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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사소한 부탁

-전쟁은 없어지지 않았다. 전쟁의 기술은 더욱 발전했고, 랭보의 시대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을 만큼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뽐내는 살상 무기들이 앞을 다투어 개발되었다. ‘불분명한 이유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그럴싸한 이데올로기와 찬란한 명분을 둘러썼을 뿐이다. 세계의 질서나 국가의 안녕 같은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평화라는 말까지 전쟁의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유와 명분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고, 전쟁의 진정한 목적은 자주 감춰져 있기에 그 불분명함은 여전하다.

 

- 이명박 정권이 들어설 때, 한 유명 인사가 아뤤지발언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다.

한글은 창제 당시부터, 인간의 말은 물론이고 개와 닭의 소리까지 표기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지만, 그렇다고 한글이 외국어를 표기하는 발음 기호는 아니다. 우리가 오렌지를 오렌지로 표기하는 것은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들간의 소통을 위한 것이지, 외국어를 학습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잊히기 쉬운 사실이다.

 

- 홍어회는 부패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발효의 효과를 이용하여 조리된 음식이다. 우리의 불투명한 내부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저 불행한 대에 일본인들이 우리의 김치나 온돌을 헐뜯을 때 들이대던 논리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식민주의 권력자들은 삶을 통제하기 전에 먼저 삶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몰론 이 일은 도시 안에서도 일어나고 한 사람의 도시민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한 시인이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 학생들을 취직시키라는 학교의 등쌀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학평가에 취업률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예체능계의 취업률은 예외 사항이 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것은 4년제 대학이나 해당하고, 2년제 전문대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 문인이 취직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작가로서 성공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투적인 말들도 처음에는 그 날카로운 힘이 우리의 오장에 파고 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말이 나를 넘어 뜨리고 내 안일을 뒤흔들 것이 두려워 우리가 철갑을 입을 때 말도 상투성의 철갑을 입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들이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욕설이 언어에 생기를 주었던 듯도 하지만 그것이 폭력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나가는 길에 공연히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의자를 발로 차던 어린 시절의 방자함이 가장 만만한 것 가운데 하나인 말을 가만히 놓아둘리 없었다.

 

-꽃을 보는데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꽃나무들이 내게 그 시간을 주지 않았다.

 

-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언젠가는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언젠가가 영원히 오지 않는 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 만큼 나이가 들었다.

 

 

- 어느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재능이라는 담임교사의 말을 믿고 자신의 성적 욕망과 충동을 일기에 털어놓았다가 담임의 특별 지도 대상이 되었으며, 학년이 바뀌자 문제 학생으로 다른 담임에게 인계되기 까지 했다. 국어 교사인 담임은 자신의 진보적 교육관을 실현하려 했지만 학생의 격한호응에 당황했던 것이다. 그 여학생은 현재 이름을 말하면 알만한 시인이 되엇다. 교육에서건 다른 분야에서건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만, 그 자유가 실현되는 양상에 대해 항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을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그 말을 받아들여 사용하는 사람도 언어의 주체다.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이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

 

-모든 언어가 영어로 통일되고 모든 나라가 제 말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그때 영어는 보편적 언어로서 구실을 할수 있을까. 언어 통일이 실현된다면 낯선 외국인을 만나도 소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학생들은 외국어를 따로 배우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더 잘 이해할 것이기에 그만큼 평화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말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해 본 사람들의 의견은 다르다. 말라르메는 인간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언어와 언어 사이를 헤맨 사람들은 거꾸로 인간이 언어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여러개의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온갖 종류의 서사 앞에서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그의 하인에게 냉담한 것은 주인공이 더 높고 화려하고 더 많은 권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사의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하인은 우리에게 멀리 있다. 우리가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지만 그의 하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몇 개의 문을 거쳐야 한다.

 

- 그래서 우리는 주인공은 직접 만나지만 하인은 간접적으로 만난다.

 

-광주에 관해 숨죽이지 않고도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 세월이 필요했지만, 그 세월을 보내고 나니 이제 바깥사람들은 광주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광주는 지루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때 이후 가장 큰 슬픔을 지닌 사람들은 오히려 입을 다물었을지 모른다. 슬픔은 풀뿌리에 얽혀 삭아내린 그 백골과 같았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법무부장관 으로 안경환씨가 지목되었을 때 그의 책 <남자란 무엇인가>가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글에서 남자는 늘 하나 이상의 서사를 얻고 있지만 여자는 늘 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자는 그 서사밖에서 타자가 되어있다. 타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재난인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고 운 사람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을때는 남군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사소한 부탁/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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