기를 시작하려는 영희의 말허리를 형배가 갑작스러운 서두름으로 잘라버렸다.

 

- 혁명. 이제는 아득한 꿈결처럼만 느껴지는 10년 세월 저쪽. 아버지와 함께 집 안에 있던 그 시절에는 무슨 화려하고 빛나는 꽃처럼 그의 어린 의식 속에서 피어나던 말이었다. 그런 또한 아버지가 떠나 버리고 난 뒤의 10년은 무슨 음험하면서도 끔찍한 저주처럼 들리던 말이기도 했다. <변경/이문열/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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