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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진리>

 

- 인간이 동물과 다른점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인간만이 두 세계에서 산다는 점이다.

두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현실 너머'의 세계다.

 

- 실용주의는 지금 나에게 쓸모 있는 것만이 의미를 갖지, 쓸모없는 것들은 말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현대 미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졌고, 현대인들이 유용한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실용주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장에 정당성을 부여해왔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사회는 한발 더 나아가 실용주의가 하나의 철학적 사조이기보다는 차라리 삶의 원리가 되어 있는 듯도 하다. 오늘날 한국은 철학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극단화된 미국식 실용주의가 완벽하게 장악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 원시인들은 자연물과 자연 현상을 의인화해서 자연의 속성을 인간의 감정과 대응해 서술했다. 풍요는 어머니이고, 가뭄은 외면이었으며, 폭풍은 분노였고, 무지개는 용서였다. 원시 시대의 사람들에게 자연물과 자연 현상 하나하나는 신성함이었다.

 

- 근대 합리성의 붕괴의 외적 요인은 세계대전과 산업화의 부작용이고, 내적요인으로는 수학에서 불완정성의 정리, 물리학에서 불확정성의 원리, 철학에서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를 들 수 있다.

 

-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하이젠벨크의 불확정성 원리, 파이어아벤트의 인식론적 부정부주의는 수학, 물리학, 철학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와 불가능성을 명확하게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학문의 내적 붕괴가 세계대전이라는 외적 요인과 결합되어 근대 합리성에 대한 낙관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이성은 사실 너무나 초라하고 제한적이며 폭력적 귀결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류는 몸서리치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대적 진리로서 기대되었던 근대 이성을 극복하고, 합리성을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 포스트 모던, 탈근대, 현대는 같은 말이며, 모든 근대를 넘어서는 시대를 말한다.

여기서 근대를 넘어섰다는 것은 근대 이성중심주의를 극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탈근대는 이성에 반대하는 반이성을 특징으로 하고, 근대적인 합리성, 효율, 주체, 질서, 규율, 규칙, 통제, 발전, 성장, 기술에 저항하며, 이 근대적 속성들을 안으로부터 붕괴시키려고 한다. 

 

- 이분법은 중세와 근대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강력한 틀이었다. 문제는 이분법으로 구분된 두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를 억압하고 차별한다는데 있다. 

 

- 포스트모던이 중세와 근대를 비판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중세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가치가 다른 가치를 억합하는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포스트 모던은 이분법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세계를 강압적으로 둘로 쪼갤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들을 인정하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그동안 억압받아왔던 가치들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하며, 한 발 더 나아가 이분법에 포착되지 않고 배제되었던 것들까지도 다시 복원하고자 한다.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담론에서 아예 배제되었던 제3의 성의 권리가 주장되었고, 이성과 감성의 대립에서 포착되지 않았던 광기가 연구되었다. 또한 백인과 흑인의 정치적, 경제적 대랍 구도에서는 논의되지 않았던 유색인종들의 고유문화가 관심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포스트모던은 억압받고 잊혀왔던 까닭에 등장할 때마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거부감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이들의 주장은 많은 이에게 지지받고 있으며, 실천적 사회운동의 성향을 띠게 되었다.

 

- 근대 이성중심주의의 이분법적 폭력성, 사고의 경직성, 규율과 규칙, 질서의 불편함은 포스트 모던의 도래와 함께 급격하게 무너진다. 포스트 모던은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기보다는 근대의 계획을 해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기존에 소외되고 억합되었던 가치들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은 1960년대를 휩쓴 문화 운동으로 정치, 경제,사회, 문화, 예술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실천적 운동이었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여성운동, 인종차별 철폐, 학생운동등의 정치, 사회 운동과 함께 회화, 사진, 미디어, 패션에 이르는 예술, 문화적 운동을 동반했다.

