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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사랑을 놓친 것처럼

- '괜찮다'의 어원은 어쩌면 '관여치 않는다'는 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조선 중기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아무데에도 관여하지 않으면 무사할 수 있으리라는 절박한 기대가 그 언어를 만들어 냈다는 가설이다.

 아무 편도 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중립을 지키면 나를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괜찮다고 하는 것이다. 기분이 상해도, 상처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짓는 것이다.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종이필터 밑바닥에 가라앉은 검은색 커피 찌꺼기처럼 갈피를 잡기 어려운 감정이 그대로 남았으면서.

 

- 사라진 것들은 불쑥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차가운 커피를 좋아하는지 뜨거운 커피를 좋아하는지 낱낱이 기억할 여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차가운 커피와 뜨거운 커피 따위가 도무지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치명적인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누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나는 요즘 꽤 자주, 그 사소한, 커피의 온도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마다 혀끝의 온도가 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 한 사람을 무장해제시키고 위안을 주는 온도가 제각각이라면,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말고 단 한사람쯤은 나만의 온도를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키가 훌쩍 크고 눈매가 선한 사람이었다. 그가 두르고 있는 남색 앞치마는 그녀가 카페에 풀어두고 온 그것과 똑같았고, 그가 손에 든 흰색 머그잔은 그녀가 빡빡 문질러 닦다 포기한 것과 똑같았다. 꿈인가 싶어 눈동자에 힘을 주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예감이 아주 빠른 속도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것은 누가 알려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었다.

 

- 초행이란 가늠할 수 없어 아득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 애초부터 불가능한 사랑을 놓친 것처럼 안도감과 허전함이 동시에 들었다. 놓친 것이 어디 그런 것들뿐이겠느냐마는.

 

- 내가 이제 제주를 떠나야지, 결심하게 된 것은 그 작은 서점에 가는 길이 더이상 설레지 않아서였다.

지체없이 짐을 꾸려 제주를 떠난 이유는, 환상이 멸하는 순간을 조금이라도 연기해보자 하는 안간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고 온 진짜 내 방, 벗어나고 싶기만 하던 그 '안 쪽의 세계'가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 선은 가보고 싶은 장소들을 꼼꼼하게 정리해왔고, 그곳들을 양껏 둘러보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동선을 고민하여 계획을 짰다. 윤이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였다. 지금껏 윤의 여행들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안 고프면 먹지 않았다. 밥을 먹어야 할 적도 많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전적으로 감에 의존하는 여행. 그것이 윤의 방식이었다면, 전적으로 '표'에 의존하는 여행, 그것이 선의 방식이었다.

 

- 윤이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늘 계획표를 짜?"

고개를 내리깔고 선이 대답했다.

"안 그러면 불안해서. 나는 말이야, 계획이라도 잘 세워놓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왜?"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믿어?"

"야, 아니야!"

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사래를 쳤다.

"너는 내가 아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야." 윤은 선의 손을 잡고 또박또박 말했다.

"계획표 안에서도, 밖에서도 말이야." 그리고 덧붙였다. "친구야, 내가 보증해!"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밤이, 천천히 깊어갔다.

 

-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여기까지 걸어온 것 같았다.

 

- 우연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세상의 어떤 사랑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그 도시는 밤이 되면 사막처럼 넓고 막막해졌다.

 

- 기계적인 그 비장함만이 현실을 살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

 

- 이불을 펼친 채 사는 삶이란 아침에 이불을 갤 여력 없이 사는 삶을 뜻했다.

 

- 그것은 그녀에게, 지금껏 이 도시에서 버텨온 시간, 그 과거와 현재, 그리고 상혁과 함께할 미래에 대해 묻는 재촉처럼 들렸다.

 

- 상대방이 싫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그 옆의 내가 싫어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 옆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할 때, 혹은 그 모습이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변해갈 때 우리는 이별을 결심한다.

 

- 누구나 자신과는 이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과 이별한다. 가장 가까운 옆 사람과 헤어지면 내가 조금은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 그때의 그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유심히 헤아렸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둘의 관계가 달라졌을까? 돌이킬 수 없는 가정들에 숨겨진 의미를 판독하기에 그는 지금 너무 지쳐 있었다.

 

- 늘 새기는 말이 있다. 한 권의 책을 백 명이 읽었다면 모두 백 개의 텍스트가 된다는 말. 다들, 따로따로 읽는다. 따로따로 느낀다. 개별적으로 살고 개별적으로 사랑한다. 

 

- 그 사람들은 내가 아니니까요. 사람들은 쉽게 말하죠. 너의 완벽주의 성향 때문이라고. 완벽해지겠다는 마음을 버리라고요.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다음에 완벽한 무대를 꿈꾸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제 마음은 다음번이 아니라 지난번에 꽁꽁 묶여 있어요.

 

- 완전히 녹지 않은 채 도심 길가 한편에 아무렇게나 쌓인 눈의 형상은 '한순간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것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한순간 아름다웠으나 한순간 깨끗하게 소멸하지는 못한 것들. 구질구질하게 남겨졌다가 결국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들의 남루한 운명 말이다.

 

- 어차피 며칠 지나면 스르르 녹아 없어지고 말 텐데! 인간의 생명은 좀더 길뿐. 결국 눈으로 만들어진 눈사람의 숙명과 다를 바 없다. 눈사람 창조자가 되는 동안 인간은 혹시 그 엄혹한 사실을 잠시 잊고 싶은 걸까?

 

<우리가 녹는 온도 / 정이현 /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