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나라

살려만 달라는 아들을 죽이고 후회한들.....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라고 했거늘, 자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임금을 성군이라 칭할 수 있을까? 후대 사람들로 부터 성군이라고 칭송을 받지만 살려만 달라는 아들을 냉혹하게 죽음으로 몰아넣고는 나중에 후회해서 '사도'라는 칭호를 내린들 무슨 소용있으랴. 볕이 따갑게 내리 쬐는 날......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화성 융릉에 갔다.

 

"날도 덥고 너무 멀다"

"한맺힌 사도세자를 찾아가는 데 이런 건 고행이라 할 수 없지 험험~~"

 

 영조는 사도세자를 '세자'의 신분으로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뒤주에 가두기 전에 일반 평민인 서인으로 폐한다. 또한 왕을 죽이려 했다는 죄를 물어 역적으로 몰아 죽인다. 자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정조)은 역적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역적의 아들이니 당연히 왕이 될 자격도 박탈되어 궁궐 밖으로 내쫓긴다.

 그러나 영조는 손자 이산을 쫓아낸 지 2달 만에 다시 궁궐로 불러들인다. 후사가 없던 영조는 왕위 계승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적인 자식을 후계자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요절한 효창세자(이산의 큰아버지)의 양아들로 입적시킨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이산은 왕세손 수업을 받을 있게 된다.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는 호되게 꾸짖었으면서 손자인 정조는 무척 아꼈다. 실록에는 할아버지 영조가 손자인 정조를 단 한 번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했다고 나온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걸린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영조가 두 사람을 너무 대놓고 차별해서였다고 본다. 정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노론 대신들은 성장하는 정조를 보며 날로 불안이 심해진다. 그리고 세손 이산을 위협한다. 이산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산이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한 건 그만의 생존전략이었다. 물론 워낙 공부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암살의 위협을 느껴 일부러 첫닭이 울기 전까지 잠이 들지 않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어쩌다 잠자리에 누울 때도 만일을 대비해 아주 두꺼운 옷을 입고 잤을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이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에게 남은 희망은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왕으로 만드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아버지 영조와 불편한 관계를 맺으면 안 되었다. 홍씨는 시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궁궐로 다시 돌아간 뒤, 시아버지와의 첫 만남에서 감사의 말을 전한다.

 

"저희 모자가 보전함은 모두 전하의 성은입니다." 아들의 안위를 위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속에서 뱉은 말이었을까?

며느리가 자신을 원망할 것이라 생각했던 영조는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을 받는다.

"내가 너를 볼 마음이 편치 않고 어려웠는데,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니 고맙구나."

 

어느해 겨울 창경궁을 다녀와서 적었던..........

 

그 귀한 아들을 왜 죽였을까?

 영조가 40세가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을 뒤주에 넣어 죽인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아들을 죽였을까? 영조 자신이 왕위에 대한 정통성에 대해 콤플렉스도 있어서였을까?

blog.daum.net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융릉
유난히 박석이 넓게 깔려 있다.
재실
화성융릉 개비자나무 천연기념물504호
몇 년 전 겨울에 갔던 창경궁........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장소는 이곳 창경궁의 문정전 앞이다.
사도세자가 태어난 창경궁

'우리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효종  (0) 2021.08.31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0) 2021.08.25
김포 장릉 - 광해군의 이복동생  (0) 2021.08.16
고양 서오릉  (0) 2021.08.08
장희빈은 어디에.....  (0) 2021.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