 

- 68혁명은 1968년 프랑스의 대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로 시작하여 기성세대와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혁명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권위적이고 계몽적인 학교와 국가에 저항했다. 당시 유럽국가들은 공산주의와의 대립을 명분으로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국가의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에 반대했다. 또한 젊은이들은 산업화에 따른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기성세대에 반대하고, 인간적 가치의 회복과 사람들 간의 관계 회복을 꿈꿨다.

 

- 68혁명은 유럽을 휩쓸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히피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일본에 까지 도달했지만, 당시 한국은 군부독재 시기라 도달하지 못했다.

 

- 진리는 아직 실체가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속성이 절대성, 보편성, 불변성인데, 진리가 실제로 존재할 것인지에 대한 네 가지 태도에는 절대주의, 상대주의, 불가지론, 실용주의가 있다.

 

-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진리가,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하는 것이 두렵고, 기존에 내가 진리를 위해 쏟아온 정성과 노력이 허튼짓이었을까 봐 두렵고, 지금까지 나와 단일 진리를 공유해왔던 가족과 친구들의 눈치가 두렵다.

 어떤 삶을 선택해도 괜찮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진리를 의심하고 그로인해 주변과 마찰을 빚더라도 다른 진리를 찾아 떠나는 인생도 괜찮은 선택이고, 내가 믿어왔던 진리에 대한 신념을 더 굳건히 해서 이를 주위 사람들과 함께 지켜나가는 인생도 괜찮은 선택이다. 결정은 당신이 하면 된다.

 

<철학>

 

-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와는 달리 고대부터 근대까지 역사에서 회의주의는 항상 주요 담론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현대에 이르러 회의주의는 세련된 형태로 나타나 판 전체를 뒤흔든다. 포스트 모던은 회의주의에 기반한다.

 

-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입장을 비판하고 진리의 절대적인 토대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의 문답법을 통해 누구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질문과 답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을 '산파법'이라고 불렀다. 산파가 산모로부터 출산을 유도하듯 적절하고 적합한 질문이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진리를 도출하게 한다는 것이다.

 

- 중세는 유일신 중심의 절대주의 시대였다. 그리고 여기에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 플라톤의 절대주의 였다.

중세 후기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의 상대주의가 보편논쟁을 중심으로 등장했다. 보편논쟁은 '보편'이 실재하는지에 대한 중세 최대의 논쟁이었다. 보편이 실재한다는 실재론은 플라톤의 절대주의에서 그 이론적 토대를 찾았고, 보편은 실재하지 않고 다만 언어일 뿐이라는 유명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상대주의에서 그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 보편논쟁을 종합한 인물이 아벨라르였다. 그는 보편을 관념적인 개념으로 정립함으로써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쟁을 마무리했다. 

 

- 데카르트가 활동했던 시기는 17세기로 마지막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오랜 전쟁으로 유럽은 허무주의적이고 회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신과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이런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적 분위기를 극복하려면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확고한 진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절대적 진리를 찾는 방법으로, 그는 반대로 모든 것을 의심해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다보면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 무수히 많은 관찰을 한다해도 그 관찰은 언제나 과거의 관찰에 한정될  뿐이어서 귀납법은 언제나 미래에 틀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 눈앞의 세계가 실제의 세계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동양과 서양의 오랜 역사에서 등장하는 사고방식이다.

장자의 호접몽이 그렇고, 서구 현대 철학의 하이퍼리얼리티 개념이 그러하다. 

 

- 지금 우리의 친숙함과는 달리, 중세 교회의 그림자가 다 걷히지 않았던 근대 초기에 경험론의 주장은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측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경험론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진리는 자연에 있고, 우리는 자연에서 규칙과 질서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무신론적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경험론의 진리 탐구 방법에는 신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경험론은 중세의 신중심주의를 끝내고 근대 이성중심주의와 근대 과학을 탄생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경험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그는 데카르트보다 35년 정도 전에 태어나서 16~17세기에 영국에서 활동했다. 베이컨 이후에 경험론은 영국에서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영국 경험론'이란 불리면서 대륙 합리론과 대응되는 말로 사용된다.

