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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공부하기

터키는 아시아인에게도 유럽인에게도 친숙함과 동시에 낯선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 로마 문화를 보기 위해 터키를 방문하는 유럽인들은 도시 유적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뿌리를 확인할 것이요,

전 세계 인구 가운데 20~25%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들은 500여 년 이상을 이슬람을 대표했던 나라로 터키를 기억할 것이다.

 

터키는 문명의 교차로이자 용광로다.

또한 오랜 세월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충돌하고 뒤섞이는 가운데 공존과 화해를 이루고 있는 나라다.

어떻게 이런 공존과 화해가 가능했을까? 끊임없는 전쟁과 테러에 시달리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터키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터키 면적 한반도의 3.5

인구 7천이백만 언어 터키어

민족 튀르크족 90%

종교 전국민의 99% 이슬람교도 수니파 다수 시아파 소수 헌법상 정치와 종교의 분리됨

 

지금 터키인이 살고 있는 땅은 투르크 족이 이동해 오기 훨씬 전부터 수 천년 동안 유럽인들이 그리스, 로마제국 비잔티움 제국을 세우고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그리스 로마의 옛 유적과 유물이 원래 모습 그대로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 터키이기도 하다.

가는 곳마다 모스크가 있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아잔(예배시간을 알리는 소리)이 울려 퍼지는 이슬람 국가지만, 동시에 초기 기독교의 7대 교회가 있는 나라다.

작은 분수를 사이에 두고 기독교를 대표하는 성소피아 성당과 이슬람교를 대표하는 블루모스크가 서로 마주보고 서있다,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충돌하고 뒤섞이는 가운데 공존과 화해를 이루고 있는 나라. 터키

 

-터키인 스스로 유라시안이라고 부른다.

 

-전국토의 97%가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여전히 중심지는 유럽 쪽이다.

 

-차탈회위크는 요르단과 함께 현재 박굴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집단 주거지.

 

-인류최초로 철을 사용한 히타이타

 

-로마제국의 가장 대표적인 도시 에페스에는 황제가 기증한 건물이 3개나 있을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원형극장, 도서관 공중 화장실 등을 갖춘 도시 건물은 로마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데린쿠유 : 깊은 우물이란 뜻을 가진 말로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어가서 만든 생활공간으로 개미집처럼 끝없는 미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기독교가 가장 먼저 뿌리내린 터키...바울...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초기 기독교 성지가 많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기독교 초대 교회 7곳은 모두 터키에 남아 있다. 오늘날에도 초기 기독교의 성지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콘티탄티누스 황제가 꿈에서 본대로 모든 방패와 군대 깃발에 십자가를 걸고 싸우라는 계시대로 해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내게 승리를 주셨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을 숭배할 것이다.” 라고 하며 전쟁터에서 돌아온 대제는 기독교를 믿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일요일을 공휴일로 정했으며 박해 중에 몰수된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었고, 성직자를 우대했다.

313년에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십자가형을 당하거나 콜로세움의 사자 밥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즉위할 무렵 로마제국은 점점약화되어 새 기운을 불러일으킬 곳으로 비잔티움 선정하고 330년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로....로마제국의 중심지는 더 이상 이탈리아가 아닌 것이다.

이후 로마제국은 더욱 힘이 약화되어 395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로 분리됨.

 

-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나 동로마제국은 이후 1000년을 유지...이러한 동로마제국을 비잔티움제국이라고도 부름.

 

-527년 유스티아누스 황제 즉위 때 돈으로 관직을 사고 파는 제도를 폐지하고 군중들에게 인기 있었던 전차 경주도 폐지시키고 빵을 무료로 나누어 주지도 않았다.

그러자 폭동이 일어나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인구 1/6이 죽음.

 

-유스티아누스 집권 시 번창하고 성소피아 성당도 이때 세워짐...

법전도 만들어서 로마제국의 번성을 재현하는 듯했으나 그의 사후 황제의 권위가 점차 약해짐

 

-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1000년의 역사를 지닌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고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뀜.

이제 터키 땅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비잔티움 문화권에서 튀르크족의 이슬람 문화권으로 넘어가게 됨.

