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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0

- 많은 사람이 진리에 도달하는 조건으로 방대한 지식을 꼽는다. 많이 알고 있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리에 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용기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란 내가 쥐고 있던 세계관을 내려놓을 용기를 말한다. 내가 믿는 진리가 거짓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용기 말이다.

 말이 쉽지, 이것은 실로 여려운 일이다. 내가 평생 믿어온 종교, 내가 평생 공부해 온 학문, 내가 평생 추구해온 정치적 입장을 부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과거에 내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상실하는 것이고, 동시에 아무런 대안도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나를 내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는 것보다 편안한 거짓을 진실이라 말하는데서 차라리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믿는 분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용기가 진리에 도달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과거의 상실과 미래의 불안으로 나아갈 용기, 작열하는 진실의 태양 아래에서 색안경을 벗어낼 용기, 그것이 인류의 거대 사상과 만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 판단 중지라는 개념을 처음 제안한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은 판단중지를 괄호 치기로 비유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가정, 과학적 가정과 인습적 가정에 일단 괄호를 치고 판단을 중지해보자는 것이다. 그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거기에 제대로 된 학문을 시작할 수 있다.

 

- 잠깐 존재하고 사라지는 인간의 삶에 그토록 신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기나 한 것일까? 어떤 이들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며 무신론을 말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개입하는 것이 진정한 신비라며 유신론을 말할 것이다. 

 

-용불용설은 주장한 라마르크의 이름을 따서 라마르크중의라고도 한다. 라마르크는 1809년에 저술한 <동물 철학>에서 진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동물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특정 형질을 발달시키고, 이렇게 획득한 형질은 자손에게 이어진다." 이 생각은 매우 상식적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개별 개체가 획득한 형질은 다음 세대에 유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평생 오른팔로 창던지기를 해서 오른팔만 발달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가 아이를 낳았다면 오른팔이 발달된 상태로 태어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개체가 환경에 적응하며 획득한 형질은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신에 의한 창조를 믿는 시대에 혁명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많이 사용한 부분이 점차 발달한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에서 기록된 영웅 서사시다. 아마도 그전까지 구전되던 여러 이야기들을 수메르인이 종합하여 문자로 기록하였고, 이후 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르러 시간 순서에 따라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수메르 시대 이전인 우룩 시기다. 우룩의 왕 길가메시의 모험과 여정을 열두 편의 시로 기록한 문서다.

 

- 우룩의 왕 인간 굴랍과 왕비인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길가메시는 2/3는 신이고, 1/3는 인간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힘과 용기를 갖고 있었지만 언제나 말썽을 일으키며 다녔다.  길가메시가 우룩의 왕이 되자 그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세상에 자신보다 강한 자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남자들을 때리고 노예로 삼았으며 결혼하는 여자들의 첫날밤은 반드시 자신과 치르게 했다. 백성들의 원성이 커져갔다. 그들은 신들에게 길가메시의 악행을 멈춰줄 자를 보내달라고 간청을 했다. 신들은 응답했다. 그래서 진흙에서 야수 엔키두가 창조되었다.

 

- 3500년 전, 스스로를 아리아인이라고 불렀던 민족의 이주로부터 시작한다. 아리아는 '고귀하다'라는 의미다. 이 고귀한 사람들은 카스피해 연안의 코카서스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던 민족이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자신의 땅을 떠나 이동을 시작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그들이 여러 방향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이들은 유럽지역에 정착해서 켈트족, 일리리아족, 슬라부족이 되었다. 다른 그룹은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이란고원에 도착했다. 이들은 소그드인, 메디아인이 되었다. 

 

-인류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구약>이고, 다른 하나는 <베다>다. 우선 구약은 아브라함 계역의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뿌리가 된다. 베다는 우파니샤드와 힌두교, 불교의 뿌리가 되었고 이들은 인도와 동양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 노자와 공자는 혼란한 세상이라는 공통분모 위에 발 딛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방법은 정반대였다. 노자는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그곳에서 떠나고자 했다면, 공자는 그곳을 바꾸고자 했다. 다시 말해 노자가 인위적으로 개입의 헛됨을 깨닫고 초월적 가치로 나아가고자 했다면, 공자는 인위적 개입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현세적 가치를 추구한 것이다.

 

- 우리는 주변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본다. 직장, 사회, 학교, 종교 등의 크고 작은 모임에서 부조리한 문제점에 봉착했을 때 그것을 대하는 두 종류의 사람 말이다. 어떤 이들은 그곳을 떠난다. 자신의 고결함과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진흙탕 싸움을 피한다. 반대로 다른 이들은 그곳에 남는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첨예한 논쟁과 갈등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어떻게든 그곳을 지켜내고자 한다. 