 

- <<노붐 오르가눔>>에서 베이컨은 우선 우상론으로 기존 학문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여기서 우상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을 의미한다. 베이컨은 편의상 네 가지 이름을 붙였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여기서 종족, 동굴의 우상은 개인의 개체적인 편견에 해당하고 시장, 극장의 우상은 사회적인 측면이 강하다.

 

우선 '종족의 우상'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갖게되는 편견을 말한다.

예를 들어 '꽃이 웃는다'거나 '새들이 노래한다'라는 문장이 이에 해당된다. 이 문장들은 인간 중심적인 문장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다. 실제로 꽃은 웃지 않고, 새들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사물에 대입해서 사물을 인간적으로 해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동굴의 우상'은 개인의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오류를 맒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이 전체의 일반적인 경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류를 발생시킨다. 베이컨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동굴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 동굴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동안은 외부의 실제 빛이 아니라 동굴의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제한된 빛으로 동굴 안을 본다. 이러한 주관성이 극복될 때 편견없는 학문 탐구가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시장의 우상'은 잘못된 언어 사용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보통 주어에 들어가는 단어가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신, 악마, 요정, 도깨비 등의 단어가 존재하면 실제로 그에 부합하는 대상이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이다. 베이컨에 따르면 사람들은 관찰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하는데, 이럴 경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장의 우상'은 권위에 수긍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사람들은 미신, 신학, 철학 등 기존에 전통으로 확립되어 있는 이론들의 권위에 의지하려는 태도를 갖는다. 베이컨이 보기에 이러한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는 제대로 괸 학문 체계를 세우지 못하게 한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전통적이론에 기대는 것이 나이라, 오직 자연 세계를 직접 관찰하고 검증하는 방식으로만 학문에 대해서 논해야 한다.

 

- 근대 합리론과 경험론은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탐구였다. 합리론은 보편적 이성을, 경험론은 개별적 경험을 그 방법으로 제시했다. 이 두 체계를 종합함으로써 소모적인 논쟁을 끝마친 인물이 칸트다. 

 

- 칸트는 2000년 넘게 이어져오던 거대한 철학적 논쟁을 종결지은 것이다. 18세기에 활동했던 이 경이적인 인물의 업적은 '관념론'으로 알려져 있다. 

 

- 니체의 별명은 '망치를 든 철학자'로, 별명에 맞게 그는 근대의 서구문화 전체를 전복하려고 했다. 니체가 진단한 근대의 서구사회는 병들고 건강하지 못했다. 병의 원인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는 서구 이성중심주의 철학과 예수 이후의 그리스도교 사상이었다. 특히 니체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기반한 윤리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 병든 사회에 대한 니체의 처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제시된 초인사상과 영원회귀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영원회귀는 같은 우주가 무한히 처음으로 동일하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니체 사상의 주요 개념이다. 쉽게 말해서 영원회귀에 따르면 나는 나의 삶이 끝나고 정확하게 나의 삶을 그대로 다시 살게 된다. 이것은 힌두교나 불교에서의 윤회와는 다르다. 윤회는 다른 존재로 환생하는 것이지만, 영원회귀는 지금 자신의 삶을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나의 부모님과 다시 함께 유년기를 보내고, 동일한 대입시험에서 동일한 문제를 풀고, 동일한 결과로 동일한 대학에 가서, 같은 사람과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며, 같은 날짜에 결혼하고, 같은 아이를 낳고, 같은 회사에 다니고, 내가 죽었던 동일한 날짜에 삶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는 순간부터 나는 또 다시 내 삶을 새롭고 동일하게 반복한다.