 

-모스크 내부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의 원리에 따라 성화를 그리기 않고. 기하학적인 아라베스크 무늬를 넣은 타일을 붙여 벽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덕분에 모스크를 장식하는 타일과 바닥에 까는 카펫을 만드는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십자군 전쟁......

1071년에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마저 공격당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야만족의 침략으로 기독교 세계가 무너지고 있소. 저들을 물리치고 동방의 기독교 문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이 같은 요청을 받은 교황은

모든 교회를 교황청에 속하게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야.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에게서 되찾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 엄청난 업적을 쌓는 것이기도 하지....’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성지일 뿐 아니라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한 이곳을 되찾기위한 전쟁.

 

교황의 호소로 약 200년 동안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조직된 십자군은 제 1차를 제외하고는 예루살렘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제 4차 십자군 때는 같은 기독교 세계인 비잔티움을 약탈하는 등 원래의 의도를 벗어났고 아나톨리아 반도는 십자군의 주요 이동통로가 되어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

 

-룸 셀주크 시대에 콘야에서는 메블라나가 만든 춤이 널리 유행했다.

메블라나가 활동할 당시인 13세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랍어로 쓰인 쿠란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슬람교를 전차할 수 있을 까 고민하다가 세마춤을 만들었다.

메블라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여러분, 중요한 것은 쿠란의 내용이 아니라 신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쿠란을 읽거나 그 뜻을 배우지 않아도 신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연설했다.

그러고는 세마 춤을 추어 무아지경에 빠지는 순간 신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세마 춤은 자유뷴방한 유목 민족의 기질을 가진 튀르크 족에게 잘 어울렸다.

게다가 메블라나는 이슬람교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사람들이 이전부터 가져온 종교나 관습을 존중했기 때문에 세마춤과 이슬람교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세마춤은 이슬람교를 민중에게 전파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룸 셀주크의 전성기는 1230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동방에서 예상하지 못한 강력한 적이 나타났다. 그 옛날 튀르크 제국의 발상지였던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 제국이 서아시아를 거쳐 아나톨리아에까지 밀려든 것이다.

 

-몽골 덕분에 룸 셀주크의 왕조는 1308년까지 이어졌으나 술탄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각 지역의 튀르크 족은 점차 떨어져 나가 곳곳에서 크고 작은 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세워진 수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가 오스만이 세운 오스만 공국이었다.

 

-라마단 :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로 이 기간 동안은 신에 대한 감사와 속죄를 위해 해가 뜰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식사 흡연, 음주 따위를 금한다.

 

-터키인들은 무슬림으로서 평생 동안 신앙 고백, 기도, 단식, 희사, 메카 순례라는 다섯 가지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

 

-발칸 반도를 차지한 무라드 1세는 확장된 영토에 세금을 매기고 병사를 동원했으며 포로나 유목 민족들을 정착 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사람들이 고향에 그대로 살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원래 살던 지역과 배치되는 곳으로 옮겨서 살게 하라.

그리고 포로로 잡힌 기독교인 중에 우수한 자는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 군사로 쓰도록 하라.”

이렇게 아시아인들이 유럽으로,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강제로 생활 터전을 옮기면서 나라 안에는

튀르크 인과 그리스인, 불가이라인, 세르비앙인등 다양한 언어와 종교를 가진 민족이 뒤섞여 살기 시작했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지 1000년 만에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차지하면서 동방 무역을 담당하자. 서유럽의 여러 나라는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이 앞장서서 신항로 개척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모스크로 변한 성 소피아 성당....모자이크 벽화를 벗겨내지 않고 그 위에 회칠을 함으로써 성소피아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실 이슬람교를 믿으며 머나먼 몽골 초원에서 이주해 온 소수의 튀르크 족이

기독교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발달된 문명을 누려오던 비잔티움 제국의 옛 영토를 다스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이슬람교 아시아인과 유럽인이 만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고 어려웠다.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대립을 잘 조율하고 융합하는 것은 제국의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메호메트는 바로 이런 문제를 밀레트 제도를 중심으로 현명하게 풀어낸 것이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허용함으로써 공존을 꾀한 메흐메트 2세의 포용정책은 오스만 제국이 600년 역사를 이어오는 원동력이 되었다.

