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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서재

-누군가 나에게 인문학의 개인적 쓸모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인문학은 나에게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시켜주었다고.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인문학은 걸핏하면 타인의 하찮은 펀치에도 완전히 KO패 당하곤 했던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나 또한 인터넷을 많이 하다보면 머릿속이 쓰레기통처럼 엉망이 되곤한다.

 

-공부의 즐거움은 단순히 성적이 오르는 성취의 즐거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숨은 작동원리를 배우는 순수한 기쁨에서 우러나온다.

 

-미모가 뛰어난 사람들보다 매력 넘치는 사람들의 인생이 실제로는 훨씬 행복하다.

매력은 미모처럼 자신을 볼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함께하고 싶은 존재로 만드는 기술이다.

미를 감상하는 데는 거리가 필요하지만, 함께하고 싶은 인연을 만드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 사랑의 향방에만 신경쓰는 배타적인 연애상담.

 

-건강한 문명은 섞이는 것, 잡스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질적인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그 지역 문명의 건강도를 체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인은 교양 자체로부터 자연스레 샘솟는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교양없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한다.

 

-교양의 마지노선이 타인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는 기술이라면

교양의 최고봉은 자신의 기쁨을 타인의 기쁨으로 만드는 기술이 아닐까.

 

-가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신조어가 있다. 예를 들어 미친 존재감이 그렇다.

재미있는 신조어긴 하지만 미친 존재감은 그 반의어로서 존재감 제로라는 충격적인 신조어도 함께 낳았다.

그렇다면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존재감 제로인 것일까.

존재감존재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어떤 사람은 존재감은 크지 않지만 오직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가.

반대로 존재감은 무척 크지만 그의 존재감이 클수록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존재와 존재감 사이에는 필연적 연관성이 전혀 없는 셈이다.

현대인은 존재감을 늘리는 기술에 집착하면서 존재 자체를 돌보는 지혜를 망각해가는 것은 아닐까.

 

-타인의 상처를 함께 아파할 수 없다면 어떤 위로의 제스처도 섣불리 취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

때로는 타인으 고통을 모르 척해주는 것도 최소한의 예의가 된다.

 

-지못미 속에 말로는 다 못할 슬픔이 담겨 있지 않다면, 지못미는 결국 타인을 지켜주지 못한 자신의 죄를 향해 스스로 발급하는 면죄부가 아닐까. 지못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교묘하게 정당화한다. 죽은 것만으로 충분히 처벌받은 사람마저 지켜줘야 할 무력한 대상으로 타자화시킨다. 무엇보다 지못미는 너무 즉각적이며 간단명료하다.

애도는 그렇게 인스턴트 푸드처럼 편리하게 대체될 수 없다.

 

-‘세대교체라는 표현에는 은밀한 잔혹성이 묻어 있다.

그것은 결국 신세대의 입장만을 대변한다. 세대교체는 전세대의 사람짐을 전제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식으로 세대가 교체되었다가는 후속세대는 이전 세대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것 없을 것이고,

매번 맨땅에 해딩하는 끔찍한 고통을 맛볼 것이다. 세대 사이의 강력한 교감이 깨지면, 지식은 전수되지 않고,

예술은 감동의 주파수를 잃고, 장인의 기예는 맥이 끊긴다.

모든 것이 유행에 따라 너무 쉽게 변해버리는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뜨거운 세대교감을 느낄 틈이 별로 없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본격화했지만, 미국은 이제 테러없는 안전한 사회가 아니라 테러가 일어날까봐 모든 사람들을 병적으로 의심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바로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주입시키느라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방기해버린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인 것이다.

 

-인간사회에서도 우리라는 테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2010년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가족실태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76%친조부모는 가족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2명 중 1명은 배우자의 부모를, 3명중 2명은 배우자의 형제 자매를 우리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가족이기주의를 앞다투어 비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가족조차 보호의 대상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일까.

 

-현대사회에서 안티팬 커뮤니티가 급증하는 까닭은 사람들의 일상적 분노가 필사적으로 그 배설의 창구를 찾기 때문이다. 분노에 사로잡힌 인간은 분노의 원인을 밝히기 보다는 일단 자신의 분노를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데서 안정감을 얻는다.

