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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정체성

 어느 집에서 두 자매가 재미있는 장난을 벌였다.

아침 식사를 하러 나온 언니가 먼저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엄마에게 극존칭을 쓰며 말을 높인 것이다.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침을 차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생각해 웃어넘긴 엄마도 큰딸이 밥을 먹는 내내 계속해서 말을 높이고 예의를 차리자

큰딸이 밥을 먹는 내내 계속해서 말을 높이고 예의를 차리자 큰딸이 머리가 어디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둘째딸이 나와서 언니와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엄마는 자기가 이상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 시작했고, 두 딸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그만해!"

 

 이 장난은 우리의 정체성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행지에서 우리가 겪는 불안도 그와 비슷하다.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봐주고 인사해주고 말을 건네주는 많은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중 몇몇만 다르게 행동해도("누구시더라?")우리는 흔들린다.

 

해외여행을 떠난 여행자가 비행기에서 내려 가장 먼저 거치는 절차는 입국심사다. 오직 여권이라는 증명서만이 내가 누구인지를 무표정한 입국심사관에게 입증한다. 그는 여권에 등재된 인물이 과연 내가 맞는지를 의심할 수 있다. 정체성에 대한 불신, 숨겨진 정체에 대한 상상이 그들의 일이다.  <김영하 지음 '여행의 이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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