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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춘천 - 이상원 미술관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선천적으로 묘사력은 뛰어난 화가인 것 같다.

초기에 유명극장의 간판을 그렸다고 하는데, 보기만 해도 아~ 저그림? 하고 알만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등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유명인사의 초상화도 그리게 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초상화, 안중근의사의 초상화, 그리고 외국의 유명 사절들의 그림도 그려 초상화 요청이 꽤 많이 들어왔단다. 그 이후 순수 미술에 전념하여, 동해인 시리즈와 바리나시 사람들을 그린 영원의 초상, 시간과 공간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극장간판쟁이와 초상화가로 삶의 현장을 지켜온 그는 불혹이 넘은 나이에 공모전을 통해 데뷔한 늦깎이 화가다.

그러나 치밀한 묘사력과 탄찬한 구성력으로 독보적 위치를 구축했다.

손자와 손녀 넷을 둔 그는 할아버지이기를 거부하고 <미스터 리>를 고집한다.

 

극장 간판일은 노동판보다 쉬웠다. 묘사력만큼은 자신이 있어 실력은 점점 늘었다. 영화의 흥행을 극장 간판이 좌우하던 시절, 지금처럼 다양한 홍보가 없을 때였다. 나는 데생만 했다. 가끔 중요한 프로그램은 직접 그렸다. 대한극장, 단성사, 스카라 국도극장등이 개봉관이었다.

 

극장 간판은 영화가 끝아면 내려진다. 그리고는 흰칠로 지워 버린다. 다음 간판을 제작하기 위해서다. 이럴때 가장 허탈하다. 상업 간판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 먹고 그린 그림인데 하루 아침에 뭉개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오래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화 가격은 1장에 2달러 나는 낮이고 밤이고 그려댔다. 대량제작이니 공장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눈 코 입 등 인물의 윤곽을 내가 잡아주면 나머지는 제자들이 그린다. 어떤 이는 의상만 전문으로 어떤 사람은 넥타이만 그린다. 물론 최종 완성은 나의 손을 거친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순식간에 12명으로 불어났다. 이제 하루 저녁에 40장 씩을 완성했다. 좀 무리하는 날에는 70장씩.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순수회화를 하면서 나는 작품을 한점도 팔지 않았다. 죽어라 하고 그린 그림. 목숨을 걸고 그린 그림인데 팔수 없었다.

 

이런 그림 제작을 위해 손수 트렉터도 구입해 몰았다고 한다.

 

1박2일간 미술관에 머물면서 꼼꼼하게 보고 다시보고,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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