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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탈리아 - 시에나 이야기2

아침 일찍 일어나

성당을 둘러서 캄포 광장으로 갔다.

어제 사람들로 북적였던 풍경과는 달리 텅빈 충만함이 가득했다.

말들이 달릴 진흙 길 위에다 연신 물을 뿌리고 있었고 경찰들도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한 쪽에선 흙을 퍼 나르는 차도 보인다.

 

이제 이곳에서 흙 먼지를 날리며 자기 콘트라다를 대표하는 말과 기수들이

힘차게 달릴 것이고 사람들은 격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여기저기 안내 포스터도 붙어있고 좋은 자리는 높은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광장 가운데에선 무료 관람이 가능한 곳인데 수 만명의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였다.

상가엔 예년에 벌어졌던 경기 모습의 사진과 그림이 걸려 있곤 했는데

달리는 말들의 모습 뿐 아니라 모여든 사람들 모습도 장관이었다.

 

그런데 여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트랙에 막혀 있어서

나가고 싶어도 퍼레이드 시작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못 나가는 거 아니야?

물을 뿌린 곳에는 사람들이 밟지 못하게 줄을 묶어 막아놓고 있었다.

경찰이 내게도 그만 나가 달라고 손짓을 한다.

 

광장을 나오니 상가 골목에는 팔 물건들을 실어온 차들과

청소하는 차들이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그들의 할 일을 빠르게 해 치우려고 분주하였다.

가게들 마다 안에 있던 탁자나 테이블 의자들을 밖으로 내 놓고 손님 맞이 중이고

빵 집에선 고소한 냄새를 풍기면서 이른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제 산 칸투치를 깨물어 먹었다.

두 번 구워서 단단해서 마치 단단한 비스켓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아몬드가 들어 있고 보관성을 높이기 위해 두 번 구워 만들었단다.

 

전망대에 혼자 올랐갔다. 400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와야 한다.

낯선 도시에서 가능한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은 필수 코스처럼 여겨진다.

부챗살처럼 펼쳐진 광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멀리 성 밖으 모습이 보이는데

우리가 있는 곳은 성 안이고 멀리 성 밖으로는

그들의 일상 생활을 하는 집들이 우리네 연립 주택 같은 건물들이 보였다.

시에나시의 많은 시민들이 성 밖에서 살면서 낮이면 관광객들을 상대로 성 안으로 들어와 장사를 하는 것이다.

 

관광객 입장에서 보는 시에나는 성 안의 모습이 전부 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 같았다.

내려다보려니 까막득히 아래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집사람 모습이 보였다.

소리를 한 번 질러 불러 보았지만 못 들었는지 반응이 없다.

더 이상 소리지를 상황이 아니라서 한 번으로 그쳤다.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한 한국인 모자가 올라가는데 앞서가던 아들이 뒤에 오는 엄마가 걱정되는지

"엄마~괜찮으시겠어요?"하고 묻는다.

아직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해 보이는 아이가 엄마 걱정을 한다.

그러자 엄마는 "그럼~내가 여행 오려고 체력 단련을 했잖니~"하며 걱정 말라고 말한다.

단련하지 않았어도 걱정 해주는 아들과 함께라면 없던 힘도 생기리라.

 

시에나는 산 위에 형성된 도시이다 보니 오르내리는 경사진 길들이 많았다.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는 곳을 찾아가서 내려갔다가 성 밖까지 나오게 되었다.

"지난 번 동생과 함께 왔을 때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줄 모르고 힘들게 내려왔다 올라갔더니 글쎄

이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던거야 ~~얼마나 약이 오르던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까지 내려 와서는 성 밖으로 걸어서 더 내려갔다.

올라갈 땐 버스 타고 올라가면 된다고 별 걱정없이 마냥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버스 티켓 파는 곳이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없었다.

누구한테 물어보나 하고 서 있는데 마침 한 아주머니가 버스를 타려는지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물어보니 버스 안에서도 요금을 받는다고 하였다.

 

내가 좀 더 내려 갔다가 올라오니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인도 여자처럼 보였는데 스리랑카 사람이라고 하였다.

놀랍게도 스리랑카 아주머니는 한국에서 1990년대에 2년 간 대구에서 미싱일을 하면서 살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손을 꼽아보더니 "20년 정도 지났네요." 하며 참 오래 전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나이가 40대로 보였는데 그러면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 우리 나라에 온 것이었다.

 

한국 말을 할 줄 아느냐니까 오래되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서

'안녕하세요.~~'와 '오빠'라는 말은 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인상이 좋고 곱게 느껴져서 거칠고 심하게 세상 풍파를 겪은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대구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인사치레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리 나쁜 인상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어느 호텔에 묵고 있느냐고 물어서 우린 아파트에 묵고 있다고 말했다.

 

버스 요금은 1.5유로 인데 버스 안에서 기사에게 내려니 2.5 유로를 받았다.

티켓 없이 타는 사람이니 1유로 정도는 당연히 기사의 수고비로 지불 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버스 기사가 잔 돈이 없다고 난감해 하는 것이었다.

스리랑카 아주머니에게 부탁하려는데 버스 기사가 잔돈을 찾았다며 거슬러 주었다.

종점에 내려서 스리랑카 아주머니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다시 이태리로 또 그 사이 어떤 나라에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로 떠돌며 사는 저 아주머니의 삶은 어떤 삶일까?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얼마나 클까?

그래도 고생스럽게 살아 맘고생을 많이 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총총히 아주머니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려는데 벨이 울린다.

아주머니 둘이서 청소를 해 주러 왔단다.

지난번 피렌체에서는 일 주일간 한 번도 청소를 해주지 않아

우리가 청소하고 수건도 우리가 빨아서 썼었다.

그래서 당연히 여기서도 청소는 해 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매일 청소를 해 준단다.

우린 타올 교체만 부탁 하였다.

 

 

시에나 만자의 탑에서 내려다 본 캄포광장 - 광장 주변을 빙 둘러서 말들이 달릴 길에 흙을 깔아 마치 트랙처럼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 그림자가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