 

- 언어를 바로잡음으로써 철학의 모든 문제를 끝냈다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학계를 떠나서 방랑자나 수행자와 같은 삶을 살아갔다. 그러다가 중년이 되어 자신의 철학이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고, 다 끝내지 못한 철학의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학계로 돌아왔다. 학계에서는 이에대해 "신이 돌아왔다"라고 표현했다.

 

- 근대 이성주의의 붕괴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과 이념의 혼란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동시에 냉전으로 인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 갈등은 사람들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탄생했다.

 

- 말하지 못해도 인간은 가치가 있고,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인간은 가치가 있다. 즉 인간은 의자나 돼지처럼 단일한 본질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고정된 본질을 갖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존재자에 대한 이름이 '실존'이다. 인간은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문제는 규정되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을 억압적으로 규정하고자하는 집단들이 있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가족,관습,도덕,종교,철학,과학은 우리를 본질로 규정하려고 한다. 우리는 '국민'으로, '아들과 딸'로, '피조물'로, '이성적 존재'로 '군인'으로 규정되어 왔고, 스스로 그것이 자신의 본질ㅇ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나의 본질이 아니며, 나는 본질을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본질로 존재하지 않는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에게 뒤집어 씌워진 본질을 하나씩 벗어내고 어떠한 규정과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면, 나에게는 단지 세 가지만이 남게 된다. 그것은 '내가','지금','여기'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규정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실존하는 존재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저주는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과학>

 

- 예를 들어 매우 얇고 탄성이 좋은 사각형의 고무막이 있다고 해보자. 이 고무막의 네 꼭지를 팽팽하게 당겨서 고정한 후 볼링공을 가운데 올려놓는다면, 볼링공을 중심으로 주변의 고무막이 아래로 움푹 늘어날 것이다. 이때 볼링공의 주변에 탁구공을 놓아보자. 그러면 탁구공은 볼링공이 만들어내는 휘어진 고무막의 곡률을 따라 빙글빙글 돌면서 볼링공에 와서 닿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볼링공이 탁구공을 잡아 당긴것 처럼 보인다. 볼링공을 지구, 탁구공을 사람이라고 한다면 지구가 사람을 당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의 질량이 만든 시공간의 곡률로 사람이 굴러 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볼링공을 태양, 탁구공을 지구라고 한다면 태양이 지구에 가하는 중력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중력'이 질량에 의해 휘어진 '시공간의 곡률'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1919년의 개기일식 중 멀리서 오는 별빛이 태양 주변을 지나면서 구부러지는 현상이 관측되면서 증명되었고, 학계와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빛은 질량이 없으므로 뉴턴역학에 따르면 중력의 영향을 받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졌다는 것은 중력이 특정한 힘이 아니라 공간의 휘어짐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 러시아의 수학자 프리드리만과 빌기에의 르메르트에 의해 주장된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팽창 우주론'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우주는 멈춰있다고 주장하며 임의의 상수인 '우주상수'를 도입하면서까지 이를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천문학자 허블이 모든 은하가 우리 은하를 중심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을 실제로 관측하면서, 팽창 우주론이 현대 우주론의 정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팽창 우주 탐구는 시간을 역으로 돌려서 처음 팽창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미국의 물리학자 가모프에 의해 태초의 대폭발로부터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빅뱅이론'을 탄생시켰다.

 

- 처음에 과학자들은 아무리 작은 세계에 대한 탐구라고 해도 원자나 전자 단위의 소립자들이 뉴턴역학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확인해 본 결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듯했다. 이에 따라 미시세계를 기술할 새로운 물리학이 필요해졌는데, 이를 양자역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 아주 작은 소립자를 측정하려고 전자기파를 쏘면 전자기파를 맞은 소립자의 '속도'가 변하고, 속도에 영향이 없을 만큼 작은 전자기파를 쏘았더니 이번에는 너무 약해 파장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에 대해 근대 물리학을 이끈 아인슈타인은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확정되지 않는 것은 다만 측정 기술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기술이 더 정밀하게 발전하면 우리는 소립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측정되지 않음이 미시세계의 질서라고 생각했다. 이를 수학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하이젠베르크다. 그는 이렇게 동시에 결정되지 않는 미시세계의 원리를 '불확정성 원리'라고 이름 붙였다.

