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밑줄긋기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오후

- 인생은 길지 않다. 과거에 쓴 책을 보면 더욱 그렇다. 

쓸 때의 느낌은 아직 생생한데 판권면을 들춰보면 그게 벌써 십년 전이고 십오 년 전이다.

그런 책들은 마치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로 보내온 메시지 같다.

 

- 나이 미흔에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국립 예술대학의 교수였고 네 권의 장편소설과 세 권의 단편소설집을 낸 소설가였고 라디오 문화프로그램의 진행자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서울에 내 이름으로 등기된 아파트가 있었고 권위 있는 문학상들을 받았고 서점의 좋은 자리엔 내 책들이 어깨를 맞댄 채 사이좋게 놓여 있었다. 소설들은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팔려나가는 편이었고 개중에 어떤 것은 영화나 연극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또 몇 권의 소설은 해외에서도 출판되었다. 그리고 그 무렵, 한 일간신문으로부터 연재소설 제의도 받았다. 좋아요, 합시다. 하죠, 뭐.

 한마디로 부족한 게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내 삶은 실로 숨막히는 것이었다. 아침이면 허둥지둥 일어나 차를 몰고 학교로 갔다. 제법 좋은 차였지만 늘 막히는 내부순환로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거기선 모든 차가 평등했다. 날마다 좁고 어두운 터널 속에 갇힌채, 서서히 싹을 틔우며 자라나는 폐소공포와 싸워야 했다. 북한산 자락을 뚫고 서울의 서부와 북부를 잇는 그 터널에선 언젠가 실제로 화재가 발생해 차들이 갇혀 있기도 했다.

 한 시간 가까이 차를 몰아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준비를 했다. 예술학교의 영민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나는 선생으로서는 별 재능이 없는 편이다. 선생에게는 지식외에도 많은 것이 요구된다. 친화력, 학생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잘 제시할 수 있는 표현력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선생에게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너희들은 이것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이 없다면 수업은 맥이 빠진다. 내겐 그게 없었다. 과연 소설이라는 게 배워서 되는 것일까? 내가 가르치면 뭐가 좀 나아지는 것일까? 오히려 재능있는 학생을 망치는 것이 아닐까? 늘 이런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심을 떨쳐버리기 위해 나는 강의시간이면 더 큰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내 내면은 더 쪼그라들었다.

 저녁이면 젖은 비옷같은 영혼을 추슬러 여의도로 향했다. 문화계의 이슈들을 다루고 예술가들을 불러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생방송이 있었고 그 전과 후에는 녹음이 있었다. 연주회를 앞둔 바이올리니스트, 큰 상을 받은 발레리나, 신작을 출간한 동료 작가,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감독 같은 사람들이 초대되었다. 요일마다 고정 게스트가 있어 이들로부터 각 장르의 현황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 방송역시 강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것 역시 한 편의 쇼다. 정해진 시간에 시작되어야 하고 또 끝나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손님들이 다녀간 빈자리에 남아 나는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내 내면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버스가 왔는데, 와서 모두들 그 버스를 타고 떠나는데, 타고 떠나버려야 하는데 그러나 나는 정류장에 남아 있는 대가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고전적인 저주의 형식을 닮았다. 너는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소설 쓰기에 대한 얘기를 해도 좋다. 그러나 절대 그 시간에 네 자신의 소설을 써서는 안된다. 너는 다른 사람의 예술에 대해 얼마든지 말해도좋다. 신나게 떠들어라. 하지만 그 시간에 네 소설을 이야기하거나 그것을 써서는 안된다. 나는 그 저주의  대가로 월급과 연금을 보장받고 꽤 쏠쏠한 출연료를 받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뒤통수 어딘가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기분이었다.

 

- 세상의 그 어떤 흥행영화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보다 대박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관광객들이 미켈란젤로만  보고 나갈 것을 염려한 바티칸 당국의 섬세한 배려 덕분에 <천지창조>가 그려진 시스티나 성당은 바티칸미술관의 거의 모든 작품을 다 본 뒤에야 볼 수 있었다. 깃발을 치켜든 단체관광객들은 바벨탑이 무너졌다는 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려는 듯 다양한 언어로 떠들며 한 발 한발, 창조주를 향해 거만하게 손을 내민 아담을 향해 전진했다. 내가 듣고 식별한 언어만 해도 아홉 종은 넘었다. 중국어, 일본어, 한구겅,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등등의 언어가 이민족의 정수리와 관광 가이드의 깃발을 넘어 그 언어를 알아듣는 상대에게 전달되었다.