 

-우리가 타인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장점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의 취약점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람,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에게서 매력을 느낀다. 약점은 존재의 치부가 아니라 존재의 어엿한 일부다.

 

-진정 치명적인 단점은 결핍 자체가 아니라 결핍을 부끄러워하고, 결핍을 꽁꽁 숨기려는 자격지심 아닐까.

 

세대교체

지난 세대에게 무언가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할까?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해버리는 세상에서.....

이전세대에게서 무얼 배울까?

 

-대위의 딸, 위대한 사람들의 평범성과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성을 대비시킨 걸작....

 

-위대한 사람들의 평범성, 평범해 보이는 사람의 위대성을 좀처럼 고민해보지 않은채,사람의 지위나 명성, 재산 같은 눈에 보이는 지표로 위인과 범인을 나누는 것은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지 않을까. 승리자 중심의 역사에 귀속되지 않는 다채로운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다면성이야말로 역사를 배우고 소설을 읽는 짜릿한 즐거움이다.

 

-위인전으로 대표되는 승리자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역사는 특별한 사람들의 무대라는 지독한 편견을 심어주지는 않았던가. 위인과 범인,유명인(셀러브리티)과 일반인, 역사의 주인공과 엑스트라....이렇게 우리는 너무도 폭력적인 이분법으로 복잡다단한,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존재의 풍요로움을 외면하지 않았는가.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적인 복수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법의 목표는 무조건 복수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 사적 복수를 공적 제도를 통해 이성적으로 길들이는 데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럽다.

법을 우리편으로 만드는 데 까지 드는 시간과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의살이 허용되었다.

 

-정의는 슈퍼 히어로의 원맨쇼가 아니라 팀플레이에서 나온다.

 

-현대인은 자신의 콤플레스를 소비로 극복하려 한다.

 

-자신의 탁월함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도 콤플렉스의 일종이다.

 

-발터 벤야민은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정보는 넘쳐나게 되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다운 이야기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위대한 재능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생각했던 이 지혜로운 믿음이 과도한 자아도취로부터 예술가들을 보호해 주었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 나와서 지니어스탓이고 아무리 형편없는 작품이 나와도 지니어스탓이니 예술가들은 자아도취에도 자기혐오에도 빠질 필요가없었던 것이다. 천재적인 재능이 하늘의 뜻이 아니라 개인의 소유물이 된 것은 모든 것은 인간탓이라 믿게 된 르네상스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재능을 일종의 사유재산으로 취급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어느때 보다도 나는 왜 재능이 없을까 하는 번민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빨리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각종 학원으로 아이들을 출근시킨다.

조기교육, 조기유학, 조기졸업...모든 것을 조기에 해결하려고 하는 이 재능의 속성재배시대,

사람들은 지니어스 요정의 축복을 느긋하게 기다리기보다는 지니어스를 내면화해서 완전히 내것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재능은 마치 한정된 자원처럼 취급되고, 창작은 재능을 소모하는 고통이 되어 버린다.

오죽하면 위대한 작가 모면 메일러 조차도 내가 쓴 책은 모두 조금씩 나를 살해했다.고 고백했을까.

재능을 개인의 소유물로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지고, 더욱 고통스러워진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아역스타로 전세계를 주름잡던 배우들이 성인이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슬럼프에 시달리고, 스포츠 스타로 각광받던 선수들이 선수 생활이 끝나면 삶의 기술을 몰라 고통받는 일이 많다.

이것은 재능을 개발하느라 삶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능을 위해 삶을 올인하는 것은 위험한 상상이다.

 

-타인을 밑바닥 인생에서 구해내겠다는 생각은 아름답지만 위험하다.

구원의 의지는 순순한 선의에서 우러나오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욕망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것이 자선이나 교육의 형태로 나타날 때는 더욱 은밀한 폭력성을 띠기 쉽다.

누군가를 밑바닥에서 구했다면 그 다음에는 어찌할 것이가.

누군가를 구했다 한들, 구조자와 피구조자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권력관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 구원에는 뜻하기 않은 폭력성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타인을 구월할 수도 있지만, 그 구원이 빚어낸 창조물은 구조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게다가 구조자와 피구조자 사이에 싹트는 감정이 사랑에 가깝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너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는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독단으로 바뀌기 쉽기에...

 

<마음의 서재 / 정여울 / 천년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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