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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 맹자는 전국이라고 하는 비이성의 시대를 살아갔다. 굶주린 백성들이 전쟁과 기근으로 죽어나가는데도, 위정자들의 곳간은 그득하고 그들의 마소는 살쪄 있는 것이 맹자가 살아간 일상이었다. 맹자는 이 부조리한 현실의 원인이 인간의 '욕망'이라고 보았다. 전국이라는 비극의 원인은 '위정자들의 욕망'이었지만, 욕망은 인간 보편의 문제였다. 때문에 욕망하는 인간 욕망하는 나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맹자는 생각했다.

 

- 맹자는 '욕망하는 나를 이기는 힘'으로 옳음과 따뜻함을 제시 했다. 

 

- 맹자 자신처럼 지배계급에 속해 있던 모든 이들은 어떻게 하면 왕의 권력을 더욱 강화해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것에 편승해 부귀와 영화만을 누리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맹자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 맹자가 생각한 문제의 본질은 '욕망'에 있었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은 이익을 위한 투쟁과 대립을 불러오고, 지배자의 과도한 욕망은 착취와 독재로 드러난다. 

 

- 맹자는 인간이 욕망의 존재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인간에겐 누구나 초월에 대한, 이성에 대한 의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제는 어떻게 개개인의 욕망을 절제하고 조율하며, 초월과 이성에 대한 의지를 보장해줄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맹자가 제시했던 근본적 처방은 '인격적 성숙'과 '이성적 정치철학의 구축'이었다. 

 '인격적 성숙'이 인간의 내적인 영역이라고 한다면, '이성적 정치철학의 구축'은 외적인 영역에 해당한다.

 

-유가는 개인의 인격적 성숙이 없는 현실에의 참여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에의 참여가 없는 개인의 인격적 성숙은 맹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지식인은 이상적 사회건설을 위한 책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처음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제기한 이들이 바로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와 맹자이다. 끊임없는 전쟁과 기근의 참혹함에 더해 지배자의 폭정이 일상화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 현실을 개선시키고 좀 더 나은 세계를 구현해갈 것인가를 고민했던 이가 바로 맹자이다. 

 

- 우리 자신은 비록 이익을추구하고 권력에 주눅드는 '현실의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현실을 벗어나 좀 더 숭고한 그 무엇을 갈망하는 '초월의 존재'이다.

 

- 현실은 언제나 권력과 이익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에 곧잘 옳음은 침탈당한다.

 

- 인간의 역사는 이성과 정의에 대한 희구의 실역사임과 동시에, 이성과 정의에 대한 침탈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성과 정의는 결코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다.

 

- 실제 주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은 전국 말엽이지만 주나라라는 통일체를 유지하던 종법제는 이미 이때 종결된 것이다. 

 

- 주나라 말엽 특기할만한 사회적 경제적 변화는 철기의 발달에 의한 생산력의 급격한 발달을 들 수 있다. 생산력의 발달은 권력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주나라 영토의 비대함과 교통수단의 미발달 그리고 중앙권력과 지방권력 간의 유대의 이완은, 주 왕실의 통일적 권력 강화보다는 지방정권의 분권적 권력 강화에 보다 유리했다.

 

- 자식이 아닌 남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선양이라고 한다.

순임금 역시 나중에 왕위를 자신의 아들이 아닌 우에게 물려준다. 

 

- 우임금 역시 왕위를 다른 이에게 선양하려 했으나, 백성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우임금의 아들을 추종하였다.

이후 왕위는 아들들에게 세습되었으니 하왕조는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 맹자가 열거하는 이상적인 통치자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자신의 왕위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도덕적 능력에 의해 왕위를 '얻었다'.

 

-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전국의 통치자들은 혈연과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권력의 강화에 기여할 수 있는 이들에게 관료의 문호를 개방했다. 세계질서의 동요와 사회의 변화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많은 지식인 집단을 제공해주었으며, 역사는 이들을 제자백가라고 불렀다. 맹자는 기존의 혈연적 신분적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계층인 지식인을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국가 통치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 공자 이전의 유자는 단순히 의례를 담당하던 의전관에 불과했으나, 공자 이후로 유자들은 적극적으로 현실의 정치에 참여하고자 한다. 이러한 의욕은 혈연과 신분의 장벽이 느슨해진 맹자의 시기에 이르러 좀 더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 것으로 보였다. 