 

- 여자친구는 등과 어깨, 배 등을 전갈과 꽃, 그밖의 알 수 없는 문양으로 문신한, 나름의 미적 감각과 의지가 탁월한 사람이었는데 툭하면 남자친구 무릎에 앉아 키스를 퍼부어대곤 했다. 아내와 나는 마주앉아서 동양의 신비와 침묵으로 무장한 채 '그래도 기차가 가는 게 어디냐'는 심정으로 견뎠다.

 

- 술은 가능하면 언제나 그 지역의 것을 먹는다는 게 내 원칙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란 책에서 하루키는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는 더 멋진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밥을 해먹고 치우면 어느새 두시가 넘어 있다. 햇볕은 뜨겁고 거리는 조용하다. 가게들은 문을 닫아 걸고 큰 개들만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쏘다닌다. 하는 수없이 아내와 나도 꾸벅꾸벅 졸거나 좋은 햇볕을 아까워하며 빨래를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후가 그렇게 지나간다.

 

- 그들은 개를 잡아먹는 게 자연스런 문화인 시골에서 군대로 끌려왔을 것이고, 그런 그들에게 의심없이 자신들을 따르는 큼직한 셰펴드는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줄 가축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농촌은 그런 곳이다. 나른한 일상 뒤에서 태연히 살육이 진행된다.

 

- 흙으로 지어 기와를 올린 주황색 창고들이 자칫 밋밋해질 수도 있을 풍경에 포인트를 주고 있다. 찍어서 달력으로 만들어 도시인들의 좁은 방에 걸어놓으면 딱 좋을 장면이다.

 

-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힘겨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칠리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제 1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였다. 시칠리아는 로마가 경영한 최초의 식민지라 할 수 있었다. 최초였기 대문에 서툴렀고 가혹했다.

 

- 커르 더글라스가 검추가 스파르타쿠스 역을 맡아 출연했던 영화 <스파르타쿠스>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 알다시피 비너스는 지중해 전역에서 여러 이름으로 다르게 불렸다. 그리스인들은 아프로디테로, 페니키아 인들은 아스타르테로 불렀고,시칠리아인들은 베네레라 하였다. 도시를 누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비너스의 이름은 바귀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이 숭배했던 것은 같았다. 그것은 여성의 다산성과 성적인 매혹이었다. 훗날 우리가 그것을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일종의  미학적 가치로 다루게 되기까지는 아직 한참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 그들에게 비너스란, 즉 아름다움이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에게 미란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음란한 매혹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란 다다를 수 없는 천상의 특질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란 정복함으로써만 소유 가능한 일종의 재산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는 끝내 이해 불가능한 난해한 개념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는 즉각 제거해야할 불길한 미혹이었을 것이다. 미는 이렇게 끝내 합의되지 않은 채 천상의 도시 깊은 곳에서 어지러운 풍문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어느 나라든 기차는 오래된 길을 지나가고 기찻길 주변의 사람들은 기차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다. 마치 형체가 없는 유령처럼 기차는 유유히 벌판과 도시를 통과해 간다. 시칠리아처럼 변화가 무쌍한 곳에서는 기차여행이 제격이다. 터널 하나를 지나가면 찬란한 해변이 나타나고 다시 터널 하나를 지나면 불타는 지옥도가 펼쳐진다.

 

- 시라쿠사의 구시가인 오르티자로 들어가면 아르키메데스분수가 방문자를 맞는다. 그렇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바로 여기에서 났고 여기서 죽었다. 그가 "유레카"를 외치며 욕조에서 뛰어나간 곳도 바로 여기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아르키메데스의 이름을 딴 것들이 보인다. 아르키메데스호텔, 아르키메데스관광, 아르키메데스식당등이 도처에 있다. 제과점에는 유레카과자도 있다.

