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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장자는 자신의 저서 전편을 통하여 줄기차게 유가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싸웠다.

장자 내편 외편 잡편 어디를 펼쳐보아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장자가 공자를 가상의 무대 위로 불러내어

비판과 면박, 풍자와 조롱을 번갈아 안겨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원래 유가는 외형상으로는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를 외쳤으나,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서 수신과 제가는 뒷전의 일이고 주관심사는 치국과 평천하에 있었다.

공자의 유명한 천하주유 13년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정치를 해보기 위함이었지 내면세계의 수양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유가는 계속 입으로는 수신 제가를 주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수신의 철학을 위해 평생을 노력해온 장자가 보기에는 유가의 행태가 실로 위선적으로 밖에 보일 수 없었다.

 

장자가 유가를 배격했던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유가에서는 억지로 인의니 예의니 법도니 윤리니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인 것들을 떠받들고 살아가면서 사람은 자연의 도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대도가 폐하면 인이니 의니 하는 것이 나서고, 위선이 만연해진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비판이었다.

요컨대, 노자, 장자가 보기에 유가사상은 지나치게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하는 근본 내용이 이렇듯 위선적이고 인위적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 사상을 통해 천지 만물을 모두 껴안을 수 있는 위대한 도에 가까이 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유가에서 말하는 법도니 윤리니 하는 것은 사회규범이지 천지자연의 도가 아니다.

윤리 도덕이란 우리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인간은 도덕적 규범만 준수하고 산다고 해서 자신의 인간됨의 전모를 다 성취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그 수준을 넘어야 한다.

 

- 장자사상의 중요한 특징은 인생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을 그 자체로서 중히 여기고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지

반대로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기계적, 소모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장자는 우리에게 인생에 있어서 을 권한 사람이 아니라 소풍을 권한 사람이다. 인생의 관점을 바로 잡아라

 

-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무엇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일하러 온 것도 성공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 붕새와 대춘은 큰 지혜의 비유이다.

메추라기와 세상 사람들은 작은 지혜의 비유이다.

장자는 대붕이란 허구적인 새를 고안하면서 메추라기라는 현실적인 새를 은유로 끌어들인다.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대붕에 의해서만 메추라기의 가능성과 한계가 보일 수 있듯이 우리는 초월론적 지점에 이르러야만 우리의 삶을 바로 볼 수 있다.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서 현실 세계를 낯설게 볼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현실로부터 비약하여 대붕의 구만 리 장정을 시도해야만 한다.

 

- 사물의 한쪽만 보는 우리들의 분석적, 이분법적, 즉물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에서 사물의 진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예지와 직관과 통찰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다.

 

- 장자는 현실 세계의 갖가지 현상 그중에서도 시비, 선악, 미추, 정사, 화복, 길흉, 각몽, 생사등을 명확히 구분하려 하는 상대적 가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가를 밝히려고 한다.

 

- 삶을 수단시 하지 마라. 삶 자체가 목적임을 알라.

이 삶이라는 여행은 무슨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이 여행 자체를 즐겨라. 장자가 말한 소유요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인생이란 소풍이다.

 

- 장자가 던진 수수께끼

서양철학은 이성 중심의 철학이다.

서양 철학의 창시자가 플라톤이고, 플라톤 철학의 기본 개념이 이데아론인데, 이 이데아론이라고 하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인식에 있어서 감각을 배제하기 위한 철학이다.

, 불확실한 감각을 배제하고 오로지 확실한 이성의 눈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불변의 세계, 그것이 이데아의 세계인 것이다.

요컨대 이성이 없으면 이데아는 없다. 그러므로 이성철학의 시작은 플라톤에 있다.

