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책은 도끼' 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이 책은 전작과 같은 맥락을 유지한다.
두 책 모두, 거칠게 정리하자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일 것이다.
나는 왜 책을 읽느냐가 하나, 나는 어떻게 책을 읽느냐가 둘.
첫번째 질문에 대한 가장 짧은 답은 '풍요로운 삶'이 될 것이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가장 짧은 답은 '천천히'가 될 것이다.
- 내가 읽고 있는 글에 내 감정을 들이밀어 보는 일, 가끔 읽기를 멈추고 한 줄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일,
화자의 상황에 나를 적극적으로 대입시켜 보는 일, 그런 노력을 하며 천천히 읽지 않고서는 책의 봉인을 해제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다량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소량의 언어를 사용했다.
사실 그 반대의 경우가 많죠.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책 한 권으로 벌려놓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후배들을 가끔봐요.
자기는 특별히 할 얘기가 없어도 20분 동안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자랑이에요. 이거 큰일 이에요. 남의 소중한 20분을 왜 낭비합니까.
- 책은 그렇게 얼어붙은 정신과 감수성을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책은 도끼다'인겁니다.
-프로스트의 <독서에 관하여> 란 책
책이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시선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는 그렇게 보지 안았는데 어떤 책을 읽고 나면 그러게 보게 되는 거죠.
그 시선의 변화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 변화가 나를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이와 같은 시선을 확장시키는 의미의 책 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독서에 관하여>에 계속해서 나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풍경이 어느 순간 재치와 의미를 갖게 되고,
마침내 각각의 사물이 긴 잠에서 깨어난 공주처럼 당신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문장 아닙니까? 무심함 때문에 잃어버린 일상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겁니다.
언젠가 프루스트 소설의 제목이 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
제 해석이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일상을 제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싶어요.
내가 사는 지금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나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거죠.
- 우리는 내면의 욕망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그저 욕망을 하죠. 우리의 욕망을 구성하는 재료가 얼마나 허망한 것들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욕망의 구성 재료들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우리는 덜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이 욕망은 사유의 창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어요. 사유라는게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스마트폰 끄고, 접속을 멈추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겁니다.
인풋도 아니고 아웃풋도 아니고 노풋 상태로 있는거죠.
사유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내 안에서 자생적으로 우러나오는 것들을 못 건져냅니다.
- 나이듦이라는 것은 늘 거기 있었지만 미처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에 시선을 주어 즐거운 것들을 점점 더 많이 만들어가는 것이어야겠구나.
그게 잘 익어가는 일이겠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에 주목하는 힘을 길러야겠구나.
-곽재구의 포구기행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을 소개하도록 하죠.
<나란히 누워 서로의 살갗을 부비는 집들, 담장들,빤히 들여다보이는 이웃들의 꿈, 가난, 숨결들>
시골의 골목길 풍경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별 볼 일 없는 풍경, 그것을 주목하는 힘, 그게 삶의 지혜이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자, 시인의 재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문장이에요.
- 여행지에서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빨리 갈 생각만 하는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서두를까요? 그러려면 왜 여행을 갈까요?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하는데 목적지를 가는 데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과정의 즐거움을 놓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우리의 삶은 모호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명료한 답을 원해요.
그래서 "명료한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주 한 말이
"어떠한 일반론도 각자 삶의 특수성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말입니다. 삶은 아주 쫀쫀하게 이어지요. 시인은 그 부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삶이란 때로 상상력의 허름한 그물보다 훨씬 파릇한 그물을 펼 때가 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얘기했던 온몸이 촉수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이런 화두들이 삶의 지향점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륜은 사물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길의 이름이다.
- 아름다움은 아득히 먼 곳에서 빛나는 별빛 같은 것, 가까이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
-<한국의 나폴리.......이런 비유 당신도 좋아하나요. 소박하고 따뜻하고 성실한 자신의 무엇인가를 바보스럽게 위축시키는....>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들이죠. 들을 때마다 어딘가 좀 불편한, 한국의 스티브잡스, 한국의 빌게이츠, 한국의 누구누구,
이런 표현 속에는 언급하고 있는 그 개인의 존재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 같아요.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 <조용한 일> 전문
- 실력 없는 학생의 뒤늦은 과제처럼 보내드립니다.
-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성과를 쌓아가며,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평형수 수위를 낮춰가고 있다.
욕심으로 내 삶을 가득 채운 후 높아져버린 무게 중심으로 뒤뚱거리며 위태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위태롭게 높아져 버린 내 삶의무게 중심, 다시 안전하게 낮추어야 한다.
-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물이 흐를 때 개울을 만나면 물소리가 커지고, 폭포를 만나면 험해지고, 평평한 곳에서 조용히 흐르다가,
넓은 강에 이르면 서로 엉키고 시끄러줘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10년 전에 나쁜 놈이 지금도 나쁜놈이 아닐 수 있지요 .세월이 흘렀거든요.
