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는 전국시대의 혼란스런 삶 속에서도 자유를 꿈꾸고 자유를 노래하고 자유를 사유한 철학자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절대 조건은 자유다.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자유라면, 행복은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장자철학에서 도출되는 자유 개념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로부터의 자유'고, 다른 하나는 '~에로의 자유'다 전자는 일반적인 개념이고, 후자는 장자철학에서 발견되는 절대 자유라는 독특한 개념이다.
-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 살고 있다. 디지털 세계의 특성은 숫자를 숭상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데이터화해서 통계를 재고, 그 수치로 등급화하거나 서열을 매긴다. 사람들은 그가 지닌 숫자(성적, 토익점수, 연봉, 부동산 가격, 입고 걸친 옷이나 가방등의 브랜드 가치 등등)로 가치를 평가한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은 실질적인 가치보다 투자 가치에 골몰하게 된다. 그러나 장자가 보기에 이런 소유론적 태도는 숫자 숭상 분화가 가져온 허명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 평가의 중요 지표는 숫자였다. 그러나 소비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철학. 도덕성, 가치관 윤리의식,신뢰, 생태 생명 공존 등등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중요한 평가항목으로 등장하고 있다.
- 우리는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의 위협 앞에서 숫자가 우리의 생존을 실질적으로 지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배우고 잇다. 하늘 높이 떠서 전체를 조망하고 통찰하는 대붕의 시각으로 보자면 숫자에만 의존하던 시대는 이제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게 분명하다.
- 지금까지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오면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게 될까봐 걱정했지, 그것이 인류 자체를 바꿔 놓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4차 산업혁명이 세계와 인류를 바꾼다는 것은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기술의 부림을 당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 인공지능에게 주체성을 박탈당하는 위기에 노출되고 싶지 않다면 전체적 맥락을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방법의 하나가 장자철학에 담긴 아날로그적 감성회복이라고 생각한다.
- 대붕처럼 아스라이 하늘 높이 떠서 전체를 조망하고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지나가는 과정의 하나인 부분적 상황에 함몰되지 않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종종 빠져드는 고통이 진짜 힘든 이유는 그것이 잠시 스쳐가는 상황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 아날로그 방식은 세계를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데, 디지털 방식은 하나하나 쪼개 부분만 보는 불연속적인 시스템이기 때문에 관계적 맥락을 보지 못한다. 디지털 문화가 지닌 이런 맹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감퇴시키고 점점 기계에 의존하게 만든다. 자연의 운행 법칙을 기반으로 형성된 도가철학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기초로 정립된 것이다. 따라서 현시대가 추구하는 디지털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장자의 우언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고 허황되게 들릴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 자연의 변화에 대응하려면 잃어버린 자연의 본래성을 찾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날로그적 감성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휴대폰 혹은 인터넷망의 유실은 세상과의 관계망이 하루아침에 붕괴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디지털 문화의 편리에 길들어 그 속에 담긴 비정함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남해의 임금 숙과 북해의 임금 홀이 중앙의 임금 혼돈을 만나 매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둘이 그 덕에 보답하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칠규(눈,귀,코,입)를 통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혼돈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숙과 홀이 혼돈에게 날마다 구멍을 하나씩 뚫어주기 시작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이 그만 죽고 말았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주자 혼돈이 죽은 것이다. 혼돈의 죽음으로 '내편'이 끝나는 장면에 이르면 독자는 적잖이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눈 코 귀입이라는 감각적 창구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없으면 삶을 온전하게 수행하기 어렵다.
장자는 왜 혼돈칠규로 끝을 맺은 것일까? 우선 칠규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원천이라고 생각해서 일 것 같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주된 이유가 곧 감각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입이 있으니 먹어야 하고, 먹으려면 일해야 하고, 일을 하다보면 싫은 일도 있고....입은 먹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자칫 설익은 생각이 입밖으로 새어 나갔다가는 뜻하지 않은 변을 당할 수도 있다.
- 노자는 우리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은 몸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7개의 구멍 덕분이다.
- 경쟁사회는 하나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전쟁터가 지겨워 죽으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거라는 기대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죽음의 세계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다.
- 장자가 꿈꾸는 이상적 자아는 '소유요'편의 거대한 새 대붕의 비상으로 묘사된다. 대붕은 현실적 자아를 극복하고 스스로 이뤄낸 이상적 자아의 상징이다.
- 물고기인 곤이 대붕으로 변할 때.....날개는 신체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변화, 곧 깨달음을 의미한다.
- 대학에서는 세분화된 전공 지식들을 가르친다. 전공 지식은 특정 분야의 특정 관점에서 고찰하고 연구해서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다. 그러므로 특정 관점에서는 참이 될 수 있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참이 아닐 수도 있다. 이는 대부분의 전공 지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며 속성이다. 특정 관점에서만 참이 되는 지식은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소용될 뿐 그 범이를 벗어나면 무가치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지식에 갇혀 그것을 생명처럼 여긴다.