 

- 과학자 집단이 과학에 대해 갖는 신뢰보다 대중이 과학에 대해 갖는 신뢰가 더 크다는 점이다.

과학의 실제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과학이 진리라고 믿는 마음가짐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매우 종교적이다. 우리의 과학적 믿음에 찬물을 끼얹고, 과학적 진보라는 것은 허구이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검증을 통해서 과학이 발전한 것이 아님을 밝힌 인물이 토마스 쿤이다.

 

<예술>

 

- 예술적 체험이란 너무나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까닭에, 각각의 개인이 이해하는 통찰에 대한 공통 분모를 찾거나 이를  일반화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그런 만큼 예술은 역사상 과학,철학, 종교에 비해 진리로서 강조되지는 않았다.

 

- 이집트에서의 예술은 종교를 위한 수단이었으나, 그리스에 와서 예술은 독자적인 가치로서 목적 그 자체였던 것이다.

 

- 그리스 로마 미술이 쇠퇴한 내적인 측면으로서는 그리스도교의 탄생 배경과 관련된다. 근대 철학자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주인이었던 그리스 로마 문명에 원한을 가진 유대인의 원한의 도덕을 근간으로 한다. 주인이 가진 좋은 것을 악으로 규정한 이들은 인간적이며 진취적인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장악한 중세에 그리스 로마의 거대한 예술적 이념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스도교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특성은 종교와 관련되지 않은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예술은 교리 전달의 보조수단으로만 인정되었다. 이러한 종교 중심의 세계관이 시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술은 사실상 퇴보했다. 다만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는 교회 건축 발전과 함께 예술이 미약하게나마 발전할 수 있었다.

 

- 11~12세기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은 두껍고 육중한 모습을 띠게 된데는 종교 해석적인 측면과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이유가 있다. 우선 종교적으로 볼 때, 당시의 교회는 지상에 만든 신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교회라는 공간은 신이 실재로 내재할 수 있는 곳으로, 악한 세계로부터 종교적 이념을 보호하는 전투적 공간이었다. 그런 까닭에 건축은 성과 같은 모습을 하였다. 다음으로 건축상의 이유도 있었다. 공법상으로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던 까닭에 건물을 높게 올리기 위해서는 그 무게를 지탱할 기둥과 벽도 함께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벽때문에 창은 좁고 작게 낼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실내는 어둡고 차분한 느낌을 자아냈다.

 

- 14세기 부터 16세기 사이에 일어났던 르네상스는 과도기적 측면이 컸다. 중세를 극복해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종교적 측면에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경제적 측면에서도 자본주의를 도입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한 가시적인 계급적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보다는 중세의 마지막에 등장한 문화로 평가하고자 하는 견해가 있다. 

 

- 르네상스 미술 이후 17세기와 18세기는 각각 바로크와 로코코의 시대였다. 르네상스 미술이 이성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바로크와 로코코는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 사조였다. 다만 바로크는 무겁고 어두운 반면 로코코는 밝고 가볍다는 차이가 있다. 우선 바로크는 포루투칼어로 '비뚤어진 진주'라는 듯이다. 처음에는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단정하지 않고 우아하지 못하다는 경멸적인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이후 전 유럽을 휩쓴 고유한 양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르네상스 미술이 고전적인 균형과 조화의 세계를 표현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바로크는 유동적이고 강렬하며 장식적인 예술을 추구했ㅇ다. 바로크 미술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인물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카라바조다. 

 

- 르네상스 미술은 이성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절대주의적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서 감성적 측면을 강조하는 바로크, 로코코는 상대주의적 미술로 볼 수 있다. 

