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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목에서 손이 나올 때

-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 음식 뒤에 '안주'만 붙으면 못 먹을 게 없다.

 

- 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 김밥은 아름다운 음식이다. 재료의 색깔만 잘 맞추면 이보다 어여쁜 먹거리가 없다. 그래서 김밥에는 꽃놀이와 나들이의 유혹이 배어 있는지도 모른다. 지참하기 간단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꽃밭을 닮아서

 

- 생각해보면 그때 여자들은 자기들이 보기 싫으면 보기 싫다고 하지 왜 남자 어른들 보기 민망하다고 남자들의 눈을 경유해 말했던 것일까.

 

- 이 십대 후반에 처음으로 단식을 한 적이 있다. 살을 빼기 위해서도 아니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살다보면 내 속에 뭔가 쓸데없는 것이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때가 심히 그랬던 시기였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서랍처럼, 남루한 후회가 쌓여 있고 부서진 계획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어둠침침한 우울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던 시기. 머릿속이든 몸속이든 일단 말끔히 비우고 싶어 충동적으로 단식을 시작했다.

 

- 세끼의 식사는 물론 커피도 간식도 술자리도 야식도 사라져 버린, 그야말로 육중한 하루가 통째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시간이 늪처럼 고여 흐르지를 않았다.

 

- 죽 한숟가락에 새우젓 하나씩을 얹어 꼭꼭 씹어 먹었다. 역시 몹시 짰지만, 그 짜디짬 속에는 배릿한 바다향과 구수한 단백질의 맛이 보석처럼 찬란히 박혀 있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죽과 젓갈이 얼마나 훌륭한 조합인지를 알게 되었다.

 

- 봄이 계절의 여왕이듯, 화전은 전의 여왕이다. 그 후로 도대체 어디 가야 화전을 맛볼 수 있나 찾아 헤매는 척했지만 나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화전이 별 맛이 없으리라는 것을. 내가 절대 화전을 먹어선 안 된다는 것을. 화전은 가자미전처럼 먹어치울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연인이 보내온 엽서처럼 오래도록 보존해야하는 이미지라는 것을.

 

- 특 물회의 선연한 주홍빛 살얼음이 녹아가고 쪽진 머리 모양의 국수사리가 급속도로 사라지는데 기자는 세상 급할 것 없는 말투로 연재의 의도와 목적에 대해 구구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 지금 우리 집 냉동실에는 백명란과 시래기가 봉지봉지 얼어 있고 냉장실에는 소고기 장조림, 오이지 무침, 가죽 장아찌가 있다. 당장 소주 한병을 따도 곧바로 안주 한 상을 차려낼 수 있다.  공부와 음주의 공통점이 있다면 미리미리 준비해야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 뭔가를 먹고 만족하기 위해서는 맛과 온도도 중요하지만, 원하는 스타일로 먹는 것도 중요하다. 밥 먹을 때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개도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로 즐길 권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그 당시 내 어린 입맛에 제일 맛있는 음식 1위는 통닭 가슴살, 2위는 마른 오징어튀김, 3위는 만두였는데 고로케를 처음 먹어본 나는 대번에 만두를 4위로 밀어내고 고로케를 3위에 등극시켰다.

 

- 창작촌에는 이십 대부터 칠십 대까지 연령도 다양한 작가들이, 게다가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평론 등 장르도 다양한 작가들이, 심지어 외국에서 초청되어 온 작가들까지 모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창작촌 안에서 문학,예술, 철학 등을 둘러싼 매우 심오하고도 진지한 대화가 꽃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 개중에는 명랑하고 싹싹한 작가들도 있지만, 글 쓰는 사람들이 대개 친화력이 좋은 편이 못 된다. 태생적으로 관계를 맺는 데 서툰 작가들도 있고, 관계에서 지켜야 할 룰이나 관습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작가들도 있다. 가끔 어떤 작가의 얼굴에는 '내가 왜 당신을 보면 반갑게 웃고 인사해야 되는데?" 하는 불만과 항의가 조각도로 새긴 듯 선명히 드러나 있는 경우도 있다. 

 

- 급식은 일반적으로 누구나 잘 먹는다고 인정된 음식을, 누구나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간으로 조리하여 낸다. 이런 음식을오래 먹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억압된 미각이 화산처럼 폭발하는 것을 느낀다. 혀가 아우성을 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 각자의 혀에는 각자가 먹고 살아온 이력이 담겨 있다. 그래서 혀의 개성은 절대적이며, 그 개성은 평균적으로 봉합되지 않는다. 

 

- 먹는 얘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혀의 아우성을 혀로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혀의 미뢰들이 혀의 언어를 알아듣고 엄청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 맛에 있어서만은 가을이 쇠락의 계절이 아니라 절정의 계절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 절정은 단맛으로 표현된다.

 

-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가엾고 뻔뻔하고 슬프고 사나운, 기묘하게 모순되는 그들의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남자는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가격을 말한다. 그렇게 말해야 숫자의 어마어마함이 상쇄되기라도 하는 듯이.

 

- 이때 공짜로 얻어온 게다리를 넣으면 여간 보람찬 게 아니다.

 

- 가끔 견딜 수 없이 어떤 국물이 먹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무언가 몹시 먹고 싶을 때<목에서 손이 나온다>는 말을 하는데 그럴 때 내 목에서는 커다란 국자가 튀어 나오는 느낌이다.

 

- 엄마는 자신의 음식 간이 맞는지 확증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 후추 맛을 좋아했던 나는 감자볶음에 후추를 너무 많이 뿌리는 만행을 저질렀고

 

-연인들의 항해는 어느덧 끝이 나고, 작은 점처럼 멀어졌던 현실이 점점 거대한 해안선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거기엔 온갖 비루하고 형이하학적인 문제들이 들끓고 있는데, 음식도 그중 하나이다.     

 

<오늘은 뭐 먹지?/ 권여선>

 

언젠가 경기도 광주 어느 음식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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