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와 정림사지 박물관(아래)
일제강점기인 1942년 발굴조사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고 씌여진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년)당시 정림사로 불리었음이 밝혀졌다. 그 이후로
이 절터는 정림사지로, 탑은 정림사지오층석탑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와적기단은 건물을 짓기 전 기초가 되는 땅을 단단히 하고 높여 습기나 침하를 막고 건물의 위용을 높였다.
정림사지에서는 각 건물지에서 이러한 와적기단이 대량 출토되었다.
백제의 불교문화는 신라와 일본에도 전파되었는데 사찰건축에서 정림사지의 와적 기단이 사용된 흔적이 남아있어
정림사지가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중요한 역사유적지임을 살펴볼 수 있다.
탑의 하단부에는 글씨도 새겨져 있었다.
고려시대 석불좌상은 언제 보아도 다소 유치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고 하면
조상의 유물에 대한 모독일까? 어쨌든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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