 

-제대로 훈련된 직업 군인....예니체리부대..영토 확장에 앞장서다.

 

-터키에서는 시장을 바자르라고 한다.

-카펫의 발생지는 터키

 

-도자기로도 유명한 터키 이즈니크 도자기...

 

-유럽을 떨게한 오스만 제국...16세기에도 영토 확장 게속 하지만 술래이만이 세상을 떠난 뒤왕위 계승 문제로 대립하면서 정체됨.

오스만 제국은 셀림 1세와 아들 술래이만 1세 때 전성기를 맞이함.

 

-아프리카 북부....이집트...세르비아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터니 바그다드 아르메니아 흑해 연안..

시리아 예루살렘...아르메니아 등이 속국이나 정복지임....동지중해를 오스만의 호수라고 할 수있을 정도로 방대한 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

 

-153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무슬림가구 58% 기독교 32% 유대교 10%를 차지하였고

이들은 서로 언어 풍습 문화들이 달라 다스리기 힘들어서 <술레이만 법전>이 탄생한 계기가 됨.

법전의 취지는 이슬람교도이든 튀르크 인이든 상관없다.

법은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고 정의로운 것이다는데서 출발함.

 

-레아야라고 불리는 피지배층은 모두 세금을 냈으면 비 이슬람교도들은 특별 인두세를 추가로 냈고

비 튀르크인과 비 무슬림도 공을 세우거나 하면 지배층이 될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유럽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고 이것이 바로 오스만의 원동력이다.

 

-제국의 황금시대...길드의 번영

 

-건축가 미마르 시난 오스만 제국의 문화를 꽃 피우다.

시난은 튀르크 인이 아님에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믿어준 술탄의 기대에 부응해 멋진 모스크를 지음. 99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0여개의 기념을 건립

 

-하렘 : 무슬림 여성들이 생활하는 공간

술래이만의 아내 록셀란의 정치 개입을 하면서 하렘의 정치 개입으로 .....

다른 지체 높은 여성들의 갖은 음모와 술수 하렘은 술탄 이외에 거세된 자들만 출입 가능

하렘은 전통적으로 술탄의 어머니가 관리했다.

술탄의 아이를 낳은 여성에게는 방도 여러 개 주고 하인들의 시중을 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술탄을 만날 기회조차 없이 살다가 술탄이 죽으면 다른 처소로 옮겨서 쓸쓸히 생애를 마감함.

 

-본래 오스만 제국의 왕위는 큰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누구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는 술탄이 되었으나

연장자 상속으로 바뀌면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으며 더 이상 영토 확장을 하지 않고 유지하는데 힘쓰자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 가문이 나라를 운영하게 됨

 

그전에는 술탄이 되지 못한 자는 살해당했음. 술탄이 되지 못한 형제는 세상의 질서를 위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히 됨.

어떤 술탄은 즉위 하자마자 19명의 형제를 모두 죽이기도 했다.

이 당시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하렘이 정치 개입등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기도 함.

 

-성소피아 성당 맞은 편에 우뚝 서 있는 블루모스크....

미나레트 6개에 얽힌 이야기 6은 알트 황금은 알툰....황금으로 만들라는 말을 6개로 알아들었다는.....

 

- 루이 14세 당시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방문한 오스만 외교 사절들은 발달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함....

이스탄불에 당시 서구화의 상징으로 튤립을 심었기 때문에 17181730년 사이를 튤립시대라고 한다.

개혁이 예니체리 부대의 반대와 보수 세력들의 반대로 개혁은 계속 실패로 돌아감.

 

-커피를 마시는 카웨가 이스탄불 곳곳에 등장...오늘날 카페의 기원

비엔나 커피...오스만 제국의 군인들이 빈에서 급하게 후퇴하면서 버리고 간 자루에 담긴 커피가 서구에 전해지면서 만들어진 것.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지자....여기저기 속국의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 불가리아,

 

-돌마바흐체 궁전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서 지음.