 탈속과 세속, 얼핏 모순되어 보이고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양극단의 가치는 어떤 면에서 인간 영혼의 보편적 무늬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렇다 저렇다 규정할 수 없는 넓은 범위를 아우르며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 <논어>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이것도 공자가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고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정리했다. 논어를 토대로 할 때 공자의 핵심 사상은 '인'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고 극히 포괄적인 개념이지만, 공자 사상의 근원이자, 유교 윤리의 최고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 공자와 노자의 차이는 그들이 다루고 있는 사상의 범위를 기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노자가 도와 덕에 대해 다루고 있다면 공자는 덕에 집중한다. 노자는 우주 전체의 근본 원리와 그것의 반영으로서의 인간의 행위를 다루는 데 비해 공자는 사회, 정치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의 인간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 중국 내에서 불교가 쉽게 전파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중국인은 실용적이고 현세적이며 외국문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 사상이 실크로드를 포함한 여러 교역로를 통해 중국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사회 문화적인 저항에 봉착한 것이 사실이다. 중국의 위정자들과 관료들은 공식적으로 도가와 유가만을 장려했고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불교는 자연스럽게 민간 신앙으로 파고들어 중국의 민중 문화와 융합되었다. 하지만 잘 정돈된 불교의 형이상학적 교리 체계와 우주 전체를 다루는 사상적 거대함은 점차 사회 엘리트인 유학자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불교의 자극은 유학이 스스로의 사상체계를 재정비하고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 유가 사상은 오랜 시간 중국 관료들의 공식적인 사상체계로 자리잡았지만, 형이상학적이고 거대한 사유 체계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불교가 <우파니샤드>와 자이나교 등 여러 사상들과 치열하게 논쟁하며 심오하고 세련된 철학적 담론으로 성장한 상태에서 중국으로 유입되었으므로 유학자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상당했다. 

 

- 노자의 도가 사상과 공자의 유가 사상은 이후 중국인의 세계관으로 정착했고, 세속과 탈속의 균형을 찾을 수 있게 했다. 특히 유가 사상은 강력한 사회 윤리 사상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공자 이후의 유가 사상은 뚜렷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현세적인 가르침만을 제시할 뿐,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거대한 거대한 철학 담론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문제였다.

 

-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사문 학파들이 자취를 감춘 것과는 다르게 유럽과 아시아지역으로 전파되어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 붓다를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다. 부처, 석가, 석가모니, 고타마 싯다르타 등..... 부처는 일반명사다. 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를 지칭하는 언어다. 다시 말해 과거부터 미래까지 어느 장소에서든 불교적 의미에서  깨달은 자가 나타난다면 그를 붓다나 부처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석가, 석가모니는 부족명이다. 샤카무니를 한역한 것인데, 여기서 무니는 '성자'라는 뜻으로 '샤카이족의 성자'라는 의미가 된다. 마지막으로 고타마 싯타르타는 특정한 개인의 이름이다. 우리가 아는 기원전 6세기 네팔 지역에서 태어난 현자를 지칭한다. 고타마는 성, 시다르타가 이름이다.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아버지 슈도다나 왕이 지어준 것으로 '모든 것을 성취한 자'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붓다를 상황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래, 세존,아라한,정각자 등 10여개다. 각각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보통 붓다를 높여 보르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싯다르타가 출가를 할 당시 인도 지역에서는 출가수행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우파니샤드>를 수용한 사람들이 각성하면서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겠다는 수행자가 많아진 것이다.

 

- 그치지 않는 갈증, 갈망을 뜻하는 갈애는 구체적으로 세 종류이다. 그것은 욕애, 유애, 무유애다. 우선 욕애는 감각적 욕구로서, 현실에서 오감을 추구하는 욕망을 말한다. 유애는 존재에 대한 욕구로서, 죽음과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집착이다. 무유애는 존재하지 않음을 추구하는 욕구로서, 허무주의적 태도로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집착이다. 불교는 세상을 허상으로 보고 세상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경계하지만, 그것이 허무나 도피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도대체 왜 이 모든 것이 안된다는 것인가? 감각적 욕망을 추구해서도, 영원한 존재를 원해서도, 반대로 세상을 허무로 이해해서도 안된다니, 이 모든 것이 집착이고, 무지이며, 그래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붓다는 충격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고정 불변하는 나, 즉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를 무아라고 한다. 여기에 <베다>와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베다>의 세계관에서는 나의 궁극적 본질로서 아트만을 상정한다. 아트만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고정된 완벽한 실체다. 이 경우 개인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는 이러한 실체에 도달하는 것이 된다. 반면 불교에서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아트만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흩어지고 모이는 임시 상태일 뿐이다. 이렇게 임시로 모여있는 상태를 붓다는 모래 무더기처럼 쌓여 있다는 의미에서 '온(쌓을 온)이라 하는데, 특히 다섯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하여 오온이라 부른다. 

 

- 나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인 '오온'은 색, 수, 상,행,식이다.

색은 물질 요소로 육체를 말한다. 

수는 육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각을 맗나다.

상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표상 작용으로 심상, 영상 등을 말한다.

행은 의지와 같은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식은 앞서의 모든 마음 작용을 일으키고 종합하는 의식활동을 말한다. 