 

- 초기 근대 미술은 로코코의 퇴폐미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다. 로코코의 감성적이고 유약하며 여성적인 측면에 대한 반발이 다시 예전의 고대 미술이나 르네상스의 이성적이고 강인하며 남성적인 모습으로의 회귀를 낳은 것이다. 이들은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로 돌아가고자 했기에 '신고전주의'로 불린다. 사실 신고전주의는 화풍에 있어서는 새로울게 없다. 그리스 로마 미술로의 복귀가 이들의 추구점이다.

 

- 예술사에서는 이성과 감성,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르네상스의 이성에 대한 반대가 바로크와 로코코의 감성을 낳고, 이에 대한 반대가 다시 신고전주의의 이성 추구를 낳은 것이다. 신고전주의의 이성 추구에 반대해서 다시 낭만주의가 인간의 감성을 앞세우며 등장한다.

 

- 신고전주의는 프랑스 로코코의 퇴폐미에 대한 저항으로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나, 다시 프랑스로 수용되어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가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요구 때문이 아니었다. 국가 주도의 의도적인 확산에 그 원인이 있다.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는 프랑스 로코코의 향락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엄숙하고 계몽적이며 애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래서 프랑스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화가를 양성했다. 이 아카데미에 소속된 화가들은 매년 두 차례 열리는 살롱전에 참여할 수 있었고, 살롱전은 국가적 관심 속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살롱전에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작품은 언제나 성경, 신화, 고대사 등을 다루는 역사적 작품이었다. 그런 까닭에 화가들은 역사적인 측면에 몰두하게 되었고 , 개인의 주관과 감성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살롱전으로 프랑스 사회에서 막대한 인지도와 영향력을 쌓은 인물이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와 그의 제자 앵그르이다.

 

-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이성적이고 엄숙하며 절대적인 측면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신고전주의가 고대를 모방하고 재현하려고만 할 뿐, 개인의 감성과 주관의 탁월성을 소홀히 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창작자의 주관과 표현을 강조하고 자유로운 공상과 환상의 세계를 그림의 대상으로 하는 낭만주의 미술이 탄생했다. 감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바로크, 로코코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화려하고 장식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보다는 화가의 강렬한 내면을 외부 세계에 투영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작가의 주관적 해석과 내면의 심성을 중시하는 까닭에 낭만주의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천재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격정적이고 창백하며 고뇌로 가득 찬 전형적인 천재의 이미지는 이때 확립된다. 

 낭만주의 미술의 창시자 격인 인물은 제리코다. 그의 작품 <메두사호의 뗏목>은 당시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요소들인 격렬한 움직임, 강렬한 명암 대비와 색채효과 그리고 극적인 상황 등을 모범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당시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실제 사건을 그린 것이다.

 제리코의 친구이자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들라크루아는 후에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 했다.

 

- 초기의 근대미술은 이성을 중시하는 신고전주의와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대결로서, 전통적인 미술적 대립의 구도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후기에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등장하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모두 비판한다. 특히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선택했던 소재의 역사성이나 종교성에서 벗어나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특징이다. 다만 사실주의가 노동과 민중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렸다면, 인상주의는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인상'을 그리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상주의는 후기에 이르러 개성 넘치고 다채로운 천재적 화가들을 탄생 시키며 실험적인 현대미술로 넘어가는 다리가 된다.

 

- 사실주의는 감성을 강조하는 낭만주의 과장된 화풍을 거부하고 실제 현실을 그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절대주의적 측면을 갖는다고 하겠다. 하지만 사실주의가 정치적 이념성을 강하게 내포했고, 이후에 사회주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화했다는 점에서 중세의 그리스도교 미술처럼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에 포착되지 않는 논외의 미술 화풍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 현대에 이르러 미술은 더 이상 이성적 절대주의와 감성적 상대주의의 싸움이 아니라, 예전 것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들을 실험하는 회의주의적 장으로 바뀐다. 세잔의 예술적 전망을 이어받아 입체파가 등장하고, 입체파가 대상을 해체함으로써 새로움을 추구했던 방식은 더욱 극단화되어 추상미술이 자리 잡을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오늘날에는 예술의 대상에 대한 분석과 해체를 넘어 예술의 주체로서의 예술가를 대상화, 소거, 집단화하는 방향을 새로움이 실현되고 있는 상황이다.

