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해 완만하게 속도를 떨어뜨리다 이윽고 조용히 멈추는 과정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 가공이 다 된 재료를 조립하기만 하면 되는, 끌도 대패도 톱도 거의 필요하지 않는 집, 즉 숙련공의 솜씨가 전제되지 않는 공산품으로서의 집이 잇달아 시공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었다.
- 여름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여닫이가 나쁜 문짝같던 내 행동거지가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같이 느껴졌다.
- 세상 물정과는 거리가 먼, 격리된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채 예술지상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라이트 아래 오로지 건축만 다루다 보니, 전쟁터에 가서 얼굴도 모르는 적과 싸운다는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 잘된 집은 말이야. 우리가 설명할 때 했던 말을 고객이 기억했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지. 우리 건축가들의 말이 어느 틈엔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성공인거지.
- 진입로에서 로비,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에는 심리적 벽이 없었고, 고양이 배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선생님의 건축이 늘 그렇듯이 무언으로 사람을 받아들이는 친근한 공기가 떠돌았다.
- 후나야마는 선생님과 같은 미술대학 삼 년 후배이다.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도로공사와 빌딩공사가 급피치로 진행되고 온 도쿄에 먼지가 피어오를 때쯤부터 후나야마는 늘 각광을 받았다. 잇달아 경합을 따내고, 누구나가 우러러볼 기념비적 건축물을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지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후나야마처럼 솟구치고 우뚝 선 건축을 만든 일이 없다. 기념비가 될 외관은 일부러 피하고 거리에 섞여 눈에 안 띄는 형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리라.
- 애당초 신앙의 소리는 조용하게 얘기되었을 거야. 원시 기독교 시대에도 억압된 신도들은 동굴 속 교회에서 속삭이듯이 애기를 나눴겠지? 그런데 기독교가 공인되고 교회가 커지면서 바깥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어졌어. 목회자의 목소리도 낭낭해지고, 교회 건축도 점점 장엄해지고, 피이프 오르간도 성대하게 울리게 되었지. 현대건축, 특히 고층 빌딩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마리코의 말에는 막힘이 없다. 그래서 어색할 틈도 없다. 그것이 나로서는 구원이었다. 마리코는 자기 말을 뒤에 남겨두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 대사를 잊이버린 신인 배우를 보듯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 비밀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마리코의 별장에 들른 걸 사무소 사람들에게 말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 취급 설명서 따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우위라고
- 국립현대도서관을 어디에서 수주하게 될지 모르지만, 실현되지 못하더라도 플랜은 남겠지. 낙찰받지 못하더라도 젊은 건축가들이 이쪽이 더 좋았을거라고 생각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싶네. 건축가가 죽은 뒤에 완성되는 건물도 있으니까 밀이지.
- 구겐하임 미술관은 선생님이 사사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죽고 반년 뒤인 1959년에 준공되었다.
- 건축가에게 집을 설계하게 하는 일은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있는 사람들의 도락에 지나지 않았어. 가난한 건축가에 대한 시주라는 뉘앙스가 가미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
- 선생님이 라이트 제자였다는 게 조금 이상해. 라이트는 자기 건축의 선생은 자연이라고 했잖아. 즉 자기한테는 존경할 만한 건축가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거니까 오만불손하다면 그만한 사람도 없지 않겠어?
-집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설계할 때 불이 잘 나지 않을 집, 지진에 무너지지 않을 집, 그런 것에 가능한 한 신경쓰지. 그것이 건축가에게는 중요하거든. 그렇지만 말이야, 만일에 도쿄 전체가 전부 불타버리는 대지진이 일어났을때 내 집만 타지않고 무너지지않는 건 좀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아.
- 눈앞의 과제를 하나하나 현실적으로 조립해나가는 가사이씨의 솜씨는 정말 훌륭했다. 쓸데없이 각을 세우지 않고, 밀면 들어가고, 잡아당기면 늘어나는 탄력성이 있었다. 때문에 상대방도 가까이 다가온다. 이구치 씨 말고 또 한사람, 이렇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사무소에 큰 안도감을 준다.