 

이 이성중심의 철학이 그 후 2000년의 세월을 건너뛴 후에 독일로 건너가 칸트 헤겔 등을 만나게 되는데 ,

칸트는 책 제목 자체가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이었던 사람이고,

헤겔은 그의 핵심 사상이 소위절대이성이라는 한마디 안에 다 들어 있던 사람이다.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데카르트는 이른바 생각 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나

파스칼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명제 역시 사실은 모두 이성 중심의 철학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들 모두의 생각의 공통점은 인식에 있어서 감각은 불확실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확실한 것은 이성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하면 이성은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이에 반해 동양철학은 전혀 이성중심의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동양철학은 이성을 의도적으로 폐기시킨다. 동양철학에서 볼 때는 이성 역시 감각에 비하여 특별히 확실한 것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작용이라는 것 역시 조작과 선택이 가능한 하나의 인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위를 통해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도에 이를 수 없다.

동양의 현인, 철학자들은 수천 년 전부터 이성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해왔다.

영원한 진리 혹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이성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성은 결국 주관과 객관의 이원성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 이성이라는 주관은 자기가 객관으로 한정한 대상에 대하여만 인식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을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주 객 이원성 아래서 움직이는 이성의 태생적 한계이다.

 

그러나 우주의 참된 실재는 주 객으로 양분횐 의식 상태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다.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주객을 분리되기 이전의 근원적 일심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일심상태, 이것이 바로 이성 그 너머의 것이며, 이른바 초의식인 것이다.

장자에는 이러한 초의식 상태에 몰입해있는 현자들의 야야기가 여러 군데 나온다.

그중 가장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천뢰, 즉 하늘의 피리소리를 듣고 있는 남곽자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 옳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른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기 때문에 옳은 것이 있다.

결국 시와 비는 상대적이며 상호의존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그래서 성인은 시비라는 상대적 입장에 서지 않고 모든 대립을 넘어 선 절대의 진리인 자연의 조명에 비추어 본다.

그리고 커다란 긍정에 의존한다. 그것이 시비를 넘어선 명지이다.

 

- 문과 문틀을 연결시키는 문짝의 지도리는 텅 빈 부분(고리)에 끼워져야 한없는 변화에 대응한다.

두 추는 바깥과 안을 구분하지만 동시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이것과 저것의 상호대립을 없앨 수 있는 무차별의 세계에 대한 은유이다.

이것과 저것이 참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어야 한다.

도추는 상호의 차이를 인정함과 동시에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소멸시키고 서로 감응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저것도 무한한 작용을 할 수 있다. 이것은 밝은 진리의 입장에서 상대와 자기를 초월했을 때 가능하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나 개념은 사물을 지시하고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편이지, 사물이나 진리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언어나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그것으로 사물의 실상을 알 수 있다고 믿으면 착각이다.

 

장자사상의 중요한 특징은 인생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을 즈 자체로서 중히 여기고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지,

반대로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기계적 소모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나 개념은 사물을 지시하고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편이지 사물이나진리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언어나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그것으로 사물의 실상을 알 수 있다고 믿으면 착각이다.

 

- 조삼모사 이야기에서 우리가 살펴 볼 문제는 원숭이 주인의 수습방식이다.

 원숭이 주인은 잠시 어려운 상황임에도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즉 아침에 네알, 저녁에 세알을 제안한 점이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원숭이가 원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방식을 바꾸어 원숭이들과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원숭이들의 분노를 즐거움으로 바꾸기 위해서 원숭이가 옳다라는 생각에 근거해서 제안했다는 것이다.

 

- 열자가 장자에 나오는 조삼모사를 보고 써서 끝에 가서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능력있는 자가 없는 자를 농락함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성인이 지혜를 써서 뭇 어리석은 이들을 농락하는 것도 이와 같다.”

아마 열자의 이러한 편향된 생각 때문에 장자의 조삼모사 이야기가 교활한 저공과 어리석은 원숭이라는 식의 정치적인 이야기로

일반인들에게 잘못 인식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 도는 체험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고 모든 대립과 모순이 한데 엉긴 혼돈으로서의 도를 혼돈 그 자체대로 인정하는 것이 유일 절대의 가치가 있다.