 

- 플라톤은 지도자가 계속 바뀌는 혼란 속에서 자신의 '철인정치'사상을 펼쳐보려 애썼지만 그의 열렬한 추종자인 디온도, 그를 잠시 스승으로 두었던 디오니시우스 2세도, 그가 꿈꾸던 철인정치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암살과 모반의 위협이 항존하고 주변의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음험한 환경에서 차분히 국가의 체제와 철학을 높이 세운 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치가 혼란스러우면 많은 지식인들이 할 수 없이 정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에 따라 정치철학은 발전하지만 그때 발전한 사상들은 그 당대에는 별 쓰임이 없는 경우가 많다. 마키아벨리 역시 피렌체의 혼란스런 정치상황을 보며 '군주론'을 집필했지만 문제의식은 세월이 한참 흘러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 아테네 군은 중산층 이상의 부유한 시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쟁은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한가롭게 토론이나 즐기던 유복한 시민의 운명을 순식간에 추락시켰다.

 

- 미국 케이블 tv 히트작 <로마>의 제작진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기본적으로 윤리와 도덕에 무심하고 전쟁과 살육에 익숙한 전사로 보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피 앞에서 수줍어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군단병들은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카이사르의 전례를 따라 툭하면 루비콘강을 건너 쿠테타를 감행했고 학살은 다반사였다. 

 

- 노토에 머무는 닷새동안 노토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에는 그런 마음에서 우러난 불편한 겸손이 얹혀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자긍심이 부족해 보였고 관광객들에게 송구스러워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 사하라의 열풍이 불어오는 뜨거운 광장에서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을 왜 훗날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죽음이 내일 방문을 노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와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 신전이라는 말에는 태생적으로 아이러니가 있다.

신전은 신이 사는 집이지만 실은 인간이 지은 것이다.

신전은 인간 스스로가 상상해낸, 크고  위대한 존재를 위해 지은 집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어올렸기에 이 집들은 끝내 돌무더기로 변해버린다.

세월이 지나면 무너진다는 것, 폐허가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전이라는 건축물의 운명이다.

그렇게 무너진 신전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중으로 쓸쓸한 일이다.

제우스나 헤라, 포세이돈 같은 신들이 상상 속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이 세운 높고 위태로운 것은 마침내 쓰러진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 아테네나 방콕처럼, 정부의 통제가 뜻대로 잘 먹히지 않는,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여 끝내는 애초의 도시계획이 크게 어그러지고 마는, 제3세계의 흔하디흔한 대도시를 닮은 구석이 아그리젠토에도 있다. 이런 도시는 세련된 멋과 섬세한 예절보다 남성적 힘과 권력을 숭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아그리젠토의 남자들은 모든 행동과 말에서 마초적인 기운을 강하게 풍긴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말도 짧게 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위협적이지는 않다. 인상은 거칠지만 막상 말을 섞으면 금세 친근감을 풍긴다. 

 

- 나는 내 마음속의 시칠리아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다. 맛있는 음식과 거칠고 순박한 사람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으로 가득한 오래된 유적과 어지러운 거리들을 생각했다. 시칠리아는 나에게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마침내 뒷걸음질 쳐 항구를 빠져나오던 페리가 단호하게 선수를 돌리자 메시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 리파리섬의 인구는 18000명 가량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내가 살던 성산동의 아파트 단지 하나에만도 그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작은 섬의 인구가 훨씬 많게 느껴진다. 서울의 아파트단지에선 많은 사람들이 방에 틀어박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고 있는 반면, 이곳의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에스프레소를 마시거나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 나는 내가 본 것들을 주절주절 이야기했고 카메라에 담은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아내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 리파리에서 경험한 이 이별은 나로서는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행복이었고 그것은 그후로 이어질 힘든 여행을 달갑게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리파리를 떠난 지 한참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선장수 프란체스코 할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조심스레 내밀던 젖은 주먹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지고 다시 리파리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김영하/복복서가>

 

언젠가 이태리 남부 여행때 기차 안에서.....

'밑줄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인정산기는 질문을 하지않는다  (0) 2021.10.04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들  (0) 2021.09.24
조국의 시간  (0) 2021.08.28
타인의 속마음  (0) 2021.08.26
엄마는 엄마 없는 엄마가 되었다  (0) 202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