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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무인정산기는 질문을 하지않는다

- 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 치는 무서움이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 목줄을 풀어준다는 것은 강아지를 집에 가둔다는 뜻이었고,

목줄을 묶는다는 것은 강아지와 함께 바깥으로 나간다는 뜻이었다.

 

- 사람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했다. 담임은 착실하게 지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모텔 주인은 성인이 맞느냐고, 정확히 몇 명이 자고 갈거냐고 물었다. 경찰들은 주민등록번호를 물었다. 질문에 잘 대답하면 무언가를 얻었다. 담임은 칭찬을 해줬고, 모텔 주인은 방을 내줬고, 경찰은 부모에게 우리의 악행을 부드럽게 말해줬다. 질문에 잘못 대답하면 무언가를 잃었다. 담임은 쉬는 시간을 갈취했고, 모텔 주인은 따근한 잠자리를 빼앗았고, 경찰은 부모에게 우리의 악행을 과장되게 말했다. 

 

- 친구의 생일이 다가오면 우리는 몇 주씩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무인모텔에 갔다. 환하게 불을 밝힌 무인 정산기는 친절했다. 정산기를 우리를 반가워했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고,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무인 모텔은 재털이를 닮았다. 어디에나 있고 아무나 쓰고 아무다 더럽히고, 더럽혀도 다시 새것이 되고,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않았다.

 

- 우리는 충청도로 돌아갔다. 소영의 크림색 정장 바지가 가장 세련될 수 있는 청주로 갔다.

 

- 우리는 각자의 가게에서 많은 것들을 순식간에 외웠고 배웠고 얻었다. 아람은 글렌 피딕이니 로얄 살루트니 하는 위스키의 이름들을 늘어놓았고, 위염을 얻었다. 소영은 에스프레소 머신의 작동법을 배웠고, 커피 울렁증을 얻었다. 나는 수십개의 그릇을 한번에 쌓아 나르는 법을 배웠고, 근육통을 얻었다.

 

- 소영에겐 학교와 집과 멀어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나에겐 소영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소영은 날카로워져갔고 나는 소영에게서 최대한 무심한 척했다.

 

- 소영의 비굴함과 보잘것없음을 떠올리며 비웃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았으나

나의 비겁함을 직시할 때보다는 훨씬 편했다.

 

- 아람은 비키니 브라 속에 팁을 접어 넣었고, 나는 하이힐 속에 팁을 접어 넣었다. 성처럼 쌓은 술잔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폭탄주 제조법을 아람은 배웠고, 손님과 쉽게 대화하는 매뉴얼을 나는 선배에게 전수받았다. 

'첫째, 오늘의 날씨 이야기, 둘째, 저녁 식사이야기, 셋째 손님이 입은 옷 이야기, 넷째 흘러나오는 노래 이야기'

만나는 손님마다 나는 거의 똑같은 말을 했다.

"오늘 날씨가 참 스산하네요. 오는 길 춥지는 않으셨어요? 식사는 하셨나요? 파란 넥타이가 잘 어울리시네요. 

 

- 누구를 만나더라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말을 하다보면 한 손님에게 한 이야기를 그손님에게 똑같이 다시 건네기도 했다. "아까 그 얘기 했잖아" 그럴 때 손님들은 화를 냈다. 그럴 때가 아니어도 손님들은 화를 냈다. 아무 이유 없이도 화를 냈고, 술잔을 깨부쉈고, 아무 이유없이도 기분좋아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 최선의 삶 / 임솔아 / 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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