- 아무것도 아닌 날을, 특별할 것 없는 날을, 어제도 오늘도 매일 지속되는 날들을 지켜낸다는 게 참 위대하다는 걸 깨닫는 요즘입니다.
오래 그곳에 있어주세요. 선배님, 나의 좋은 스승님.
그 어린 나이에 이런 걸 깨닫다니요. 놀랍고 기특해서 저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나의 제자가 나의 스승이 되어가는 구나 고맙다. 이런 축복.
-진정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삶의 모습이 단순하다.
-육체노동이 정신적인 삶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육체노동을 할 때만이
지적이고 영적인 삶이 가능하다.
그래서 몸을 번잡학 만들어야 해요. 잘 살려면 몸을 번잡하게 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이와는 반대로 마음은 번잡하고 몸은 평화롭죠.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면서 마음은 정신이 없죠.
-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이미
모두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이 자유로울 수 없거든요.
그래서 카잔차키스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겨지는 삶을 살고 싶었던 거죠.
- 인생을 공중에서 다섯 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이라고 상상해봅시다.
각각의 공에 일, 가족, 건강, 친구, 그리고 영혼(나)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것들을 모두 공중에서 돌리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머지않아 당신은 일이라는 공은 고무공이어서 바닥에 떨어뜨리더라도 이내 튀어 오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다른 네 개의 공들은 유리로 만들어진 공이라는 사실도 알게 될겁니다.
만일 당신이 이중 하나라도 떨어뜨리게 되면 이 공들은 닳고, 상처입고, 긁히고,깨지고 흩어져버려서 다시는 이전처럼 되돌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깨닫고 당신의 인생에서 이 다섯 개의 공들이 균형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우선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들은 저마다 모두 다르고도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목표를 다른 이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두지 말고, 스스로에게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두십시오.
당신 마음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을 대하듯 그것들에 충실하십시오.
- 시간과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둘 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그 길의 한걸음 한걸음을 음미하는 여행입니다.
- 삶의 아름다움은 미래를 위해 무엇이 좋을지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얘기 중에 영국에 있는 묘비명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 두 번 행복했던 여자가 누워 있다. 그녀는 행복했고, 그리고 그것을 알았다.
' 우린 두 번째를 못하고 있죠 그리고 대신 추억을 더듬으며 행복해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아이 초등학교 때 참 행복했었지 합니다. 사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아이가 빨리 컸으면 좋겠다면서 괴로워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막상 애가 또 크고 나면 아이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죠. 이게 우리가 사는 모습입니다.
이런 태도를 바꾸면 훨씬 행복해질 것 같아요.
- 불행하다고 느껴진다면 바로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나쁜 행동을 기억하라
우리는 결국 우리가 해왔던 것들의 합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모습을 본다.
자신과 그 사람의 공통된 죄를 기억하라.
- 어리석었던 사람이 현명하게 되기도 하고 악했던 사람이 진실로 착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흘러가는 존재이니 언제든 바뀔 수있는 존재들이니 자신을 믿고 변하려고 노력하고,
또 상대를 심판할 때에도 예전의 그와 지금의 그를 똑같이 놓고 보아서는 안되겠죠.
- 톨스토이가 말했듯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은 몸에 살짝 붙어 있지만, 스스로 배운 진리는 내 단어가 되는 거죠.
나만의 단어가 많아지는게 지혜로운 삶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는 이렇게 삶의 지표가 될 만한 꽤 좋은 문장들이 많아요.
- 저는 후배들에게 팀장이 되면 스스로를 경계하라고 해요.
팀원들이 웃어주는 게 진짜 웃겨서 웃는게 아니에요. 예의를 갖춰주는 거예요.
똑같은 얘기를 해도 힘 있는 사람의 말은 현명한 언사로 치부되지만 사실 평범한 말일 수 있어요.
-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번역한 이병애씨가 해설에서
"부조리한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일상의 작은 의무들을 수행하는 삶의 중요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책들을 읽고 여러분들도 일상의 작은 의무를 해 나가시며 각자의 삶이라는 정원을 가꾸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토론을 요청하며 질문을 던졌어요.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죠. 그래서 질의 응답을 통한 깨달음은 '영혼의 산파술'이라는 말이 나왔죠.
- 옛날 지식인들의 서가에는 늘 해골이 있었잖아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늘 생각하자는 뜻으로 말이죠. - 메멘토 모리
- 이 세계에 들어왔던 것처럼, 당신이 죽음에서 삶으로 왔던 그 똑같은 길을 따라 어떤 감정이나 두려움 없이 다시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자.
당신의 죽음은 우주의 질서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이 문장은 <1417년, 근대의 탄생>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 브람스가 태어났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그때는 이미 베토벤이 9번 교향곡까지 다 작곡한 상황입니다.