이 절대의 가치를 인식의 세계로 끌고와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그 절대성은 상실되고 상대적 가치에 빠진다.

 

- 지금 우리들은 불행히도 도의 세계가 아니라 언어가 만들어낸 세계를 실제 세상인 양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럼으로써 온갖 구분과 구별만이 난무하는 허상 속에서 희로애락을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아니 불행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 맹자는 이른바 시비지심을 중시했지만 장자는 그것을 혐오하며 경계했다.

물론 복잡한 실생활에서는 명철하게 시비지심을 발휘해야 할 때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그래야 인생살이를 해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문제는 시비지심을 발휘하는 자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하나의 사태에 대하여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려 한다.

그리하여 시비지심 때문에 거꾸로 시비가 붙고, 그 결과 사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갈등만 더 증폭시키고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진다.

더욱이 실생활의 영역이 아니라 근원의 도의 세계에서는 조금이라도 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고요하고 순수히 하여 시비지심 따위로 오염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순수 근원의 세계에 까지 함부로 오염된 시비지심 혹은 분절지를 들이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분할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인위적으로 분할되고,

구별이 사라져야 할 곳에 구별이 끼어들어 근원의 순수 통합체가 회복되지 못하고 와해되어 버릴 수 있다.

장자는 시대적으로 맹자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으로서 그는 확실히 맹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맹자의 주의주장 중에 서도 특히 시비지심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맹자의 과도한 분절지에의 추구에 제동을 걸고 그 위험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시비지심을 끝까지 몰고 가면 마음이 지혜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은 경직되고 메마르게 되어 결국 죽음에 가까워지게 된다는 것이 장자의 경고이다.

이것은 지식 과잉인 현대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특히 주의해야 들을 대목이다.

 

여기 조삼모사 이야기에 등장하는 원숭이들이란 다름 아닌 시비를 가리는 일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마음이 경직되어 버린 사람,

다시 말해 죽음에 가까워진 마음의 소유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 원숭이들의 문제점은 두뇌는 빨라서 계산은 잘하는데 마음이 너무 비좁고 편협해서 전체를 보지 못하는데 있다.

조삼모사에서 전체 7 이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전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3혹은 4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서의 부분을 의미한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제물론에 있고 제물론의 핵심은 만물은 하나이다라는 경구로 압축할 수가 있는데

장자의 이러한 원대한 만물제동 사상에 필적할 수 있는 서양 철학자는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는댜.

왜냐하면 서양철학이라는 것 자체가 시대의 철학이지 영원의 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 대한 예외를 꼽는다면 스피노자가 있을 뿐이다.

 

- 제물론이란 만물이 하나인 근원적인 통일의 세계를 말하는 것인데

이 제물론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중국 철학의 최고봉으로 여기고 있고, 또 한 난해하기도 유명하다.

 

-중국에서 철학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영역을 개척한 사람은 노자와 장자 뿐.

 

- 소요유는 철학적 심포니의 서곡에 해당한다.

 

- 제물론은 인간의 인식에는 본질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중요한 테마로 삼고 있다.

 

- 장자의 제물론은 선불교로 들어가서 완전히 꽃을 피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인식이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시야를 넓혀한 차원만 더 멀리 보면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것인지 알게 된다.

장자는 제물론 전편을 통하여 지칠 줄 모르고 우리에게 인간의 자기 중심주의적 폐쇄성을 넘어서라고 요구한다.

장자는 천지 만물을 관통하는 근원의 도를 보기 위해서는 만사를 인간의 관점에서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의견일뿐이지 천지자연의 가 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새장 속에 갇혀 깃털을 뽐내는 새들처럼 먹고 마시는 데 만족하며 살아갈 뿐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사회가 진보할 것인가 그렇지 않고 정체될 것인가, 아니면 퇴보해서 결국 침몰할 것인가?

