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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대인은 왕따가 되었을까?

왜 유대인을 혐오하게 되었을까? 혐오이전에 차별이 있고, 차별이전에는 배제가 있다.

배제를 위해서는 너와 나의 구분짓기가 필요하다. 구분짓기 위해서는 우리와 다른 남(적)이 있어야 한다.

우리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 외부의 적을 만드는 상황에서 유대인 혐오주의가 일어난 것이다.

지금 코로나로 인해 서양에서 벌어지는 동양인 혐오도 이런 과정에서 벌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의견을 따라가 보았다.

 

- 유대인 혐오의 역사는 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질병이 혐오의 구실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한센병이 유전되고 유대인을 이병에 '오염된 민족'이라 여겼다.

B.C. 3세기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는 유대인들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게 아니라 한센병 때문에 추방당했다고 주장했다. 중세 흑사병이 창궐해 유럽 인구 3분의 1이 죽어나갈 때도 유대인 혐오가 기승을 부렸다. 유대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율법에 따라 손을 자주 씻는다. 덕분에 감염을 피한 건데, '유대인이 이 병을 퍼뜨린 증거'라며 학살극이 벌어졌다.

 

<조선일보 만물상 2021.3.19일자>

 

2015년 독일 여행중 다하우 유대인 수용소에서

 

 

-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에 따르면 유대인은 원래 신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지만 구세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살해한 죄많은 백성이다. 그래서 유럽 각지에서 살아가는 유대인은 혼혈이 많아 외모로는 구별할 수 없음에도 공직에 나가지 못한다든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는 등 이런저런 차별을 받아왔다. 이때 '유대인'이란 유대교를 믿는 자, 또는 유대인의 혈통을 잇는다고 자임하는 자'를 가리킨다.

유대인은 그리스도교도가 손도 대지 않으려고 하는 더러운 일을 도맡았다. 고리대금업이 그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동포'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일을 원칙적으로 금했는데, 대규모 상업 활동을 하려면 금융업이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은 필요악인 대금업에 진출했다. 대금업으로 돈을 버는 유대인에게는 멸시의 눈초리와 함께 증오가 점점 거세진다. 잘 알려진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자기들이 아쉬울 때는 유대인을 이용해 먹지만 형편이 나빠지면 악마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재산을 늘리려는 유럽사회의 염치없음을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런 사정을 바탕으로 유럽에서는 페스트 등이 유행하여 사회적 불안과 분노를 터뜨릴 곳이 없어지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집단적으로 박해하고 추방하거나 심지어는 학살하는 '포그룸'(유대인의 주택과 가게를 집단적으로 습격, 파괴,학살하는 행위로 1881년 이후 러시아에서 되풀이되었다)이라는 현상이 종종 일어났다. 그런데 '국민국가'가 생성되는 19세기에 들어오면 유럽 국가, 특히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동화가 상당히 진척되어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을 버리고 시민사회에 융화되는 유대인이 늘어났다. 심지어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도가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독일문학사에 반드시 등장하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학생시절에 스스로 개종했고, 마르크스 일가도 그가 어릴 적에 개종했다. 상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금융을 죄악시하는 시각도 상당히 누그러졌다. 더불어 유대인을 멸시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자체도 기세가 약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근대화를 이룩한 국가와 시민사회가 유대인을 박해해야 할 적극적인 이유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국민국가'를 형성하고자 하는 기운이 높아짐에 따라, 인구도 감소하고 사회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된 유대인을 '사회의 적'으로 돌리는 반유대주의적 담론이 서구에서 퍼져나갔다. 결국 이 반유대주의가 나치스에 의한 조직적 민족말살, 즉 홀로코스트로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바로 이 점을 문제 삼는다.

 

유대인의 사회적 영향력이 강해져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들을 적대시하는 시선이 강해진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실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도대체 왜 점차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유대인을 새삼스레 적대시한 것일까?

 

한나 아렌트는 이 물음을 통해 '동일성'을 추구하는 국민 집단이 자기 주위에서 '이질적인 자'를 찾아내 '동료'에서 분리시켜 구심력을 강화라려고 하는 '자/타'의 변증법이라는 메커니즘을 이끌어낸다. 사실 누구를 표적으로 삼아도 상관없었지만, 역사적으로 유럽 각지에서 박해의 대상이었던 집단, 그것도 시민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국민'의 내부에 섞여 들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유대인'이야말로 동료를 안 쪽에서 침식해 들아가는 '적'의 이미지를 들씌우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왜 지금 한나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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