 

- 붓다의 가르침은 <베다>의 토대 위에서 탄생했지만, <베다> 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붓다는 <베다>의 일부를 받아들이면서도 비판적 관점을 취했다. 업, 윤회, 해탈이라는 기본 세계관은 이어받았지만 고정 불변의 자아, 즉 아트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 붓다가 입멸하고 1년 후, 가장 뛰어난 500명의 제자들이 라자그라하에 있는 칠엽굴이라는 동굴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를 1차 결집이라고 한다. 제자들 중 기억력이 가장 뛰어났던 아난다를 중심으로 경전이 정리 되었다. 아난다가 먼저 스승의 말씀을 암송하면 다른 제자들이 이를 따라서 합송하고 승인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정리된 초기 경전을<아함경>이라 한다. 수행승이 따라야 하는 계율은 제자 우팔리가 선창하는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이들은 동굴 밖에서 따로 회의를 열었는데, 이를 굴외 결집이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제자들 사이에 의견과 해석의 차이가 생겼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간격은 커져갔다.

 붓다 입멸 후 100년이 되던 해에 두 번째 결집이 있었다. 이를 2차 결집이라 한다. 대략 기원전 383년경의 일이었다. 아난다의 제자인 야사는 인도 각 지역의 장로들인 700명의 비구들을 바이샬리에 소집했다. 일부 비구들이 계율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 우리 주위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근본주의, 원리주의, 권위주의, 절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철저한 규율 준수와 정통 계승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여긴다. 반면 다른 이들은 자유주의, 상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상황과 맥락에 따른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인정한다. 개개인의 판단과 행위를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한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둘 중 어떤 태도가 더 올라른가? 사실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필요하다. 너무 느슨하면 둔탁한 소리를 내지만 너무 팽팽히 당기면 끊어지고 만다는 붓다의 가르침처럼 말이다. 하지만 2차 결집의 결정은 단호했다. 논의되었던 열 가지 행위 모두 잘못되었으며 이것이 비구들에게 죄가 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던 각 지역의 많은 승단과 승려가 이러한 결정에 불복했고 논의를 통해 계율을 수정했다. 이를 대결집이라고 부른다. 이를 계기로 승단은 크게 둘로 양분되었다. 이를 근본 분열이라고 한다. 우선 전통과 권위를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승단은 상좌부라고 불렀다. 여기서의 상좌는 장로를 뜻한다. 다음으로 새로운 해석과 유연성을 주장하는 대중부라고 불렸다. 

 

- 복잡성과 다양성의 증가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게 하고 다양한 지역에 적용될 가능성을 높인다.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거대 사상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번성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변형과 적응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 교리가 너무도 복잡해지고 세밀해졌다는 점이었다. 교리 해석 중심인 학문으로서의 불교는 어쩔 수 없이 승가과 비구의 전유물이 되었다. 일반인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당시 불교의 방향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석가 입멸 후 500년이 되었을 무렵, 인도에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상좌부와 대중부를 포함한 모든 지파의 폐쇄적이고 지엽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부파불교 전체를 소승이라 낮춰불렀다. 소승은 '작은 수레'라는 뜻으로, 비구 개인만의 해탈을 강조하는 부파불교의 개인주의적 경향을 비난한 것이었다. 대신 새로운 불교운동은 스스로를 대승이라 불렀다. 즉, 많은 이들을 함께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의 종교라는 뜻이다. 이후 대승불교는 동아시아로 전파되며 불교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불교는 인도 문화권과 동아시아 문화권의 사상적 연결고리다. 인도 지역에서 탄생하여 베다의 세계관 안에서 걸러졌지만, 인도에 정착하지 못하고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가, 유가 사상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동아시아인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 불교가 다른 철학이나 종교와 달리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는 이유는 자아에 대한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자아에겐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설은 일반적인 철학이나 종교 사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불교 고유의 사상이다.

 

- 동양의 철학적 사유가 일원론으로 시작된 반면, 서양의 철학적 사유는 이원론으로 시작되어 근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일원론을 발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의하면 헤일로타이는 노예신분을 잊지 않도록 연중 일정한 수의 매를 맞았다. 또,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이더라도 그에게 용기가 있기 때문에 주인을 공격하기 쉽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 스파르타가 엄격한 신분제에 기반하고 상시 전시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음에도 시민들 사이에 평등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모두 전사로서의 평등한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칸트 이후의 서양철학은 새로운 시대로 도입했다. 철학의 관심은 외부의 대상 세계에서 내면의 주관 형식으로 돌아섰다. 칸트의 업적은 독일 관념론으로 계승되었다. 피히테, 셀링, 헤겔이 대표적이며, 특히 헤겔에 이르러 독일 관념론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유럽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기도 한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라는 두 물줄기가, 칸트라는 하나의 호수로 모여들어서, 여기서 시작된 독일 관념론의 흐름이, 헤겔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이르러 서구 형이상학이 완성되었다고 말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0 / 채사장/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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