 

<종교>

 

-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을 보통 세계 3대 종료라 부른다. 불교나 힌두교나 유교는 무시하는 거냐?라고 반발할 수도 있겠으나, 이 세 종교를 3대 종교로 부르는 것은 인구, 지역,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타당해 보인다. 

 

- 유대 신화에서는 이브 이전에 일리트라는 여성이 아담과 동시에 창조된 것으로 나온다.

릴리트는 성관계를 중심으로 한 여성 평등을 주장하다가 아담과 갈등을 겪고 결국 홍해로 가서 악마가 된다. 릴리트가 떠나고 혼자 외로워하는 아담을 위해 갈비뼈로 온순한 이브가 창조되었다. 릴리트의 이야기는 이후 발비로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전파되었는, 성경에서는 사라졌다.

 

- 노아의 방주는 150일 동안 물이 빠질 때가지 기다렸다가 현재 터키에 위치한 아라랏산에 정박했다.

하느님은 이후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 증표로 무지개를 남겼다.

 

- 유대인들은 세상을 구원할 존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 그리스도교인들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에 왔다고 생각한다.

 

-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근본적 차이는 각 종교가 갖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언자 무함마드의 지위에 대한 차이에 있다고 하겠다. 우선 예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의 경우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로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반면,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 전까지의 예언자 중에서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지만 하느님과 동일한 존재는 아닌, 다만 선지자일 뿐이다. 특히 코란에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처형당한 인물이 예수가 아닌,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팔아넘긴 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일신 알라께서 가장 사랑하는 선지자로서의 예수를 희생시켰을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입장에도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신약성서까지 믿는 까닭에 6세기에 태어난 예언자 무아마드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다. 반면 이슬람에서의 무함마드는 최후의 예언자이자 가장 중요한 선지자가 된다. 

 

- 이슬람에서는 신성한 두 존재인 알라와 무함마드를 이미지로 그리는 것을 불경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 속에 없는 것이다.

 

- 비교적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절대적 유일신교와는 달리 상대적 다신교는 인도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아시아 지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지역의 종교는 가장 근원적인 뿌리는 '베다'를 기원으로 한다. 베다는 구정되어 전해오던 내용을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신성한 언어인 산스킄리트얼 편찬한 문서다. 

 베다는 '지식''지혜'를 뜻하는 말로, 신화 종교 철학 제의 생활과 관련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구성에 있어서는 시간적 흐름을 따른다거나 논리적 체계를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구분된다. 여러 구분방법 중에서 내용에 따라 삼히타, 브라마나, 아라냐카, 우파니샤드의 네 부분으로 구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신에 대한 찬가나 기도문, 의식 제례 교육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베다의 마지막 부분인 우파니샤드는 우주의 원리에 대한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는 철학서로서 베다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면, '베다의 궁극적 끝'이라는 의미에서 '베단타'라고 부른다.

 이 고대의 문서들은 신이 직접 말해준 내용과 인간인 스승이 전해준 내용이 섞여 있다. 신이 직접 말해준 것은 '들은 것'이라는 뜻의 '슈르티'라고 하고, 스승이 전해준 내용은 '기억된 것'이라는 뜻의 '스므리티'라고 한다. 우파니 샤드의 경우 신이 말해준 '슈르티'에 해당한다.

 신이 말해준 이 비밀스러운 지식은 이후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전승되어 내려왔는데, 스승의 가까이에 앉아서 직접적으로 전해 듣는 지식이라는 의미로 우파니샤드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우파니샤드라는 말 자체가 '가까이 앉다'라는 뜻이다.