 

-자네 스승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마땅히 올 때여서 자연스레 온 것이고

자네 스승이 이 세상을 떠난 것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떠나는 것이지.

 

생명 중 다가오는 매순간은 편안히 마주하고 각각의 상황에 순응한다면 지나친 슬픔이나 한없는 기쁨이 자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수 없지.

옛 사람들은 이러한 경지를 가리켜 세속의 갖은 속박을 해소하고 본래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해탈에 이르렀다고 한다네.

 

-사람은 습한데서 자면 허리 병이 생기고 반신불수가 되는데,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은 나무 꼭대기에 매달리면 벌벌 떨며 두려워하지만, 원숭이도 그러한가?

사람과 미꾸라지와 원숭이, 이 셋 중에서 누가 올바른 거처를 제대로 아는가?

 

어느 경우에나 통용되는 영원한 진리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장자는 이 점을 분명하게 거부하고 있다.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이에 대한 뼈아픈 비판을 부드러운 해학으로 통쾌하게 풀어주는 이야기다.

 

인간이 좀 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안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올바른 지식이란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니, 스스로 알지 못하는 줄 안다는 것이 바로 앎이 된다는 것이다.

 

생태적으로 인간중심적 사고를 하는 우리 인간의 인식에는 필연적으로 오류가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결함이 내재되어 있는 데 그 결함의 한 복판에는 다름 아닌 우리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자들과 깨달은 현자들이 한결같이 우리의 인생이란 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자연의 결대로 조화하는 것....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비가 성했던 시기였다.

제자백가의 각 유파가 저마다 자기 학설이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처방이라며 쟁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처방에도 세상은 좀처럼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따라서 그 처방들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장자는 다른 유파들처럼 자신의 처방을 제시하며 그 옳음을 주장하는 대신에, 각 유파의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

또 그들이 겨루는 시비가 과연 진정한 시비인지를 철학적으로 검토하는 데 천착했던 것이다.

 

-유가와 묵가는 춘추전국 시대에 큰 세력을 형성했던 대표적인 학파이다.

이 두 학파의 논쟁은 역사적으로 퍽 유명한데, 묵가측에서는 창시자인 묵자 본인이 자신의 저서를 통해 유가의 공자를 비판했고,

유가 측에서는 공자의 계승자임을 내세운 맹자가 맹렬한 비판을 전개했다.

묵가의 주장은 이렇다. ‘지금은 전쟁 상황이다. 이 전쟁은 모든 백성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런데 왜 전쟁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이기심 때문이다.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고 자기 부모만을 섬기는 이기적인 마음이 남의 것을 빼앗고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려면 차별 없이 만민을 사랑하는 겸애와 이익을 함께 나누는 교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아껴쓰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피하기 위해 윗사람의 의견에 따르며 민생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유가의 공자는 관혼상제의 예를 너무 복잡하고 사치스럽게 만들었고, 비생산적인 음악을 중시했으며,

천명론을 내세워 나태한 기풍을 조성함으로써 백성을 운명론에 빠뜨리고 음란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자식을 사랑하고 자기 부모를 섬기게 되어 있다.

자기 자식과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자식과 부모를 사랑하며, 나아가 만민을 사랑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 묵가는 겸애를 주장하니 이것은 아비가 없는 것이요. 자기 생각만을 위하니 임금을 모르는 것이다.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면 금수나 다름없다. 이들의 헛된 도가 백성을 망치고 인의 도덕을 가리고 있다.

 

-이것과 저것을 마주 세우지 않고 별개의 근거가 없는 별개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의 상태를 일러 도추, 즉 도의 지도리라고 한다.

문을 여닫는 지도리는 중심의 둥근 고리에 자리하여, 사방으로 여닫히는 문의 움직임에 제한없이 응한다.

문의 운동, 즉 열림과 닫힘이 모두 지도리에서 일어난다.

지도리는 열림만을 옹호하거나 닫힘만을 선호하지 않는다.