 

-연합진보위원회(청년 튀르크 당)이 혁명을 일으킴....

이에 오스만 제국은 의회를 구성하고 입헌 정부를 세움으로써 근대회를 향해 한걸음 성큼 나아갔다.

유럽에 제국주의적 침략 아래 아시아나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식민지로 전락할 때

오스만 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국가를 세우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다.

 

-이 당시 개혁을 추진할 당시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발전 방향을 둘러싸고

오스만 주의, 범이슬람주의, 범투란주의, 튀르크 주의와 같은 수많는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아랍지역에서는 와하브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는 제창자 압둘 와하브의 이름을 딴 이슬람교의 민족운동 모든 종파를 반대하고

금욕주의와 초기 이슬람교로 되돌아가자고 강조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튀르크 민족성의 동질성을 찾고 스스로의 국가 건설에 공감하면서 튀르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무함마드같은 이슬람 식 이름대신 오스만 같은 튀르크식 이름을 지어 주었다.

튀르크주의는 발칸 전쟁과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튀르크인이 터키국가를 건설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 두차례의 발칸 전쟁에서 모두 패하면서 유럽쪽 지역 대부분을 잃게 되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 민족적으로는 튀르크인이라는 동질성이 높아짐.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공격함.

하지만 패전국이 되고 말았다. 오스만 280만 병사 중 325천명이 전사하고 패전국으로서 연합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했다.

이 조약으로 영토가 축소되어 현재의 터어키 국가의 영토가 됨.

 

-반성해야 할 터키 역사....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차세게대전당시 50만명이 목숨을 잃음...아르메니아인들은 150만 명이라고 주장)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협력해서 터키를 공격하려했고, 동부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이를 미리 막기 위해

어쩔 수없이 추방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살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인다.

 

-무스타파 케말....독립운동을 이끌다.

술탄은 영국으로 망명하고 터키는 사실상 공화국이 되고 이슬람의 종교적 지도자인 칼리프만 남게 되었다.

케말이 그리스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둠. 이스탄불과 인근 해협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음.

 

1차 세계대전의 영웅 케말은 터키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해마다 그가 숨을 거둔 시간인 1110일 오전 에 전국에서 사이렌이 울리면 차와 사람들은 모두 멈추고

그를 기리는 묵념을 한다. 앙카라에는 그를 기리는 거대한 묘지가 세워져 있다.

그의 초상화는 관공서와 학교뿐만 아니라, 동네의 조그만 구멍가게에도 걸려 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원이나 큰 거리에는 거의 빠짐없이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터키 지폐의 앞면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대도시의 큰 거리 대부분은 그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초대 대통령이기도 하다.

 

-작고 사소한 것조차 이슬람식을 버리고 서구식으로 바꾸었다.

강압적인 방법 때문에 반발이 따르긴 했지만 이로써 터키는 이슬람 국가 가운데 가장 서구화 된 나라가 될 수 있었지만

아직도 이슬람주의자와 세속주의의 대립하고 있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은 유럽연합 내의 다른 나라들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겉으로는 터키의 민주화와 인권문제를 이유로 들지만, 실제로는 터키가 유럽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터키가 기독교 문화와는 다른 이슬람 문화를 가지고 있고, 지리적으로 영토의 대부분이 아시아 대륙에 있어 아이아인지 유럽인지 모호하며,

경제 수준도 유럽의 다른 회원국들보다 낮기 때문이다.

유럽 연합의 가입에 대해 터키 내부에서도 찬반 논쟁이 거세다.

찬성론자는 유럽연합 가입으로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반면,

반대론자들은 오히려 유럽 연합 내 선진국의 자본이 터키 경제를 지배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경계한다.

 

-현재 유럽 연합은 터키의 가입조건으로 쿠르드 족의 인권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차이와 케밥

 

-고대 그리스인은 도시국가 비잔티움을 세웠으나 로마와 페르시안의 점령을 받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면서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처음 읽는 터키사/전국역사교사모임/휴머니스트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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