베토벤의 아홉개의 교향곡, 정말 대단한 음악들이죠.
그렇다면 아마도 그다음에 태어난 브람스는 베토벤의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 않았을까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중세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위험한 사상을 안고 있는 책이었어요.
<우주는 신의 도움 없이도 움직이고, 사후 세계에 경험하게 된다는 종교적 공포는 인간생활의 적이며,
쾌락과 미덕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뒤엉켜 있다.>
면죄부를 팔았던 시대의 이 책은 철저히 숨겨졌습니다. 신본주의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 될 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책이 포조 브라촐리나에 의해 발견됐고 그가 자신의 작업 동반자 미콜로 니콜리에게 필사를 부탁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필사된 책은 당대의 지식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몽테뉴,마키아벨리,보티첼리등이 읽게 됐고 이윽고 시대 변화의 시작점이 되죠.
이후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이 책은 신 중심의 중세 시대에서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로 건너가는 다리가 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 다시 인본주의로 돌아오는데에 이 책이 매우 큰 역할을 한 것이죠.
-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영속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여 "일탈한" 결과로서 물질들을 구성한다. - 라는 문장이
이 책-<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있는데 생명체가 신의 정밀한 계산이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라기보다,
일탈의 과정을 통해 탄생 된다는 얘기입니다.
-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현명한 쾌락'이었습니다.
현세, 즉 나중이 아닌 내 눈 앞에 있는 것에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집중하라는 의미의 쾌락이었던 것이죠.
이는 실존주의 철학과 동양 철학의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양 사상이 서양으로 유입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 안에 있었으나 억압받았던 겁니다.
에피쿠로스의 영향을 받은 루크레티우스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이런 문장을 적었습니다.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지금의 우리들이 들으면 특별한 주장이 아니지만, 아마 이 문장을 필사했던 미콜로 니콜리는 살이 떨렸겠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 어떤 탁월한 안무가가 있어 물질 내부의 입자들의 동선을 짜주지 않으며,
만물의 씨앗이 누가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회의 같은 것을 열지도 않는다.
- 인류가 불을 발견한 다음 어떤 발전이 일어났느냐 하면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구강 구조가 바뀌었고 뇌용적이 커지기 시작했대요.
음식을 익혀 먹으니 고기를 뜯는 이빨이 강해질 필요가 없었으니 하악이 줄어들었고, 그 공간 만큼 뇌의 공간이 커졌다는 거죠.
- <시대를 훔친 미술>은 추천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바료타로의 <항우와 유방> 잭 웨더포드의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한명기의 <병자호란>같은 책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지인이 이 책을 추천하더라고요.
- 17세기 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나라는 네덜란드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대부분 강력한 절대왕정 아래에 있을 때 네덜란드는 보기 드물게 시민이 주도하는 국가였고 이를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 중세 시대에는 현재의 삶을 천국을 예비하며 지나가는 통로 정도로 인식했어요.
그러다보니 현세를 위해 부를 축적한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 신이 아닌 인간 중심으로 자연을 바라보게 되니까 원근법이 출현합니다.
- 레어나르도 다빈치의 <베누아의 성모>가 그려지기 전까지는 성모마리아가 웃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없었대요.
왜냐하면 성모마리아는 이미 알고 있거든요. 이 귀여운 아이가 서른 셋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걸 알아요.
신의 계획에 의해 전부 다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즐거울 수가 없죠.
- 프랑스, 영국, 스페인 모두 절대 왕권을 바탕으로 대국을 만들었는데, 이탈리아는 이런 세계사적 흐름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났습니다.
큰 힘들이 세계를 주도하게 되고 피렌체의 영광은 서서히 끝나갑니다. 인구 10만이 안 되는 도시국가 상태의 이탈리아는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 책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을 때는 누군가 대중들에게 책을 읽어줬겠죠.
그런데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많이 보급되니까 사람들이 각자 묵독하기 시작합니다.
묵독을 하면서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했고 개인화가 진행된 겁니다.
-개신교가 문자를 선택했다면, 가톨릭은 미술의 강력한 힘을 다시 불러냈다.
가톨릭의 반 종교개혁은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1848년 혁명이후 그림과 글에서 사실주의 탄생....에밀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에는
영화라는 매체가 등장하기 이전 시대인데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아요. 화가들은 밀레의 이삭줍기 처럼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게 된다.
- 모두들 기성 제도와 관습, 관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새로워져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것이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친부 살해의 욕망 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거예요.
자기 아버지를 죽여야 비로소 새로운 가치가 내어나는 거니까요. 신화를 보면 많은 영웅들은 아버지가 없잖아요.
만약에 아버지가 있으면 그 영웅이 아버지 뒤로 서게 되겠죠.
그런 까닭으로 영웅들은 알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새가 물어다 주기도 해요.
미술사나 예술사도 기원을 부정하면서 거듭 나아가야 하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