지도리는 열리고 닫히는 운동의 근원이면서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문의 모든 움직임을 그 안에 담고 있다.

 

-도추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중심에 머물면서 모든 것에 응한다.

응할 뿐 판단하거나 해석하지 않으며, 그런 까닭에 시비하지 않는다.

 

장자는 벌도 나방도 아닌 나비를 우화에 다루었을까? 바로 4단계의 변형을 겪기 때문이다.

장자의 사상이 화이기 때문이다. 변화하라. 변형되라.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탄생하라.

장자가 말하는 화란 되어감의 세계이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도다.

 

- 마음과 몸을 문과 창이 없는 집처럼 일과 귀 등 모든 구멍을 닫고 외부를 좇던 주의력을 자신에게로 돌려야 하네.

그렇게 해서 더 이상 보고 듣는 것에 따라 흔들리고 동요되어 내면이 다치지 않게 해야 하네.

마음이 몸이라는 저택에 완전히 묵게 하여 부득이하게 움직임이 필요하고 반응해야 할 때에야 비로소 움직이고 반응한다. <공자가 안회에게>

 

- 모든 개별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말미암는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고 해석한다. 그것은 필연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입장에서 무제한으로 시를 주장하고 비를 주장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시비의 당사자일 때도 이런 사실을 쉽게 자각할 수 있을까?

 

상대의 주장이 상대의 시각에서 말미암은 상대의 옳음일 뿐임을 알아차리기는 쉽겠지만,

자신의 주장 역시 자신의 시각에서 연유한 자신의 옳음일 뿐임을 자각하고 인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터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옳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크고 작은 영역에서 시비가 그치지 않는 것을 듯싶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차원을 달리하는 사고이다.

자기의 시각을 객관화하면서 시비의 사태를 메타적으로 통찰하는 시각, 즉 이명(以眀) 말이다.

그렇다면 차별없는 이명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각자가 옳다고 생각하고 당위나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은 그 실상이 과연 어떠할까?

제각기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이 마치 도토리 개수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원숭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장자는 조삼모사의 우화를 엮어내어 이 문제를 따져 나간다.

모든 개별자들은 각기 자기에게 한 것을 가하다고 하고 자기에게 불가한 것을 불가하다고 한다.

각각의 입장에 따라 가와 불가가 달라지며, 가 불가의 타당성 또한 각각의 입장에서 확보된다.

그러니 절대적으로 가한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불가한 것도 없다.

(진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길이란 다니니까 생기는 것이다. 길이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유대인과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심지어 고대 이스라엘 왕들은 백성으로 하여금 돼지고기를 맛보기는커녕 살았건 죽었건 돼지고기를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 종교적 금기는 지금까지도 절대적인 당위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그 금기는 생태학적 필요에 따른 조치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소나 양처럼 풀을 먹는 반추동물들과 달리, 돼지는 곧 인간의 식량이기도 한 밀이나 옥수수, 감자, 콩 들을 먹기 때문에,

결국 먹이를 가지고 인간과 경쟁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매력적인 돼지고기 맛의 유혹을 잠재우고 돼지 사육을 금지하여 인간의 식량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위가 필요했고,

그 필요가 종교의 힘을 업어 당위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호랑이에게는 고기가 가한 것이고 소에게는 풀이 가한 것이다.

각자에게 마땅한 바, 各得其宜(각득기의) 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이다.

 

- 성인은 시비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인시라는 점에서 긍정하고 시비의 절대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부정한다.

이를 화한다고 한다. 한다는 것은 서로 조화 시켜 시비가 스스로를 풀어지게끔 하는 것이다.

문제 자체를 해소하려면 그 문제를 문제 삼는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것은 실상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즉 문제란 다만 필요에 의해 성립된 관념일 뿐, 끝끝내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어떤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소중히 아끼는 인형의 팔이 부러져 울고 있는 아이에게는, 인형의 팔을 고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차차 성장해가면서 그 인형이 더 이상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게 되면, 팔 고치는 방법을 찾는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형이란 영원불변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한때 지나가는 장난감이라는 실상을 어느새 자각한 것이다.

