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밑줄긋기

열정과 결핍

 

 

- 이윤기를 읽을 때는 건조한 산악지대의 쿠르드족이 연상되었고,

진중권의 냉소 속에는 홀로 소꿉놀이하는 어린애가 있었다.

개구쟁이조영남은 기실 냉정한 승부사인 듯 했으며, 박진영의 자기 몰입에는 창조적 조울증의 징후가 엿보였다.

 

그러나 이는 환영일 뿐, 피와 살과 척수가 없었다.

미리 접한 자료들에서 발견 해 낸 미세한 균열, 혹은 채 감추지 못한 영웅심과 자기연민,

위선, 위악, 상처와 콤플렉스들을 은밀한 무기 삼아 비로소 그들과 마주 앉았다.

그들의 어깨와 걸음걸이에는 육체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곧은 척추에선 강인함이, 서늘한 목덜미에서는 살아온 말만큼의 긍지와 외로움이 엿보였다.

손가락은 거울과 같아 그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어령의 결벽과 조순형의 수줍음, 박재동의 심미주의를 웅변한 것은 그들의 입이 아니라 손가락이었다.

 

*이윤기*

 

제가 농사에는 지진아 수준이었어요. 일상사도 마찬가지...

잊거나 깨트린다거나....한편 할머님은 절 맹기니 아성이니 하는 별명으로 부르셨는데

어쭙잖지만 맹자가 될 기가 있다. 맹자 버금가는 성인이 될 거라는 뜻이었겠지요.

 

전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이 어떤 건지 몰라요.

주위에는 아비 없이 자라는 저를 가엾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죠.

하지만 전 별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어요.

근데 입주 과외를 하면서 보니 아버지란 사람들이 화수분이에요.

은행을 끼고 사니, 아들이 달라면 그냥 돈이 막 나와요. 거 참 무지하게 편리해 뵈데요.

그런 기억 때문일까.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돈 부칠 때가 가장 기분 좋고, 참으로 아비 노릇 한 듯하여 가슴 뿌듯하단다.

 

-왜 그다지도 머릿속에 많은 지식을 몰아 넣고 싶어 했죠?

 

글쎄...일단 알고 싶었어요.

여기에 뭐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책이든 무엇이든 놓을 수가없었어요.

감자줄기 캐듯 한없이 파고들었죠. 그게 참 재미가 있었어요.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외기만 했나 몰라요.

사전 통째로 외우기, 교향곡 통째로 외우기, 돌이켜보면 참 천박한 짓인데 말이죠.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체하고 싶었나? 경제적 열등감을 지적 허세로 만회하고 싶었나?

꼭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다만 이런 건 있었어요. 나의 현재는 비참하다. 그러나 붙자!

하여튼 매일 밤낮을 치유 불가능한 과대망상과 치유 불가능한 열등감 사이에서 방황하던 날들이었죠.

 

-1학년 때는 번쩍번쩍하던 성적표가 3학년이 되어서 바닥 수준이었다.

학교 공부래 봐야 결국 서울대 들어가자는 건데...그건 아니다. 싶었어요.

서울대? 그거 며칠만 쪼르르 하면 되겠지 하는 자만심도 있었는데 나중에는 아예 관심이 없어졌지요.

문학 병이 단단히 들었거든요.

생활이 어려워 야간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담임이 너 같은 쓰레기가 수석을 하다니, 역시 경북중은 좋은 학교....하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친구들 사이에서 일등과 꼴등을 맘대로 하는 녀석이란 평가를 듣던 그에게 교사의 폭언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는 지금도 그 교사를 용서하지 못한다.

 

 

*황석영*

 

-출소 8개월 후쯤 한 인터뷰를 보니

인생에는 정말 중요한 만남이 몇 안 된다.’하는 다소 관조적인 감상이 실려 있던데요.

 

...그건 이런 걸 거예요. 망명 감옥 생활로 제가 근 10년을 한국사회와 떨어져 있었잖아요.

특히 감옥 생활은 그게 죽음이랑 같은 거더라구. 세상은 다 잘 돌아가는데 나만 쏙 빠져 있잖아.

그러다보니 이전에 가치를 뒀던 인간관계, 사회관계에 냉혹해지더라고요.

다 별거 아니다. 하는 지금도 그 영향이 커요.

섭섭해 하는 후배들이 많죠.

하지만 그때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면 출소 후 이렇게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우선 몸이 갔을 테고, 김남주 봐요. 여기저기 휘둘리다 아깝게 갔잖아요.

 

열정과 결핍

  <열정과 결핍/웅진닷컴/이나리>

'밑줄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수의 생각법  (0) 2018.12.12
마음일기  (0) 2018.02.24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0) 2018.01.04
터키 공부하기  (0) 2017.12.09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0) 2017.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