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하루에 반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평소와 달리 우린
많이 지쳐서 마치 절군 배추처럼 쭈그러져서 있었다.
보통땐 기차를 타면 달리는 기차의 창 밖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을텐데.......
베를린을 향한 4시간 내내 창밖 풍경들이 눈에는 들어 왔지만 머리까지 들어오지 않고 사라져 갔다.
호감 가는 경찰은 우리에게 만일 캐리어를 찾게 된다면
베를린 기차역으로 배달 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기적같은 일이라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말 그대로 만일, 만 분의 일의 확률도 있을까 말까? 한 기적.
베를린은 프랑크푸르트보다 북쪽이니 기온이 많이 내려갈 것이 걱정이 되었다.
어차피 지금 입고 있는 옷 이외에 속 옷과 양말이 하나도 없으니 당장 속옷부터 사야 하지만
기온이 그리 떨어지지 않아 비싸게 보온용 겉옷을 새로 사 입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베를린에 가면 적당히 익어 먹기 좋게 익은 김치도 아깝고, 한 젓가락도 먹지 못한 오이 김치도 생각났다.
매일 틈나는대로 보고 들었던 아이패드를 잃어 국내 소식도 듣지도 못하게 되었다.
카메라와 메모리 카드 3개 그리고 USB,
바지 두벌,양말 5켤레, 팬티 런닝 각각 5벌, 티셔츠 세벌, 긴팔 남방 2벌,운동화,샌달,책, 여행을 하면서 먹을 영양제와 비타민제,
면도기와 각종 충전선, 보온용 패딩 점퍼, 새로 산 밥이 잘되는 냄비,포트,우산,쌀,라면,가디건,
고생스럽게 준비해서 서울에서부터 담아간 밑반찬들......
그리고 꼼꼼하게 영수증을 붙여 놓은 공책과 박물관 관련 팜플렛.....그외에 잘 기억나지 않는 것들...등등
말 그대로 의식주에서 주에 관한 것을 뺀 모든 것들이었다.
그나마 여권과 카드를 잃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북서쪽으로 달리고 달린 기차는 우릴 베를린에 내려주었다.
우리 앞에서 내린 쌍둥이 아빠는 짐을 5개나 들고 내리면서 짐 갯수를 하나하나 세고나서 내렸다.
아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여겨졌다. 그는 쌍둥이 아이에다 짐 5개인데, 난 짐이 몇 개나 된다고
관리를 못해 이런 처지가 되었단 말인가?
베를린 호텔 직원이 여행이 즐겁냐고 물었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우린 빨리 상처를 봉합하고 남은 여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데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노력하였다.
'그래에~~~ 가방이 하나 줄어서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네~~ㅋ ㅋ'
우리 소식을 전해듣고 아이들은 “이제 아빠는 하는 수없이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야겠네~~ㅎ ㅎ”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이들의 반응이 그래서였을까?
안 좋은 생각들은 잃어버린 짐과 함께 프랑크푸르트에 내려 놓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끔씩 속이 쓰릴 것이다.
이를테면, 거울을 보다가 수염이 자란 걸 보곤,
아하~면도하려면 면도기도 새로 사야겠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려면....
속옷도 한 벌 뿐이니 급한 속옷과 양말도 사야겠고,
새로 산 냄비도 잃었으니 냄비를 살까? 말까?
이렇게 아쉬운 일이 생길 때마다 상처는 덧나곤 할 것이다.
짐을 내려놓고 우린 호텔 가까운 곳에 있는 분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동서독 분단시대의 여러 흔적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거대담론을 논하는 자리에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묻혀버리 듯
우리에게 아침에 일어났던 일들이 별것 아닌 일처럼 여겨졌다.
냉전시대에 자유와 인류 평화 등 크고 위대한 일에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고, 한맺힌 죽음도 부지기수였을텐데.....
그깟 가방 하나 잃은 건,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구나.
아마 은연 중에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조금 덤덤해졌다.
내가 갑자기 조숙해진 것이다.
날씨까지 화창해서 우울한 기운도 햇볕에 증발되고 말라버린 느낌이었다.
동서독 사이에 있던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
이렇게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제 밥 없는 식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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