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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생선가게 좌판에는 여러 생선들이 있다.

그 중에 어떤 생선을 고를까? 고등어를 고를 수도 있고 꽁치를 고를 수도 있다.

고등어를 골랐다면 할 수 있는 요리는 고등어 조림, 고등어구이....등등 고등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꽁치를 골랐다면 역시 꽁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양반 중심 사고의 기록인 것이다.

 양반이 보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마치 고등어를 골랐다면 그것이 할 수 있는 요리가 고등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저자는 역모 사건에서 중인이나 평민들에 초점을 맞추고

실록에서 양반이 중심 인물로 기록된 것과는 달리 역모사건의 중심인물이 평민과 중인들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오징어를 골라 살짝 익혀서 초고추장으로 안주를 만든 느낌이 든다.

 

하지만 책을 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황구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황석영이 장길산을 쓰듯 썼다면 훨씬 맛있는 해물요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저자가 소설가가 아니라서 조금 박진감이 떨어지는 글이 된 듯하다.

 

 

 

왜? 하필.

영조와 정조시대.

우리가 알기로는 조선후기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리는 영정조 시대에

가장 역모사건이 많았던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영정조의 정통성을 의심하여, 즉위에 불만을 품은 정치 세력이 적지 않았던 데다가

이 시기 사회 경제적 변동이 심화되어 조선 왕조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역모를 일으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영조와 정조는 시골 양반이 되기에도 부적절한 천박하고 사악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일국의 옥좌를 차지했다는 한탄 속에서 역모가 가능했을 것이다. 어쩌면 결격사유가 많고, 때가 많이 묻은 영정조가,

메기나 문어가 들어있는 어항 속의 열대어가 오히려 더 팔팔하게 살 듯, 반대파들의 저항 속에서 더 치열하게 정치에 임하다보니

조선의 문예 부흥기를 일구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또한 18세기에는 도시의 발달, 화폐의 유통, 몰락 양반의 급증과 도망 노비의 발생과 같은

여러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사회 불만이 누적된 것도 역모사건의 발생 요인일 수 있다.

 

 역모사건의 주범 중에서 문양해의 경우를 보면,

요즘 같은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토크 콘서트를 하면서 구름처럼 사람을 몰고 다녔을 것이다.

이들은 17세가 초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그들도 성공 가능성을 믿고 모반이 가능하리라 믿었지만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그들 역모 사건의 연루자들도 신분별로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거사에 성공했어도 양반에 의해 중인인 양형과 문양해, 주형채등은 제거 되었을지도 모른다.

 

양반은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양반이 아닌 자들은 더 커다란 개혁을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성공했다면 이들은 영웅이 되었을지도.....

 

 

책 중간 중간 등장인물의 관상을 그림과 글로 적어 넣어서 그 사람의 일생은 얼굴에 그려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실록에 저런 식의 인상까지 기록이 되어 있는지가 궁금했고 예언서와 성리학의 대결을 난쟁이와 거인의 대결로 표현한 부분도 재미있다.

필사본인 예언서들은 원작자도 잘 모르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수정,삭제,첨가가 가능했으리란 사실도 흥미를 끈다.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푸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작은 기록 속에 숨겨있는 역사적 진실 찾아내기>

 

<밑줄 긋기>

 

-김영건이 실은 노비 막산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자식의 장래를 염려해 김선비의 아들이라 거짓 주장을 한 것이다.

대개 이런식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던 노비 또는 평민 출신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속였다.

환부역소(아미와 할아버지를 다른 사람과 바꾼다.)라는 말은 그런 세태를 반영한다.

18세기 이래 한국사회에는 김영건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돈을 주고 남의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았다.

 

-.가문이 한미한 문인방, 박서집등이 송덕상, 이택징및 그 일가친척들과 내통해 비밀리에 역모를 꾸밀 수 있었던 사실만 보더라도

18세기 후반 신분의 벽은 다소 낮아진 셈이다. 이제 지체높은 양반들이라도 자신들이 필요하다 싶으면 평민들하고도 기꺼이 연합할 만큼 세상이 바뀌었다.

 

-부자들이 예언서에 빠진 이유 :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했기때문 그들은 조선의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자신들이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예언서 <정감록>은 17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역사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그때까지는 남사고비결등이 대표적인 예언서였다.

영조 초 무신란을 겪은 뒤로 갑자기 여러 종류의 예언서가 유행했는데 남사고 비결은 그중 하나였다.

그 당시 예언서의 유행을 설명할 때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영조의 집권을 부당하게 여기는 정치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점이다.

특히 소론과 남인 계역의 양반들 중에 그런 생각을 가진 이가 많았다.

또 하나는 독서계층의 확산이다. 그 시기에는 서당교육이 보편화되어 양반은 물론이고 각지의 평민들 사운데서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런 현상은 서적 유통의 증가, 인쇄술의 발전 종이 생산량의 증가 등 사회경제적 변화와 같은 맥락에서 이래해야한다.

인류학자 잭 구디의 연구에서도 밝혀졌듯이 문자의 이용은 반란이나 폭동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정감록을 신봉했던 사람들은 일종의 종교단체에 속해 있었다고 해야 옳겠다.

그러나 아직까지 조선 후기 정감록파를 신종교 집단으로 여기는 연구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정감록의 인기는 조선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다는 반증

 

<정감록 역모 사건의 진실게임 /백승종저/푸른역사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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