- 개구리는 우물이라는 공간을, 여름 벌레는 여름철이라는 시간을, 선비는 지식을 생명으로여긴다. 이들과 더불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식을 벗어난 대도의 세계에 대해서 논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 우물 안 개구리와 더불러 바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개구리가 공간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고, 여름벌레와 더불어 얼음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여름 벌레가 계절에 집착하기 때문이고, 왜곡된 선비와 더불어 도를 논할 수 없는 것은 선비가 배운 것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 연못 가의 꿩은 삶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지만 새장 속의 새는 주인에게 있기 때문에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관계적 상황에 놓인다. 관계적 맥락에서 마주치는 대상들은 모두 나와 다른 타자들이다. 그들은 내가 어찌할 수없는 존재자다. 타자의 다름이 생을 풍요롭게도 하지만 그로 인해 두렵고 화가 나고 힘들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름을 바꿀 수는 없다. 각자의 다름은 타고난 운명이니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
- 타자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타자를 어찌해 보려는 것 자체가 월권이라는 것이 장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전체의 관점에서 조망하면 생과 사는 따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하루가 밤낮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다. 밤만으로 하루가 성립되지 않고, 낮만으로 하루가 성립되지도 않는다. 밤과 낮이 하나로 묶여야 비로소 하루가 완성되듯 삶과 죽음도 하나로 묶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 중세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도 친구의 죽음에 애통해 하다가 문득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사랑할 줄 모르는 미치광이요, 덧없는 인간사에 안달하는 바보"짓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당혹스럽게 느껴지고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것은 '기'라는 전체적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개체적 자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개별자를 벗어나서 조망하면 삶과 죽음은 '기'의 다른 양상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죽음은 삶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슬퍼하고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다만 경험하지 못한 영역이라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우주 만물은 비어 있을 때 자기로서 존재할 수 있다. 가령 악기가 비어 있지않고 꽉 차 있으면 소리를 낼 수 없듯이 인간 또한 지식이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면 자기 소리를 낼 수 없다. 자기 소리, 자기 빛깔을 내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로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장자는 심재, 좌망,오상아를 통해 자기로 존재하는 길을 제시한다.
- 좌망에서 망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손과 발','귀와 눈의 작용'그리고 '지식'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 손발과 몸은 먹고 마시고 잠자는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귀와 눈의 작용은 감각에 얽매이게 하고, 지식은 우리의 행동 방향을 제한한다. 그러니 손발과 몸, 귀와 눈의 작용, 지식을 망각하면 감각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고 세상과 부딪칠 일도 없게 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좌망은 인간을 그저 살아 있는 하나의 자연 사물처럼 만든다. '인간의 자연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 매일 매일 쌓은 공력이란 뜻의 積後之功(적후지공)은 깊은 내적 수양이 쌓여 있지 않으면 때가 와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고 기회가 와서 이상적 자아를 실현할 수 없다. 그래서 이상적 자아실현에 적후지공은 필수적이다.
- 바람은 시간 개념이고, 구멍은 공간 개념이다. 소리는 바람이 통하는 길에서 난다. 텅 빈 곳에서 소리가 나고 도는 오로지 텅 빈 곳에 모이는 법이다.
- 장자는 '자연이 할 바'와 '인간이 할 바'를 구분하지 못한 채 인간이 모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허황된 지식에 대한 과잉 긍정이며 방종이라 생각한다.
- 세상의 시선에서 무신경해지고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 살면서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 종종 있다. 하지만 자존심을 해치는 자는 자기 자신이지 남이 아니다. 자존감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는 것이지 타인이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고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면 그것은 자존심이 아니고 타존심이다. 스스로를 믿고 존중한다면 그 누구도 그의 자존감을 해칠 수 없다.
- 사람들에게 왕태는 거울 같은 존재이며 불언지교의 스승이다. 가르치지도 않고 의논도 하지 않는데 그에게 배우겠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그의 고요한 마음은 깊은 물처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비춰 줄 뿐인데 그에게 갔던 자는 자기 스스로 성찰하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위로받고, 스스로 충만해진 마음으로 돌아간다.
-도가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가르침은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불언지교(不言之敎)다.
-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삼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을 거울삼는다.<장자 '덕충부'> 여기서 흐르는 물이란 변화에 흔들리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마음을 가리키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은 항상된 마음,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감각에 지배되지 않는 본래적인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육체를 여행 길에 잠시 묵어가는 한낱 여관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육체는 참된 내가 아니다. 그러니 참된 내가 아닌 것을 온전히 지키겠다고 애쓰고 안달할 필요는 없다. 기와 눈은 어떠한가? 왕태는 감각적 인식 자체를 긍정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감각적 지식을 불완전한 지식으로 규정했고, 왕태는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지식을 퍼 나르는 감각기관 자체를 실재하는 것이 아닌, 생각이 지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김으로써 불완전한 지식을 수입하고, 생산하고, 추출하는 감각지의 허구성을 원천 봉쇄하고 차단한 것이다.
- 유가의 도가 인간 관계, 가정, 사회, 국가 경영에 필요한 도에 집중되어 있고, 도가의 도는 인간의 자연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부터 양가는 길을 달리한다. 유가는 성인의 언행을 도의 모범으로 삼고, 도가는 자연의 존재 형식에서 삶의 법칙을 연역한다.
- 사람은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므로 모든 이에게 걸맞은 삶의 방법은 있을 수 없다. 저마다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맞는 지식은 스스로 터득해야지 보편화된 지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사회 전반을 유지하는 데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중심 가치가 필요하다. 다라서 보편지와 특수지는 상황에 따라 모두 필요하면서도 충돌하는 개념이다.
<장자로 읽는 행복 /박혜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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