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흙묻은 손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 진실로 현명한 생각은 모두 이미 많은 사람이 몇천 번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진실로 우리 것으로 만들려면, 깊이 숙고해서 개인적 경험에 뿌리를 내리게 만들어야 한다. <괴테>
- 식물을 키울 때는 기본적으로 일을 약간 미룰 수는 있지만, 계절과 싸울 수는 없다.
- 정원에 나가 한참 일을 하다보면 녹초가 될 수 있지만, 내면은 기이하게 새로워진다.
식물이 아니라 마치 나 자신을 돌 본 듯 정화한 느낌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이것이 원예 카타르시스다.
- 프로이트는 웬만하면 산으로 여행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때는 자연으로 떠나는 여행을 "치료약"이라고도 말했다.
- 나이팅게일은 병동에 풍부한 자연광과 충분한 환기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휠체어를 타고 야외로 나가는 환자들의 회복이 더 빠르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크림전쟁에서 간호사로 일한 뒤에 나이팅게일은 이렇게 썼다.
"열병 환자들이 아름다운 꽃을 보고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나 자신도 작은 들꽃 다발을 받았고, 그 히후 회복이 훨씬 빨라졌음을 기억한다."
- 나이팅게일은 볼 것이라고는 나무 벽의 옹이뿐인 헛간에서 치료받는 환자들의 고통을 목격했다.
그리고 꽃과 침대 옆 창문은 심미적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 위대한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맨해튼의 에이브러햄 병원에서 일할 때,
규칙적으로 환자들을 길 건너 뉴욕 식물원으로 데리고 가서 산책을 시켰다.
그는 만성 신경 질환에 특히 중요한 비약물 치료는 두 종류, 바로 음악과 정원이라고 보았다.
- 자연환경은 항상 생명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혼자이지만 고립되지 않은'느낌을 안겨주고, 고독의 독특한 위로를 전해준다.
- 땅을 가꿀 때는 세상을 향한 돌봄의 태도도 가꾸게 된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에서는 이 돌봄의 자세가 그다지 권장되지 않는다.
'수선'보다 '교체'를 우선시하는 문화는 파편화한 사회망과 도시 생활의 빠른 속도와 결합해서,
돌봄을 폄하하는 가치 체계를 세웠다.
- 20세기에 들어서서도 많은 시설이 큰 정원을 만들고 환자들이 키우는 꽃,과일,채소를 활용했다.
그러다가 1950년대가 되자, 새롭고 강력한 약물들이 도입되면서 정신 질환 치료법이 급격하게 변했다.
돌봄의 초점이 약물로 치료로 옮겨가면서 환경의 역할은 중요성이 감소했고,
그에 따라 이후의 신축 병원들은 외부에 녹색 공간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한 바퀴 돌아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우울증과 불안증이 늘고 약물 비용도 증가했다. 여기에
자연의 유익한 효과에 대한 증거가 늘면서, 원예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녹색 돌봄'이 새로운 추진력을 얻고 있다.
- 원예는 질병은 말할 것도 없고 병원이나 진료실과도 무관한 일상적 활동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기능이 있다.
- 마이클 폴란은 저서 <세컨 네이처>에서 움직이는 환상을 볼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전하다. 네 살배기 폴란은 집 정원 한구석에 숨었다. 근처를 쑤 다시고 다니다가 "뒤엉킨 덩굴과 넓적한 이파리들 틈에서 녹색 얼룩 축구공"을 보았다. 수박이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 그 이상을 느꼈다. "이 수박이 내가 심은 씨앗, 아니 어쪘건 내가 몇 달 전에 뱉어서 묻은 씨앗에서 자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일을 일어나게 했어.' 한순간 나는 수박이 그냥 익게 두어야 한다는 생각과 내 성취를 자랑하고픈 치솟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했다. '엄마한테 보여줘야 해.'
- 위니콧이 말하는 '충분히 좋은 엄마'는 환상을 충분히 키워주는 엄머다.
엄마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예를 들어 항상 옆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아기는 작은 좌절을 경험하고,
그에 따라 현실에 대한 마술적 통제감을 조금씩 잃는다. 위니콧은 "엄마의 최종 과제"는 아이의 환상을 점진적으로 깨는 것이지만, 먼저 환상의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으면 그 일에 성공할 수 없다."라고 썼다.
- 내향적 특징을 갖는 식물들과의 교류는 평온을 주며, 평가받지 않을 자유를 준다.
이런 감정은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지만, 교도소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공감이 이루어진다.
새와 곤충은 들어오고 나가지만, 식물은 뿌리박혀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게 똑같이 갇혀 있는 상태라는 사실이 일종의 공감을 일으킨다.
- 정원에서는 모든 일이 느리게 흘러간다.
- 가로수의 존재 만으로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사람들이 자기 인생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가로수가 의미있는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블록마다 나무 열 그루만 더 있어도 추가 소득 1만 달러와 대등한 규모의 정신적 스트레스 감소가 일어난다는 답이 나왔다.
-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에게서는 우유를 사러 복잡한 거리를 10분 동안 나갔다가 오는 것만으로도 여러 증상, 특히 불안과 망상적 사고가 두드러지게 증가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중국 농업의 기원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풀러는 최초의 원예는 생존형 식량이 아니라 '고가치 식량 - 잔치나 특별 행사에 먹을 거리-'을 생산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식물 재배의 동기는 사회적 의식이나 지위와 관련 이 있다는 것이다.