실상을 자각한 마음은 세상을 문제삼지 않는다. 자연의 조화로운 저울에 마음을 맡기기 때문이다.

 

*인간세편<장자를 읽어야 할 시간2/차이비밍 지음/마일스톤>

-지혜는 또 어찌 타인에게 발견되는지 아는가?

그것은 ...... 명성을 얻기 위해 덕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을 피할 수 없고, 사람과 다투고 논쟁하는 동시에 자네의 지혜도 드러나게 되기 때문일세. 누구나 얻고 싶은 명성이 사실 서로를 짓누르고 다치게 한다네. 한편 지혜라는 것은 바로 사람들과 각축하고 경쟁하는 도구라네. 명성과 지혜. 이 두 가지 불길한 흉기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게 할 수 없다.

 

-귀로는 외부 세계의 소리를 듣는 걸 멈추고, 마음으로는 주변에 따라 감정이 일렁이고 근심이 생기기를 그치며, 순순하게 몸속의 기운만을 감지해야 하네. 기라는 것은 내면이 텅 비고 깨끗하며 투명한 것으로 아무런 근심이 없을 때에만 비로소 세상 만사와 만물을 감지하고 대응할 수 있네. 또한 마음이 텅비고 잠잠하며 아무 생각도 걱정도 없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도가 나타나며 모일수 있네.

이와같이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는 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심재(마음의 재계)일세.

 

- 마음과 몸을 문과 창이 없는 집처럼 입과 귀 등 모든 구멍을 닫고 외부룰 좇던 주의력을 자신에게로 돌려야 하네. 그렇게 해서 더 이상 보고 듣는 것에 따라 흔들리고 동요되어 내면이 다치지 않게 해야 하네. 마음이 몸이라는 저책에 안전히 묵게 하여 부득이하게 움직임이 필요하고 반응해야 할 때에야 비로소 움직이고 반응한다.

 

- 사람이 은둔하면서 세상사를 묻지 않는 것은 비교적 쉽겠으나 힘들게 세상을 걸어가면서 마치 조금도 자취를 남기지 않고 하늘높이 유람하듯 상황을 초월하여 외부의 사물에 상처받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덕충부편 <장자, 마음을 열어주는 위대한 우화 / 정용선 지음 /간장>

 

- 장자가 말하는 도란 연속된 세상에서 각득기의에 따라 평등하게 거래하며 유전하는 존재의 과정을 칭한다. 그리고 덕은 도가 개별자의 마음 속에 깃든 것을 이른다. 그러니 '덕이 마음에 가득찼음을 나타내는 신표'라는 뜻의 "덕충부"는 곧 '도가 깃든 개별자의 마음', 달리 말해 '존재의 실상을 회복한 개별자들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덕충부"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덕충자-존재의 실상을 회복한 개별자-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기형이나 불구의 몸인 반면, 덕이 부족한 사람들은 모두 번듯한 외모와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대비는 장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데, 즉 형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존재의 실상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존재의 실상을 회복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형에 집착하는 마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 장자의 관점에서 형(외형)이란 우리가 잠시 묵어가는 숙소와 같은 것이다.

 

- 왕태는 위엄있는 태도로 가르치지도 않고, 친밀하게 둘러앉아 담론하지도 않는다. 즉 사람들에게 어떤 고원한 가르침을 내리지도 않고,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에게서 무언가를 가득 얻어간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는 왕태의 거울같은 마음이 행하는 작용과 관련된다. 사람들은 왕태를 보면서, 마치 거울을 보듯 자신의 모습을 본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출뿐 칭찬하거나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며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 사람들은 흐르는 물에 비추지 못하고, 고요한 물에만 비출수 있다.

