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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삼국지 7- 장비와 마초 그리고 조조의 왕위 등극

 어릴적에 본 삼국지에서 장비와 마초의 싸움을 재미있게 보았는데 다시보아도 명장면이다.

역시 장비와 마초는 막상 막하의 전사다. 유비는 불같은 장비가 마초와 겨루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길까 전정 긍긍하지만 장비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둘이 싸우면 백합이 넘기기를 예사로 하고 불을 밝히면서 까지 합을 겨룬다.

 

둘 중하나가 꺾여야 끝나는 싸움인 것이다. 하지만 유비에겐 공명이 있었다.

공명이 꾀를 내어 마초를 유비의 사람으로 만들게 된다. 한데 이번엔 관우가 마초와 겨루어 보기를 원하는데

이때도 공명이 관우에게 편지를 보낸다. 미염공(수염이 멋진 관우를 이르는 말), 당신에겐 쨉도 안되는 인물이니 스스로 몸을 무겁게 하시라는 편지를.......그리하여 관우도 싸움을 거두게 된다.

 

사람을 현혹시키고 점을 보는 좌자와 관로의 이야기도 7권에 나오는 흥미로운 대목이고, 마침내 조조가 왕위에 오른다.

 

<인천 삼국지 벽화거리>

 

<삼국지 7권 밑줄긋기>

 

- 조조가 마초를 쳐부수고 돌아온다는 말을 듣자 헌제는 성 밖까지 어가를 내어 조조를 맞아들이고 옛적 한고조가 승상 소하에 베풀었던 예에 따라 세 가지 특전을 조서로 내렸다. 첫재는 조조가 조정에서 천자를 뵈올 때 내시들이 그 이름을 외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요, 둘째는 조회에 들 때 몸을 굽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셋째는 칼을 차고 신을 신은채 전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니 조조의 위엄은 더욱 날 안팎을 떨쳐 울렸다. 마초의 거병은 오히려 조조에게 복이 된 셈이었다.

 

- 장송은 양주의 눈짓도 못 본 체하고 오히려 빈정거림까지 섞어 맞받았다.

"승상(조조)께서 군사를 몰아 이르신 곳마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시고 치면 반드시 빼앗으신 것은 저도 잘 압니다. 지난날 복양에서 여포를 치실 때며, 완성에서 장수와 싸우실 때며, 적벽에서 주유와 부딪치셨을 때며, 화용도에서 관우를 만나셨을 때, 그리고 동관에서 수염을 자르고 입은 옷을 벗어 던지실 때와 배를 뺏어 타고 화살을 피하며 위수를 건너실 때가 그렇습니다. 이는 모두 하늘 아래 승상께 맛설 자가 없음을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다.?" 늘어놓는 게 모두 조조가 가장 참담하게 진싸움들이고 보니 조조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 여기서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은 것이 유비와 조조의 대비이다. 통상으로 조조가 원정을 떠날 때 보면 한둘 미더운 사람을 골라 근거지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이끌고 나갔다. 요즈음의 기업에 비유하면 새로운 업종으로 진출할 때 거기다 전력을 투자하는 셈이다. 거기에 비해 유비는 그 최초의 기업확장이라고 볼 수 있는 이번의 서천 진출에서, 주력은 고스란히 원래의 기업인 형주에 남겨 놓고 그 동안 쌓인 여력만을 쏟아붓고 있는 셈이다. 

 

-황권은 안타깝고 분했다. 방바닥에 머릴를 짓찧어 피를 흘려가면 유장을 말렸다. 그래도 유장이 듣지 않자 황권은 다가가 옷자락을 잡고 말리다가 나중에는 이빨로 물고 늘어졌다. 유장은 더욱 성이나 옷자락을 떨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황권이 기거이 악문 입을 벌려주지 않자 유장이 옷자락을 떨친 힘에 황권의 앞니 둘이 쑥 빠졌다. 실로 몸을 돌보지 않는 충신의 간곡한 만류였다.

 

- 아무리 천하의 봉추선생이라지만 쏟아지는 화살비야 어찌 피해 낼 수 있겠는가. 가엾게도 방통은 끝내 어지럽게 나는 화살 아래 죽으니 그때 나이 겨우 서른여섯이었다. 저 자허상인이 예언한 대로(봉황은 다 자라기도 전에 땅에 떨어지고)만 것이었다.