 

-훌륭한 인격자이자 통치자인 이상적 인간형을 맹자는 성왕이라고 불렀다. 즉 통치자의 전제조건은 순의 경우에서 보이듯 통치능력이라기보다 오히려 개인의 도덕성이었다.

 

- 철저히 통치자와 통치집단만의 욕망과 이익에 의해 굴러가는 현실에서, 이제 맹자를 비롯한 유자들은 이성과 정의라는 가치의 기준을 제시하며 통치영역이 문화영역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이 천 여년의 유가 역사에서 일관되게 견지된 것이었으며, 이는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이성의 힘으로 제약하려던 지식인들의 고뇌의 산물이었다. 

 

- 묵가는 전국시기의 혼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종의 종교적 결사체를 형성하고 현 상황에서 더 이상의 어떠한 침략적 전쟁도 거부했던 사조이다. 이들은 결사체 내부는 물론 모든 사람들의 철저한 연대와 사랑을 주장하며, 인민에 대한 착취의 원인이었던 일체의 향락적 문화를 거부했다. 이들은 음악이나 장례의식 등 일체의 허례허식을 비판하고, 건전한 노동을 통한 소박한 생활의 영위를 주장했다. 맹자가 비판했던 묵가의 태도는 장례 절차와 의례 등을 거부했던 '반문화적 태도'와 가족과 타인의 차 등을 인정하지 않는 '무차등적 겸애주의'였다. 묵가는 아마도 원시공산사회와 종교적 공동체를 합쳐놓은 정도의 결사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 유가는 가족 내에서 발견되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을 중시하지만, 그것이 가족 내로 한정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옳지 않다고 본다. 맹자는 자신과 가족으로부터 해방시켜 사회적으로 확장시킬 때 유가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 귀족의 특권이 인정되지 않았기에 법가의 주장이 귀족집단의 철저한 반대에 부닥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많은 법가들은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던 군주가 사망한 이후 귀족들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곤 했다. 따라서 법가의 사상가들은 자신의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줄 수 있는 강력한 절대군주를 더더욱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법과 정책이라고 해도 왕의 주변 인물들은 흔히 그러한 법적 장치를 넘나들곤 했다. 자신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하면서도 이들 간신들은 왕과 국가의 공적 이익을 가장하였다. 때문에 법가의 완성가인 한비자는 명문화된 법 이외에도 군주가 신하들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법가의 주장에 한계가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법의 제정과 시행에 있어서 전적으로 군주의 공정무사함에 기대야 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군주는 국가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군주의 이익은 곧 국가의 이익이었다.

 

- 맹자는 결코 욕망과 이익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익이 과연 누구의 이익인가를 묻는다. 

 

- 법가가 말하는 이익은 '군주의 이익'이다. 그러나 군주의 이익이 때로(혹은 대부분)백성들의 이익과 반할 수 있다. 때문에 이는 옳지 못한 것이며 맹자가 말한 '옳음'은 '백성의 이익'이다.

 

- 법가는 군주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라고 했으나, 군주 자신이 자신의 '공공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이익은 곧 자신의 이익일 수 없다.

 

- 궁극적이고 항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이익을 덮어두고 옳음을 먼저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옳음'을 '이익'으로 설명하고 있다.

 

-맹자가 생각한 이상적 정치의 주인공은 백성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이기 때문에 맹자는 그것을 '인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통치자가 해야 할 정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왕도정치'라고 불렀다. 그러나 백성을 사랑하는 이상적인 정치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맹자는 그저 '백성과 이익을 함께 나누라'라고 요구한다.

 

- 왕은 백성을 '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왕 스스로 백성을 남이 아닌 자신의 확장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맹자의 생각.

 

- 정치적 이유로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형무소에서 지내야 했던 신영복 교수는 자신이 만난 죄수들은 대부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었다고 전한다. 대부분은 성장 과정에서 따뜻한 말 한 마디 들어보지 못한 우리 사회의 '버려진 자들'이었다고 한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은 다시 사회에 칼날을 들이대게 마련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버리면서 우리는 좀 더 높은 담장으로 그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각자 둘러친 더 높은 담장은 오히려 그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맹자 / 주광호 / 도서출판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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