- 고고학자 앤드루 셰라트는 경작에 대한 관습적 서사를 말끔하게 뒤집어서, 사치 식물을 기르는 원예에서 필수 작품을 기르는 농업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삶의 질을 높이는 작물의 재배를 중시했다는 것은 원예가 처음부터 문화의 표현이었음을 의미한다.
- '경작하는 ' 개미와 '원예 활동하는' 삿갓조개분 아니라, 흰개미와 딱정벌레 중에도 '경작하는 '종이 있고, 심지어 씨를 심는 벌레도 있다. 하지마 포유류 중에서는 호모사피엔스가 유일하다. 인간은 원예활동을 하는 유일한 유인원이다.
- 민족지학적 기록에 따르면, 많은 수렵 채집 부족이 첫 열매를 신에게 공물로 바치거나 씨앗 일부를 땅에 돌려준 뒤 돌멩이로 그 장소를 표시했다. 하이저는 선사시대 이 의식을 수행하면서 흩어지거나 땅에 묻힌 씨앗들이 우연한 텃밭을 말들었으리라 추정하고, "최초의 파종과 최초의 성스런 텃밭이 동시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 개척자들에게 흙을 일구는 일은 경제적 수익을 위한 공리적 활동이었다. 땅은 별 깊은 의미없이 그저 이용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자연 세계가 신성한 지위를 잃으면서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겨났고, 흙에 대한 존경은 사라졌다. 이런 싶은 착각이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괴롭힌다.
- 모든 인간은 자기 텃밭을 가지고 본능을 되살려야 한다.<융>
- 1차 세계대전 당시 적군이 다가올 때도 모네는 꽃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지베르니의 정원에 남아 있었다.
- 열대우림에 사는 에우글로시니 벌 수컷은 곤충계의 조향사로, 방문하는 모든 꽃에서 모은 향기를 엉덩이의 향수 단지에 저장해서 자기 고유의 향기를 만든다.
- 꽃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저명한 진화 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꽃이 미래의 식품원을 알려주기 때문에 인간이 꽃 에이끌렸으리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 미적 자양분에 대한 인간의 요구는 흔히 저평가된다. 하지만 융이 말했듯이, "우리 모두에게는 영혼을 위한 영양분이 필요하다. 푸른 땅도, 꽃나무 한그루도 없는 도시 임대주택에서는 그런 양분을 찾을 수가 없다." 산업화와 함께 노동자가 일과 맺는 관계도 덜 건강해졌다. 생산 라인은 과정을 파편화하고, 사람들은 결과의 작은 일만을 책임진다. 수공업이 번성한 시절의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열매를 직접 보며 보람을 느꼈다. 당시 일은 노동자에게 적절한 자기 표현 수단이 되었다"고 융은 썼다.
-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가 흙을 경작하는 데 부여하는 가치는 부당하게도 인간이 만든 경제 주기에 연루되어 있다. 사람들은 경제 불황이나 격심한 사회 변화의 시기에 땅을 돌아본다. 우리 시대에 원예가 전지구적 사회운동이 된 것은 징후라 할 수 있다. 도시화 관련 문제들과 산업을 대체하는 기술의 영향이 전 세계에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원예 운동가 마크 하딩의 말처럼, 산업이 우리를 내뱉을 때는 "언제나 자연에 우리의 자리가 있다."
- 기원전 329년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왕들이 "가장 고귀하고 가장 필요한 사업" 두 가지를 전쟁기술과 경작 기술이라고 여겼다고 기록했다.
- 전사와 경작자는 인간 본성의 두 극단을 상징한다. 공격과 파괴대 평화와 창조다.
- 가시철망증후군 : 포로수용소에서 혼란 기억상실 동기 저하 격심한 불안 같은 증상을 특징으로 하는 질병으로 곤경 상황에서 겪은 무력감과 살아남은 자라는 죄의식은 포로의 정신을 좀먹는다. 포탄 충격처럼 신경쇠약의 한 형태로 여겨졌는데 의사 피셔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질병.
- 자기 인생의 마무리에 대해 생각하면서, 몽테뉴는 정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양배추를 심다가 죽음을 맞았으면 좋겠다. 죽음은 생각하지 않고, 마무리 짓지 못한 정원을 더 생각하면서." 몽테뉴는 삶이란 언제나 과정이고, 우리의 바람과 달리 고정된 것은 없으며, 인생이 길든 짧든 누구든 계획하거나 희망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몽테뉴의 양배추밭은 미완의 인생을 상징하는 만큼, 인생의 연속성도 상기시킨다. 말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우리의 말과 생각은 우리가 심은 현실 또는 비유 속 양배추를 통해 계속 살아갈 수 있다.
- 우리는 자연과 너무 분리되어 있어서, 스스로가 거대하고 살아있는 연속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는다.
- 죽음에 대해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삶에 방해가 되지만,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
- 램버트는 손으로 일하는 것이 건강을 휘한 핵심적인 방식이라고 믿었고, 인간 두뇌의 많은 부분이 특별히 손의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DIY에서 수공예까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원예의 이점은 도로시가 말하는 대로 꾸물거릴 수 없다는 점이다. 램버트는 예측불가능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원의 쓸모 / 수 스튜어트 스미스 지음 /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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