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조금은 불편한 심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과거 역사적 사실과 연관되어 있음은 우리 나라의 다른 독자들도 별반 다를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루키를 읽으면서는, 조금은 그런 감정이 희석된다.
하루키가 상당한 시간을 유럽이나 미국에서 보내면서 글을 썼고,
비교적 일본에 치우친 감정이 별반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의 각자 개별자로서의 위치가 갖는 자유로움에 기반하여 생활하고 또, 글을 쓰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대따위는 상관없는 개인주의적인 사고와 무국적성 때문에
일본 작가에 대한 거부감이 하루키에선 덜 나타나는 것이리라.
'어쩔 수 없이 일본 작가군.'하며 읽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미국에서 반일 감정이 한창 극에 달할 때 미국에 체류하며 느낀 감정이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를일이다.
미국에서 체류 할 당시에
같은 도시에서 사는 작가 스티븐 킹을 협박하는 이웃 이야기를 통해,
한적한 교외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서울을 떠나서 살자고 가끔씩 조르더라도 못들은 척 할 것이다.
대도시의 범죄등으로 교외로의 탈출을 시도하는 중상류층 들이
평화롭고 우아한 교외에서 여피족처럼 살고 싶지만 막상 교외에서 끔찍한 이웃을 만난다는 것은
또 다른 공포임에 틀림없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그런 공포감을 느꼈음에 <무단침입> <위험한 정사>등의 영화가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란 말에 공감이 갔다.
내가 읽은 하루키의 책 중 처음으로 하루키 아내를 언급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과정이 재미가 있다. 미국인중 특히, 여자들이 물어보는 것중에
거의 빠지지 않는 것이 당신 아내는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가정주부라고 하면 그냥 수긍하는 듯 하지만,
미국에서는 작가의 편집자겸 비서 역할을 한다고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이라는 것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는 뜻일게다.
이발소에 다녀와서 거울을 보고 망연자실해서 일주일 정도 밖에 나가지 않았던 적도 있다는 대목을 보고는,
쿨한 것 같은 하루키의 또다른 면모를 보게 되었다.
역시 사람에게는 저마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란 말에도 공감이 갔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의도치 않게 아프게 할 수도 있는 것인데,
하루키도 그런 심정을 내비쳤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쓰는 글에도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으니
많은 베스트 셀러를 갖고 있는 작가야 말해 무엇하리요.
하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쓰다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글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은 다른 책에서도 종종 나타나듯,
어느날 야구 경기장에서 있었던 날 이야기가 이 책에서도 소개가 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는 잘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다.
어느날 빵~~하고 갑자기 작가가 되어야 겠다는 결심이 섰다는 사실 말이다.
에세이 한 꼭지마다 뒷부분에 진노랑 바탕에 씌여진 책을 묶으면서
새롭게 첨가한 뒷이야기는 하루키의 얼굴 그림 표정과 함께 보면 재미가 있다.
뚱한, 얼굴을.....
##### < 밑줄 긋기> ######
- 미국이라는 나라를 안에서 자세히 보고 있으면,
이기고 이기고 마구 이긴다고 하는 것도 꽤나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통감하게 된다.
베트남에서는 좌절했다지만 확실히 이 나라는 냉전에서도 이겼고 걸프전에서도 이겼다.
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행복해졌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사람들은 십 년 전에 비해서 훨씬 많은 무거운 문제를 안고 있고,
그 때문에 어느 정도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도 사람도 좌절이나 패배라는 게 어느 부분에서는 역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미국을 대신할 만큼
명확하고도 강력한 가치관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나라가 현재 있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 일반적인 미국인이 느끼고 있는 깊은 피로감은
현재 일본인이 느끼고 있는 근질근질한 마음의 불편함과 동전의 앞뒤를 이루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명확한 이념이 있는 피로와 명확한 이념이 없는 불편한 심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고통스러운 선택은 우리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앞으로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는 아닐까.
- 그 초라하기 짝이 없는 차는 왠지 모를 불길한 폭력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그 우물쭈물거림이야말로 말로 표현하지 않은 언어고, 글로 쓰이지 않은 메시지인 것이다.
- 그들은 공기 속에 감춰진 말로 표현하기 않은 언어를 듣고, 글로 쓰이지 않은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하고 있을 뿐이다.
- 두툼하고 묵직한 일요일 판 신문이 마치 버려진 아이처럼 집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정보가 감상을 앞서고, 감각이 인식을 앞서고, 비평이 창조를 앞선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 피곤하다.
- 미국에서 80년대가 끝날 무렵, 장기적인 경기 후퇴와 함께
도시가 황폐해지고 행정 서비스가 저하되고 범죄가 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자 그들은 점점 도시를 떠나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도시가 이제는 아이들을 기르는 데 적합하지 않은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위험하고 교육 환경도 열악하다.
아이들이 자라남에 따라 그들은 도시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더 안전하고 더 조용한 환경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시골에 농장을 사서 말과 염소를 키우며 사륜구동차를 몰고 다니게 된 것이다.
-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세대 따위는 상관없다. 개인이 전부다"라는 사고 방식을 나름대로 고집을 부려왔지만
우리 세대에는 역시 우리 세대의 독자적인 특질이나 경험 같은 것이 있으니까 그런 측면을 다시 한번 검토하고,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새롭게 고민해봐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싶은 거죠.
