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9월 26일자 한계레 신문에 의하면
1980년부터 1995년 말까지 15년5개월동안 군에서 사망한 수는
모두 8591명으로 연평균577명이 죽었다.(자살 3263명 폭행치사 387명)
-.나치는 유태인을 미워했다. 그리고 그것과 똑같이 집시와 재즈를 미워했다.
나치가 집시를 미워한 까닭은 그들이 “대단히 불균형하고, 불투명하고,예측 불가능하고,신뢰할 수없고,
게으르거나 이동적이고,자극에 약한데다가, 간단히 말해 그들은 ”노동을 기피하는 반 사회적인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재즈는 왜 탄압받았을까? 나치의 문화 정책자들이 보기에 재즈는 “리듬에의 완만한 몰입,정해진 댄스스텝이 아닌
즉흥적인 몸동작,질서 정연한 멜로디가 아닌 돌발적인 불협화음이 느슨하고 해이한 삶으 느낌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곧 그것을 즐겨 듣는 청소년들에게 “청소년단의 군사 훈련,학교 규율,공공 기관들의 경직된 요구,나치 공직자들의 ‘날선’ 태도,
일상적으로 강요하는의무”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으로 간주됐다.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재력과 인력을 오스만 제국의 경찰력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팔레스타인 땅의 일부를 얻으려고 했다.
시오니스트들의 이런 노력은 팔레스타인의 지배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눈치 빠르게 변했다.
오스만제국의 영향력이 차츰 상실되어 가면서 독일 영국 프랑스가 중동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자
시오니스트들은 독일황제 카이저에게 오스만 황제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제안을 한다.
하지만 1914년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 대신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시오니스트들은 영국의 보호 아래 유태인을 이주시킬 계획을 짠다.
*공부 장정일지음 랜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