 

- 왕태를 성인으로 칭하면서 시작되었던 공자의 설명은, 이제 왕태가 승천할 것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왕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 즉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으되 존재의 실상에 닿아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와 제 모습을 비춰보는 것이다. 그는 결코 사람을 모으는 일에 신경 쓸 사람이 아니다. 저 태산은 그저 높고 수려한 모습으로 존재하면서 사람과 사물을 품을 뿐이다. 사람들이 산을 찾는 것이지,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장자가 자신의 우화에 공자를 등장 시키는 것은 일종의 패러디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패러디를 이해하려면 본래의 텍스트나 자료를 알아야 하듯이, 우화 속의 공자를 이해하려면 공자의 실제 행적을 조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공자는 유가의 큰 스승으로, 요순의 도를 계승하고 우,탕,문,무,주공의 행적을 정리 집대성하여 유학으로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그는 선을 택하여 굳게 지키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를 수행하는데 살신성인의 태도로 임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천하를 바로잡고자, 수레를 타고 중국 대륙을 돌며 자신을 써줄 군주를 찾아다는데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숙을 열고 제자를 길렀다. 그런 삶을 공자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60세가 되자 듣고보는 대로 세상을 수용하게 되어 귀가 편안해 졌고(이순) 70세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런데 공자의 이런 행적이 장자의 눈에는 다른게 보였던 것 같다. 세상을 바로잡아 평안케 만들기는 커녕, 인의에 얽매임으로써 되레 스스로의 삶을 평생토록 수고롭게 만드는  듯 보였던 모양이다. 마치 손발에 수갑을 찬 탓에 자유롭고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수형자처럼 말이다. 그러나 공자의 손발에 채워진 수갑'인 인의는 곧 공자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요. 그러니 그 수갑은 결국 공자 스스로가 채운 것이다. 즉 공자 자신의 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성심이란, 결국 존재의 실상에 다름 아닌 인시이다. 즉 성심 자체도 자연이르는 말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인의에 얽매여 수고로운 공자의 모습을 '천형'이라고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유념할 것은, 장자의 의도  자체가 공자를 평가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의도는 아마도, 우리 안에서 굳어져 있는 관념, 즉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강고한 관념 자체가 질곡처럼 우리 자신을 구속하고 있으며, 이는 결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의해 비롯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 애태타는 장자가 지어낸 가공 인물이다. 애는 슬프다는 뜻이고 태는 어리석고 둔하다는 뜻이며 타는 낙타의 등을 가리키니, '애태타'라는 이름은 곧 '슬프고도 어리석고 둔한 곱사등이'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애태타를 좋아한다.

 

-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상황들, 즉 삶과 죽음, 존속과 멸망, 사회적 성공과 실패, 경제적 부유와 궁핍, 잘남과 못남, 훼방과 칭찬, 배고픔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등은 어떤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끈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인력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또 분별적인 지식으로는 헤아릴수없는 자연적인 존재과정이다.

 

- 지금까지 덕충자로 등장한 인물들, 즉 왕태와 신도가, 숙산무지, 애태타는 모두 정상인들과 다른 불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덕충자인 인기지리무신과 옹앙대영 역시 마찬가지인데, 앞선 인물들이 지닌 여러 불구의 특성에 몇 가지를 더하여 조금 심한 모습이다.

 

- 인기는 다리가 구부러지고 걸을 때 발꿈치가 땅에 닿지 않는 절름발이를 뜻하고, 지리는 곱사등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무신은 입술이 없다는 뜻이니, 이른바 언청이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인기지리무신은 괴이하게 생긴 외모를 따서 그 이름을 지은, 장자가 만들어낸 가공인물이다.

 

- 온갖 감정을 거울같이 비출 뿐, 그런 감정을 소유하거나 저장하여 더 큰 감정으로 비화시킴으로써 자기 감정의 노예가 도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대종사편

- 도에는 인위적인 것이 없다. 도는 무위이며 자연이다. 여기서 자연이란 산천초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위가 개입되지 않은 '스스로 그러함'을 말한다.