그렇게 약간 빗나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 얼핏 보기에는 평화롭고 튼튼한 보통 장소가
그 밑바닥에 품고 있는 공포야말로 스트븐 킹이 오랫동안 계속 써 온 것이고,
그의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해온 사람들도 '얼핏보기에는 평화롭고 튼튼한 보통 장소'에 사는 보통 시민들이고,
그런 킹 씨의 사생활을 위협하는 '약간 이상한 사람들'도 역시
그 '얼핏 보기에는 평화롭고 튼튼한 장소'에서 온 사람들인 것이다.
- 빗에서 이가 빠지듯 가게들이 하나씩 하나씩 문을 닫았다.
- "부인은 무슨 일을 하세요?" 라고 묻는 미국 여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나의 편집자겸 비서역할을 하는 나의 부인에 대해,
나는 누군가 비서를 채용해서 내 일과 관련한 업무를 그 비서에게 맡기고
내 아내는 자신의 경력을 쌓기 위한 일,
혹은 뭔가 자발적으로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봉사 활동 같은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이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 비로소 정신적인 자립을 얻을 수 있다고.
- 물론 나이를 먹고 지적 집중력의 절대량이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역시 시간의 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는 쪽이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 손쉽게 빨리 기술자로서 급료를 받는 직업을 택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지금도 프린스턴 근교에 있는 건축업자, 조경업자, 빵 가게 주인이 많다.
마찬가지로 자본을 갖고 있지 않았던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발리 급료를 받을 수 있는 경찰, 군인 소방대원 등이 된 것을 생각하면, 미국에서 민족의 직업적 분포라고 하는 것도 꽤나 흥미롭다.
- 마을을 벗어나면 물론 쇼핑몰이 있다.
또 조그마한 자연이 있다. 그리고 또 다음 마을이 있다.......
어쨌든 이런 것의 끝없는 연속이다. 물론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작은 차이는 있다.
하지만 거의 같다.
특히 캘리포니아 같은 경우는 지형이 밋밋하고 평탄해서 자연이 단조로운 만큼,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은 더 크고 더 깊어지게 된다.
그런 끝없는 연속을 보고 있자면,
그러는 사이에 사람이 산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걸까 하는 상념에 문득 빠지게 된다.
그런 무력감은 미국에서밖에 맛볼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다.
유럽에서도 맛볼 수 없고 일본에서도 맛볼 수 없는 절대적인 아메리칸 오리지널이다.
- 솔직히 나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면 이성을 잃는 버릇이 있다.
마음속부터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이게 도쿄라면 그래도 괜찮지만 미국의 경우는 차로 영화를 보러 가기 때문에 문제가 훨씬 커진다.
<양들의 침묵>을 본 뒤에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로 왼쪽으로 달리고 있어서
양동이 하나가득 채울 식은 땀을 흘렸다.
- 학교교육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경우에는 학교에서 이런걸 배워두길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 열 명 중에 여덟아홉 명이 "뭐 나쁘진 않군" 하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열 명 중에 한 두사람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하는 편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 지금도 내가 쓴 글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형편없다는 말을 들어도,
열 명 중 한두 사람에게 전달되면 그걸로 좋다고 고집스럽게, 일종의 생활 감각으로 믿을 수 있다.
그런 경험은 내게 다시없는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소설가로 살아가는 게 훨씬 더 힘들었을 테고,
어쩌면 이런저런 면에서 내 본래의 페이스가 무너져버렸을지도 모른다.
- 나는 머리로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다.
몸을 실제로 움직여 사물을 생각하는 인간이다.
매일 뛰거나 수영하지 않으면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없는 것도 그탓인지 모른다.
-되도록 남들이 불쾌한 생각이 들지 않게 하려고 언제나 신경을 쓰며 글을 쓰려 하지만,
세상은 넓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써도 반드시 어디서인가 상처를 입거나 아니면 화를 내는 사람이 나오는 듯하다.
-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옛날부터 남한테서 받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딱한 경향이 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것이 일관되게 내 학업을 저해해온 듯하다.
딱 잘라말하면 "하고 싶지 않은 것, 흥미없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않는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제멋대로 이고 막무가내일지 모른다.
그 대신 하고 싶은 일, 흥미있는 일은 어떠한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내 페이스로 끈기있게 한다.
이런 성격은 - 일에 관해서이긴 하지만 - 지금도 거의 변함없다.
그보다는 전보다 더욱 체계적으로 되었다.
"정말 이상한 성격이네" 하고 아내는 자주 말한다. 아내는 잇따라 새로운 일을 척척 벌이고, 그
때는 푹 빠져서 열중하다가도 금세 싫증을 내버리는 성격이라서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있으면
가끔 매우 화가 난다고 한다. 뒤에서 뭔가로 (예를 들어 포크나 볼펜 끝으로) 찌르고 싶어진다고 한다.
- 그런 사람들의 자아나 아이덴티티나 세계관이나 호흡기관이나 소화기관 속에는
'1차 공통시험''**과장대리"라는 요소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박혀 있어서,
새롭게 뭔가를 받아들이거나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그런 까다롭고 복잡한 필터를 일단 통과 시키지 않으면 치명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가치보다는 자기가 속해 있는 회사나 관청의 이름,
혹은 자기가 얻은 시험점수 쪽을 훨씬 더 진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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