 

-북거조조 동화손권 - 평소와는 달리 겸허하게 받다들이려는 관우에게 공명이 싯구를 읊조리듯 여덟자를 일러주었다. 관우가 잠깐 생각하듯 하다가 다짐하듯 말했다. "군사의 그 말씀 가슴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남달리 자부심이 강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 않는 관우였으나 상대가 공명인 때문인지, 아니면 형주가 너무도 종요한 땅인 까닭인지 하마디 묻는 법도 없이 공명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 장미와 마초의 싸움은 그럭저럭 백 합을 넘어섰다. 그러나 승부가 나기는 커녕 어느 쪽도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고 있던 유비는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은근히 마초가 탐이 나면서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장비가 실수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 이회가 말하길 "지금 장군(마초)은 천하를 호령하는 조조와는 아비 죽인 원수 사이가 되었고, 또 농서의 사람들에게도 이를 갈만한 한을 품게 하였소. 뒤로는 장로의 얼굴좌 볼 수 없게 되었소이다. 이제는 사방을 둘러봐ㅗ 받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장군 한몸뿐이니 참으로 딱한 일이오. .......유황숙께 의지하면 위로는 선친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공명을 이루루 수도 있지 않겠소?" 이에 유비에게 가기로 하는 마초....

 

- 사실 조조는 유비나 손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학문적인 사람이었다. 지금 남은 것은 백여 편의 시와 문장뿐이나 조조의 문집인 위무제집은 모두 20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조의 숭문호학의 정신은 뒷날 그 아들 조비의 술회에서도 자주 보이거니와, 현대 중국문학의 개척자인 노신도 조조의 문학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조조는 완고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후한의 문학적 기풍에 대해 통탈을 주장했다. 통탈이란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주장이 당시의 문단에 영향을 끼쳐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문장들이 생겨났다. 사상이 통탈되어 완고함과 치우침에서 벗어난 덕분에 이단과 외래사상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공자의 가르침 이외의 것들도 속속 흡수되었다. .......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다만 조조 자신의 문장이 조금밖에 전해지지 않는 일이다.>

 

- 이미 복황후고 뭐고 없었다. 오직 조조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에게 강력하게 도전해 오는 적대세력의 핵심인 복 아무개일 뿐이었다. 내가 천하사람들을 모두 저버릴지언정 천하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저버리지 못한다 - 일찍이 최없는 여백사를 베면서 그렇게 외치던 조조가 아니었던가.

 

- 방덕은 마초밑에 있던 장수인데 마초는 유비에게 항복하고 병이 나 누워있다가 마초를 따라가지 못했다. 조조는 방덕의 무예를 아는지라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 감녕은 2경이 되기를 기다려 흰 거위털 백 개를 나누어 주고 모든 군사들의 투구에 꽂아 서로를 알아보는 표지로 삼게 했다. 그리고 갑옷끈을 단단히 매게 한 뒤 말에 올라 조조의 진채로 짓쳐들었다.

 

-건안 27년 여름 5월,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들은 천자께 표문을 올렸다. 넒은 한중 땅을 새로 얻은 데다 싸움은 이기지 못해도 강동 손권에게서 조공까지 받게 되어 조조의 위세가 더욱 높아진 까닭에 거의 모든 벼슬아치가 다 나선 늬논이었다. 위공 조조는 그 공덕이 옛적의 이윤이나 주공도 따르지 못할 만큼 크니 마땅히 위왕으로 올려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허수하비 천자가 무슨 수로 그걸 마다하겠는가.

 

- 좌자는 후한서 방술열전과 삼국지 위지 무제기 화타전 등에 나오는 실제인물이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그의 놀라운 신통력도 몇 가지는 기록되어 있다. 곧 그가 조조의 궁궐에 앉아서 송강의 농어를 잡은 것과 촉에서 나는 생강을 때맞춰 내놓은 것, 양을 변해 양떼 사이에 숨은 것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가 조조의 노여움을 산 것은  정사와 연의가 너무 다르다. 후한서에 따르면 좌자가 조조의 미움을 받게 된 것은 방술에 곁들여 쓴 것으로 보이는 속임수가 탄로 난 까닭이다.  <삼국지 /나관중 지음/이문열 평역/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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