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정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역모의 죄명으로 죽었으니 왕위에 오를 수가 없는 신분이다.
이에 할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의 형에게 이산을 양자로 들어가게 하는데 그가 장조다.
정조는 장조의 둘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그럼에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노론 신하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들의 목이 언제 달아날지 근심 걱정했을 것이다.
반면에 정조 자신도 그런 신하들 속에 하루하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여러 정황상 정조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며 독살설도 제기되고 있다. 지금처럼 CCTV가 있고 과학적 수사기법이 동원되었다면 진실을 밝힐 수 있으련만.......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왕위에 있었다면 조선의 중흥기가 더 오래 가지 않았을까?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 힘쓰고 수원 화성을 건축하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던 정조의 릉인 건릉, 아버지 사도세자가 있는 융릉과 함께 융건릉으로 불리운다.
조선 제 22대 왕이자 영조의 손자, 사도세자의 아들로 이름은 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
즉위 후 규장각을 설치하고 신진 학자들을 등용하고 다양한 서적을 간행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인물 위주로 등용하는 준론탕평책을 펼쳐 관료제를 통한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전제 개혁 등을 통해
생산을 증가시키고 장용영을 설치해 군문을 정비했다. 재정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북학파를 중시해
재화를 늘리도록 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개혁을 해나갔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했다.<다음백과>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융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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