- 이 오리저널 디자인들은 아스플룬드의 신경질적인 집착이라기보다 디자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기쁨으로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명도, 가구도, 예전의 건축가에게는 맨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는 즐거운 마감같은 게 아닐었을까? 골격이 아니라 살갗이고 윗도리 안감이고, 요리를 완성하는 디저트같은 것,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들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귀찮기 때문에 연구할 여지가 있다. 아스플룬드나 라이트 시절에 건축가가 마지막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의 촉감과 기억이 선생님한테 계승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 삐걱삐걱 하는 정도는 예배할 때 적당한 BGM이 아닐까? 예전에는 만원 전철이 크게 커브를 돌면 가죽 손잡이가 일제히 끽끽거렸지. 그런 소리는 나쁘지 않거든.
- 노미야 하루에의 설명에는 군더더기가 없었지만 생략도 없었다.
- 피에로 델라프란체스카는 수학자이기도 하고 건축가이기도 했어요. 건축가는 이 사람처럼 냉철하지 않으면 안돼요. 돌과 나무를 삼차원으로 조립할 때 정서나 감상으로 임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일본인은 냉철함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이라서 그 탓에 오히려 깊은 상처를 입은 겁니다.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던 전쟁을 그렇게까지 본토가 공습을 당하고도 계속한 것은 냉철함을 멀리했기 때문에 저지른 실책입니다.
- 울타리 중간에 한숨 돌리듯이 문이 나 있었다.
- 잘 익은 복숭아가 입안에서 녹듯이 뭉개지면서 말랐던 목이 주르르 축축해진다.
- 암흑은 집밖에 머물러 있었다. 집은 옛날부터 이렇게 어둠의 압력에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존재했을 것이다.
-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주절주절 말할 때와 멍하니 혼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 쓰고 혼자 있을 때, 여러가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니까, 방도 거기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는 게 좋다, 고.
- 한편 아이들은 부모처럼 퇴색한 세상을 벗어나, 새롭고 선명한 세상을 좇게 되었다. 아오쿠리 마을도 그렇게 해서 점차 활기를 잃어갔다.
- "동굴이나 벼랑아래 살던 원시인과 움막집을 만든 조몬인은 마음의 존재양식이 달랐군요."
"아마도, 비를 맞거나, 태양에 이글이글 타거나 , 강한 바람을 맞으면 그것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찼지. 그러나 움막이라면 아주 잠시라도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불을 멍하니 보는 여백같은 시간이 있었을 거야. 인간에게 마음이 싹튼 것은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집 안에 계속 있으면 점차 견딜수가 없어져서 밖에 나가고 싶고, 자연 속을 걷고 싶고, 나무나 꽃을 보고 싶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원하게 되지. 인간의 내면같은 것은 나중에 생긴 것으로 아직 그다지 단단한 건축물은 아니라는 증거일거야. 집안에서만 계속 살 수 잇을 만큼 인간의 내면은 튼튼하지 못해. 마음을 좌우하는 걸 자기 내부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찾고 싶다. 내맡기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 '선생님은 왜 저를 입사시키셨나요' 가슴 속에서 물었지만 말이 되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왜 마리코와 저를 결혼시키려고 생각하신 겁니까..
- 목욕탕에서 선생님의 등을 밀어드리는 자신을 상상해보았지만 그런 재치도 배짱도 나한테는 없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저 / 김춘미 역 / 비채>
'밑줄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흙먼지 같은 일생 (0) | 2021.11.03 |
---|---|
아직도 가야 할 길 (0) | 2021.10.22 |
무인정산기는 질문을 하지않는다 (0) | 2021.10.04 |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들 (0) | 2021.09.24 |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오후 (0) | 2021.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