 

- 장자는 궁극의 대종사로서 도를 제시하고 있지만, 도는 너무 추상적인 것이라서 통상의 범인들이 이를 따르기는 쉽지 않다. 그리하여 장자는 이러한 도를 터득한 사람을 현실적으로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 그가 바로 진인, 즉 참 사람이다. 장자의 철학은 진인의 철학이다. 동양철학은 '진인'의 개념없이는 논의될 수가 없다. 이 '진인'의 창안자가 장자이다.

 

- 장자는 잠잘 때 꿈을 꾸는 것은 깨어 있을 때 근심이 많은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진인은 잠잘 때 꿈을 꾸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깨어 있을 때 아무 번뇌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 무위는 노자에서 시작하여 장자에서 꽃을 피운, 도가 철학의 개념이다.

 

- 도에는 어떤 비법, 어떤 방법도 없다. 굳이 비법을 논하자면 오직 '무위'만이 진정한 비법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도무문'이다.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것을 통과하지 못한다. 왜냐? 사람들은 이미 열려 있는 그문을 또 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열기 위해 없는 문을 만든다. 그들은 없는 문을 만든 다음 열쇠를 찾아 다닌다.

 

- 장자가 조철을 위해 무려 3단계의 초월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라. 이것은 존재의 껍질을 3차례나 벗겨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여 우리는 비로소 내부의 빛, 즉 조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 방지외란 영역의 바깥을 뜻하며 통념의 세계를 벗어난 세계이며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출세간의 세계이다.

 

- 장자의 '가탁의 철학'은 말하자면 뭇다의 '공의 철학'과 같은 것이다. 붓다는 반야심격에서 자신의 사상을 '색즉시공'이라는 한마디 말로 압축하였는데 이것의 의미는 '형체는 본래 거짓'이라는 뜻이다.

 

*응제왕편

-장자는 항상 균형감을 염두에 두었다. 장자는 추상적인 관념의 유희에 머물지 않고, 절대의 세계에 관한 논의 다음에는 반드시 현실 세계에 관한 논의를 진행 시켰다. 절대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들로는 <소유요><제물론><양생주>를 들 수 있으며, 현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들로는 <인간세><덕충부><응제왕>을 들 수 있다. 다만 스승을 찾는 <대종사>는 절대의 세계에서도, 현실이 세계에서도  공히 중시 여겨야 할 사랑이라 중간 적 성격의 것이라 볼 수 있다.

 

- 장자가 철인왕을 평가하는 심사기준은 플라톤이 최종기준으로 제시했던 '선의 이데아'마저도 뛰어넘는다. 

 

- 접여는 원래 초나라의 현인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다. 그는 실제로 미치광이로 가장하여 세상을 들지고 살았던 은자이다. 접여의 이야기는 본래 공자의 <논어>에 나온다. 논어 <미자>편을 보면 미친 사람 접여가 등장하여 공자에게 '권력을 좇는 자는 위태롭게 될 것'이라며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장면이 나온다. 도가들이 보기에 너무 멋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장자는 아마 이 장면에서 영감을 얻어 광접여라는 케릭터를 여러차례 자신의 책에 등장 시킨 것이 아닐까? 장자에서 광접여는 여러모로 장자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주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 광접여는 바로 장자 자신이다.

 

- 노자가 말하는 철인왕의 핵심 덕목은 무위이댜. 무위란 아무것도 행하지 한는 것이 아니다. 즉 무위란 무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엄격히 말해 무위는 개인의 행동양식이 아니라 존재양식이다.<장자 영혼의 치유자 / 차경남 / 미다스북스>

 

 

<장자 영혼의 치유자 / 차경남 / 미다스북스>

<장자 쉽게 읽기/이시헌/문사철>

<장자를 읽어야 할 시간/차이비밍/이한님 옮김 /마일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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