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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평범하다는 건 이루기 힘든 가치

- 엄마의 끈질긴 노력과 매일같이 행해지던 습관적이고 의무적인 훈련 덕에 나는 차츰 학교에서 별문제 없이 지내는 법을 대강 익혔다. 초등학교 4학년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적당히 무리 안에 섞여 있는 것도 가능했으니, 튀지 말라는 엄마의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다. 대부분은 그저 잠자코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화내야 할 때 침묵하면 참을성이 많은 거고, 웃어야 할때 침묵하면 진중한 거고, 울어야 할 때 침묵하면 강한 거다. 침묵은 과연 금이었다. 대신 '고마워'와 '미안해'는 습관처럼 입에 달고 있어야 했다. 그 두가지 말은 곤란한 상황들을 넘겨주는 마법의 단어였다.

 

- <아몬드>는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나같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소설이다.  긴 겨울의 끝에 봄이 온다. 봄이면 식물이 자라듯 감정도 자라고, 감정이 자라면 세상도 자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동안 가슴이 내내 두근거렸다. 다가오는 봄에는 내 감정과 네 감정이 스파크를 일으켜 아름다운 폭죽하나쯤은 터지고 말리라.<소설가 공선옥>

 

- 어쩐 일인지 그 사건, 그러니까 내가 사람이 맞아죽은 걸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더라, 하는 얘기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께, 단단하게 박혀 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라든기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사들이 내게 내린 진단은 감정 표현 불능증, 다른 말로는 알렉시티미아였다. 증상이 너무 깊은데다 나이가 너무 어려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볼 수 없었고, 다른 발달 사항들에 문제가 없어 자폐 소견도 없었다.

 

-편도체가 작으면 나타나는 증상중 하나가 공포심을 잘 모르는 거다. 용감해서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모르는 소리다. 두려움이란 생명 유지의 본능적인 방어 기제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건 용감한 게 아니라 차가 돌진해도 그대로 서 있는 멍청이라는 뜻이다.

 

- 의사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흥미로운 고깃덩이로 바라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는 의사들이 나를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일찌감치 접었다. 고작해야 이상한 실험을 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ㅇ니 뒤 내 반응을 관ㅊ찰해서 학회에 가서 봄내는 게 다겠지.

 

- 계절은 도돌이표 안에서 움직이듯 겨울까지 갔다 다시 봄으로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 엄마에게 늙을 기회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 태어나줘서 고마워. 어딘지 식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하는 날들이 있는 거다.

 

- 내가 복도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은 바다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비켜섰다. 곳곳에서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야, 쟤. 생긴건 평범하네, 따위의 말들. 나를 보러 1학년 복도까지 찾아온 2학년이나 3학년생도 있었다. 살인 현장을 본 아이. 그것도 가족이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는 걸 본 아이. 그런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아이.

 

- 적게 타고난 편도체, 각성수준이 낮은 대뇌 피질

 

-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 우리는 칠판 지우개나 분필처럼 그저 학교를 구성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 초등학교 때부터 냉정하고 무미건조한 아이로 평가받은 것도 대부분 웃는 것 때문이었다.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웃는 게 사회 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던 엄마조차 매번 설명을 하다가 지쳐 버릴 정도였으니까. 결국 엄마는 딴 방법을 생각했다. 딴짓을 하는 척한다든지 상대의 말을 못 들은 척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대부분 타이밍을 놓쳤고 한참의 침묵이 있은 뒤에야 간신히 할 말을 찾곤 했다.

 

- 커피 머신은 얼어죽을.

콧방귀 뀐 건 할멈이었다. 할멈은 짧은 말 몇마디로 엄마를 발끈하게 하는 데 아주 소질이 있었다. 엄마는 자신의 고상한 취미가 조롱 섞인 언어로 재단된 것에 분노했다. 

 

 

- 너랑 나, 누가 더 불행한 걸까.. 엄마가 있다가 없어지는 거랑, 애초에 기억에도 없던 엄마가 갑자기 나타나서 죽어버리는 것 중에서.

 

-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손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 반대쪽은 할멈에게 쥐어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 사람의 머리란 생각보다 묘한 놈이거든. 그리고 난 여전히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쩌면 넌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란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 엄마는 내내 울었다. 나는 울진 않았다. 아직 그 정도로 감정이 발달되진 않은 건지, 엄마를 보고 울기엔 이미 머리가 너무 커 버린 건지.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아몬드/손원평/창비>

 

평범한 사람은 인생을 날로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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