 

 - '삼매경'의 '삼매'는 고도의 정신 집중 상태로 모든 시간과 공간이 의식 속에서 멈춘 상태를 말한다. 

 

- 베다는 오래된 인도의 지혜의 문헌이며, 그중 베다의 결론을 우파니샤드라고 한다. 우파니샤드의 핵심 개념은 개인의 본질로서의 아트만이 우주의 본질로서의 브라흐만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의 사상이었다. 이러한 범아일여의 깨달음은 깊은 명상을 통해 삼매에 들때 가능하며, 이는 윤회를 멈추는 해탈을 위한 방법이었다.

서구의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이 구약을 그 근본 뿌리로 하는 것처럼, 베다는 인도를 중심으로 한 동양 종교이 근간을 이루었다. 베다에 대한 수용과 비판이 힌두교, 불교로 이어졌다. 단순하게 말하면 힌두교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전통을 계승하고 대중적으로 확대한 것이라면 불교는 베다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극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의 세 신은 브라흐마(창조), 비슈누(유지) 시바(파괴)이다.

비슈누와 시바에 디해 브라흐마는 인도에서 인기가 없는데 비슈누와 시바는 우주를 관리하고 파괴하는 등 역할을 하는 데 비해, 브라흐마는 우주를 창조한 이후 특별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각각의 신이 서로 다른 인기를 얻는 것과는 무관하게 실제로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는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하나의 존재가 자신의 속성을 기준으로 분리된 것이다. 브라흐마는 그중에서 오른쪽 자리에 속한다.

 

- 실제로 현재 힌두교의 양대종파는 비슈누파와 시바파다. 비슈누파는 일반적으로 높은 계급이나 부유한 사람들이 믿고, 시바파는 낮은 계급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신봉한다.

 

- 비슈누는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화신을 의미하는 '아바타라'를 지상에 주기적으로 내려보내는데 여덟번째로 내려보낸 아바타로가 크리슈나로, 인도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최고로 인기가 많은 신인데 경건한 모습보다는 자유분방한 측면이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 면이 있다. 아홉번째 아바타라는 놀랍게도 부처다. 

 

- 붓다가 일부러 잘못된 가르침을 전파함으로써 악마와 악인들의 수행을 방해한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것은 이슬람에서 예수의 지위를 낮춘 것을 그리스도교가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불교 신자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해석 일 것이다.

 

<신비>

 

-니체가 이렇게 끔찍한 사후관을 우리에게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원회귀가 사실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영원회귀의 개념이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 죽음 이후의 네가지 가능성

 

1.무 - 단절 : 이러한 죽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유물론적 관점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신체와 독립된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정신이라는 현상은 다만 뇌의 물질적 조건이 충족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인 것이다. 

 

2.영생 - 지속 : 신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나 정신은 소멸하지 않아서 새로운 경험을 계속한다는 견해다. 대표적으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의 절대적 유일신교가 가지고 있는 사후관이 이것이다. 이러한 사후관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물질과 정신이 각각 독립된 실체라는 물심이원론의 관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3.윤회 - 반복 : 상대적 다신교인 베두철학, 힌두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4.영원회귀 - 동일한 반복 : 니체의 영원회귀 물론 현대에 와서 니체의 영원회귀는 과학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결과에 큰 차이가 발생한다는 카오스 이론이나, 확률에 의해 결정되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에 근거하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실현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과학적 실현의 가능성을 넘어, 삶의 의미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적 순환이 요구된다. 전체를 아우르는 끝으로서의 죽음에 대해 앞서 생각하고 이해할 때 지금 현재 삶의 의미가 이해되고, 현재의 부분의 의미가 이해될 때에야 궁극적으로 인생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죽음은 필수적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의 의미는 확정되지 않고 이해될 수도 없다. 죽음을 회피하고 모르는 체하려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일상이 허전하고 불안하며, 의미의 상실 속으로 던져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2/채사장/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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