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충부편 <장자, 마음을 열어주는 위대한 우화 / 정용선 지음 /간장>
- 장자가 말하는 도란 연속된 세상에서 각득기의에 따라 평등하게 거래하며 유전하는 존재의 과정을 칭한다. 그리고 덕은 도가 개별자의 마음 속에 깃든 것을 이른다. 그러니 '덕이 마음에 가득찼음을 나타내는 신표'라는 뜻의 "덕충부"는 곧 '도가 깃든 개별자의 마음', 달리 말해 '존재의 실상을 회복한 개별자들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덕충부"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덕충자-존재의 실상을 회복한 개별자-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기형이나 불구의 몸인 반면, 덕이 부족한 사람들은 모두 번듯한 외모와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대비는 장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데, 즉 형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존재의 실상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존재의 실상을 회복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형에 집착하는 마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 장자의 관점에서 형(외형)이란 우리가 잠시 묵어가는 숙소와 같은 것이다.
- 왕태는 위엄있는 태도로 가르치지도 않고, 친밀하게 둘러앉아 담론하지도 않는다. 즉 사람들에게 어떤 고원한 가르침을 내리지도 않고,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에게서 무언가를 가득 얻어간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는 왕태의 거울같은 마음이 행하는 작용과 관련된다. 사람들은 왕태를 보면서, 마치 거울을 보듯 자신의 모습을 본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출뿐 칭찬하거나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며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 사람들은 흐르는 물에 비추지 못하고, 고요한 물에만 비출수 있다.
- 왕태를 성인으로 칭하면서 시작되었던 공자의 설명은, 이제 왕태가 승천할 것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왕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 즉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으되 존재의 실상에 닿아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와 제 모습을 비춰보는 것이다. 그는 결코 사람을 모으는 일에 신경 쓸 사람이 아니다. 저 태산은 그저 높고 수려한 모습으로 존재하면서 사람과 사물을 품을 뿐이다. 사람들이 산을 찾는 것이지,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장자가 자신의 우화에 공자를 등장 시키는 것은 일종의 패러디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패러디를 이해하려면 본래의 텍스트나 자료를 알아야 하듯이, 우화 속의 공자를 이해하려면 공자의 실제 행적을 조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공자는 유가의 큰 스승으로, 요순의 도를 계승하고 우,탕,문,무,주공의 행적을 정리 집대성하여 유학으로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그는 선을 택하여 굳게 지키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를 수행하는데 살신성인의 태도로 임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천하를 바로잡고자, 수레를 타고 중국 대륙을 돌며 자신을 써줄 군주를 찾아다는데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숙을 열고 제자를 길렀다. 그런 삶을 공자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60세가 되자 듣고보는 대로 세상을 수용하게 되어 귀가 편안해 졌고(이순) 70세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런데 공자의 이런 행적이 장자의 눈에는 다른게 보였던 것 같다. 세상을 바로잡아 평안케 만들기는 커녕, 인의에 얽매임으로써 되레 스스로의 삶을 평생토록 수고롭게 만드는 듯 보였던 모양이다. 마치 손발에 수갑을 찬 탓에 자유롭고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수형자처럼 말이다. 그러나 공자의 손발에 채워진 수갑'인 인의는 곧 공자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요. 그러니 그 수갑은 결국 공자 스스로가 채운 것이다. 즉 공자 자신의 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성심이란, 결국 존재의 실상에 다름 아닌 인시이다. 즉 성심 자체도 자연이르는 말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인의에 얽매여 수고로운 공자의 모습을 '천형'이라고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유념할 것은, 장자의 의도 자체가 공자를 평가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의도는 아마도, 우리 안에서 굳어져 있는 관념, 즉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강고한 관념 자체가 질곡처럼 우리 자신을 구속하고 있으며, 이는 결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의해 비롯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 애태타는 장자가 지어낸 가공 인물이다. 애는 슬프다는 뜻이고 태는 어리석고 둔하다는 뜻이며 타는 낙타의 등을 가리키니, '애태타'라는 이름은 곧 '슬프고도 어리석고 둔한 곱사등이'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애태타를 좋아한다.
-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상황들, 즉 삶과 죽음, 존속과 멸망, 사회적 성공과 실패, 경제적 부유와 궁핍, 잘남과 못남, 훼방과 칭찬, 배고픔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등은 어떤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끈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인력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또 분별적인 지식으로는 헤아릴수없는 자연적인 존재과정이다.
- 지금까지 덕충자로 등장한 인물들, 즉 왕태와 신도가, 숙산무지, 애태타는 모두 정상인들과 다른 불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덕충자인 인기지리무신과 옹앙대영 역시 마찬가지인데, 앞선 인물들이 지닌 여러 불구의 특성에 몇 가지를 더하여 조금 심한 모습이다.
- 인기는 다리가 구부러지고 걸을 때 발꿈치가 땅에 닿지 않는 절름발이를 뜻하고, 지리는 곱사등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무신은 입술이 없다는 뜻이니, 이른바 언청이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인기지리무신은 괴이하게 생긴 외모를 따서 그 이름을 지은, 장자가 만들어낸 가공인물이다.
- 온갖 감정을 거울같이 비출 뿐, 그런 감정을 소유하거나 저장하여 더 큰 감정으로 비화시킴으로써 자기 감정의 노예가 도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장자를 읽어야 할 시간2/차이비밍 지음/마일스톤>
- 왕태 선생과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귀가 듣고 싶은 소리가 무엇이며 눈이 보고 싶은 모양이 무엇인지 감흥이 없다네. 귀가 특별히 듣고 싶은 것도 없고 눈도 특별히 보고 싶은 것이 없다네. 마음을 완전히 덕의 조화 속에 자유롭게 노닐게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뿐이네.
만물의 탄생과 소멸, 모임과 흩어짐 뒤에 숨겨진 영원한 존재를 볼 수 있다면, 아무리 중요한 것을 잃는다해도 그것이 상실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네. 그래서 왕태 선생은 다리 한쪽을 잃은 것을 그저 흙을 한줌 흘린 것처럼 담담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네.
- 사람이 출렁이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멈춰서 출렁이지 않는 수면을 거울로 비춰보는 것과 같다. 자신의 마음이 흔들임 없이 잠잠하게 멈추어야 비로소 세상의 진실된 모습을 비출 수 있고, 모든 중생도 비로소 이에 따라 잠잠하게 멈춰야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다네.
- 왕태 선생과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귀가 듣고 싶은 소리가 무엇이며 눈이 보고 싶은 모양이 무엇인지 감흥이 없다네. 귀가 특별히 듣고 싶은 것도 없고 눈도 특별히 보고 싶은 것이 없다네. 마음을 완전한 덕의 조화 속에 자유롭게 노닐게 하게 위해 전력을 다할 뿐이네.
만물의 탄생과 소멸, 모임과 흩어짐 뒤에 숨겨진 영원한 존재를 볼 수 있다면, 아무리 중요한 것을 잃는다 해도 그것이 상실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네. 그래서 다리 한쪽을 잃은 것을 그저 흙을 한줌 흘린 것처럼 담담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네.
- 사람들은 어째서 왕태 선생의 곁에 머무르고 모여드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하길, 사람들이 출렁이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멈춰서 출렁이지 않는 수면을 거울로 비춰보는 것과 같다.
자신의 마음이 흔들임 없이 잠잠하게 멈추어야 비로소 세상의 진실된 모습을 비출 수 있고, 모든 중생도 비로소 이에 따라 잠잠하게 멈춰야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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