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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시대를 훔친 미술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베누아의 성모>가 최초로 웃는 성모를 그린 것이란다.

신이 자신의 피조물을 호기심을 품고 바라볼 리가 없다.

 

- 한동안 예술형식의 순수성을 주장하고, 예술을 사회적 사건과 무관하게 바라보는 모더니즘적인 환상이 예술계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모더니즘 또한 한 시대의 열망을 담아낸 철저한 시대적 현상이었음이 이제는 상식이 되었다.

 

- 역사적 사건에 예술을 일대일로 대입하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사에는 사실과 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해석과 꿈,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모적으로 대항하며 목숨을 잃었는가?

끝끝내 공존의 필요를 깨닫지 못한 이기적인 태도들이 지금도 존재한다.

다름,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은 서로를 죽이게 된다. 여기서 예술은 큰 역할을 한다.

 

- 예술이 지향하는 것은 다양한 세상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예술가를 품고 있다.

 

-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

이 그림 속에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용서와 화해의 기술이 담겨 있다.

렘브란트의 말년은 가혹했다.

그는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지지 아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젊어서 화가로 유명세를 떨쳤다.

유복한 상속녀인 사스키아와의 결혼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 금술 좋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일 년을 못 넘기고 죽었다.

연이은 출산으로 쇠약해진 아내 사스키아는 한 살도 안된 네 번째 아이를 남기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렘브란트의 행복은 차례대로 하나씩 그의 곁을 떠났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고집했던 렘브란트는 주문자의 취향에 맞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걸작들은 당대에는 이해받지 못했다.

사스키아가 죽은 후 숨겨진 아내였던 헨드리케도 세상을 떠났고, 그가 죽기 한해 전에는 스물일곱이었던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가난과 고독이 바로 늙은 렘브란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원망대신 세상을 껴안는 쪽을 선택했다.

돌아온 탕아는 1669년 렘브란트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완성된 그림이다.

렘브란트가 더 오래전 그린 돌아온 탕아그림도 있다.

 

- 누구나 다 아는 진실이지만, 삶에 있어서 100%란 없다.

핵심은 사소한 불일치를 견디면서 더 큰 일치를 향해 간다고 하는 방향성이다. 그것이 곧 공존의 기술이다.

 

- 파리는 프랑스의 머리요. 샹파뉴는 심장, 부르고뉴는 위장이다.

 

- 11세기부터 꾸준히 이루어진 중세 상업혁명의 성공으로 도시에는 부가 축적되기 시작했다.

중세 때 이승의 삶은 천국을 예비하는 지나가는 통로였으나, 부가 축적되어 갈수록 세상은 살아 볼 만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세속화는 피할 수 없는 세계사의 진행 방향이었다.

 

-1400년 무렵부터 시작된 소빙하기 기후 탓에 전 유럽이 추위에 떨었고, 여러 차례 유럽을 휩쓴 페스트로 유럽 전체 인구 삼분의 일이 감소했다.

인구 감소는 자연히 노동력의 가치를 높였다. 임금을 받는 자유 노동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 르네상스를 고대의 재발견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밋밋한 표현이다.

르네상스는 서양 문화의 두 축이 되는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이 다시 융합하는 위대한 순간을 의미한다.

 

- 최고의 갑부였으며, 공화정의 외피를 두른 피렌체의 실질적인 군주였지만 메디치 가문에는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평민 출신이라는 점과 이자 놀이를 주업으로 삼는 은행가라는 점이었다.

금용업, 즉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챙기는 이자놀음은 기독교 교리에서 축복 받지 못하는 사업이었다.

이러한 축재 과정의 죄를 용서받는 방법은 수도원과 교회에 대한 후원이었다.

이런 형태의 후원이 점차 영광스러운 일로 간주되면서, 후에는 가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후원의 의미가 변질되어 갔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시각 이미지는 다른 어떤 예술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12세기 후반부터 교회의 벽은 유력 가문의 후원과 세력 과시 경쟁 덕에 멋진 그림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코시모의 예술 후원은 대담했다.

그는 아이디어가 참신한 신진 작가들에게 건축과 작품을 의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예술가의 재능을 자신을 미화하는데 이용하지도 않았다.

시시콜콜 개입하지도 않은 채 낯설과 새로운 것들에서 더 나은 것들이 자라나오는 과정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러한 코시모의 경영관에 주목한 경영학자들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분야를 접목하여 창조적이며 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기업 경영 방식을 의미하는 메디치 효과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개방성과 수용성은 모든 문화적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모든 위대한 문화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이 융합하는 순간 탄생한다.

 

- 피렌체 돔의 건설 기간 동안 브루넬레스키는 선원근법의 원리를 발견했고,

그의 친구인 마사초는 이 원리를 이용해서 최초로 원근법을 적용한 그림인 <신성한 삼위일체>를 완성했다.

 

-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하여 식민지 개척을 시작함으로써 그를 후원했던 스페인은 서구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등극하게 된다.

돔의 건설에서 원근법의 발명, 토스카넬리의 실험, 그리고 콜럼버스의 항해에 이르기까기 예기치 못한 생산적인 결과들의 도출,

이것이 바로 메디치 효과의 놀라운 실례다.

 

- 다빈치가 그린 <베누아의 성모>에서의 성모는 마치 신이 예정해 놓은 예수의 수난을 전혀 예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녀에게는 지금,여기의 행복이 중요하다. 차리라 성모보다 아기 예수의 표정이 진지하고 어른스럽다.

 

- 메디치가의 몰락은 피렌체 시민들에게 다시금 공화제에 대한 꿈을 심어 주었다.

피렌체 시의원들은 공모를 통해서 당시 로마에서 주가를 올리던 젊은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시민들의 단결력을 불러 일으킬 만한 압도적인 거인상을 의뢰한다.

미술품으로 시민적 자부심을 일깨우는 전통적인 방법을 그들은 다시 사용했다.

길이 4미터가 넘는 대형 대리석에서 깨어난 조각 <다비드>가 피렌체 정치 1번지인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졌다.

이 광장에서 메디치 가문의 비판자 사보나롤라도 결국은 화형을 당하고 만다.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진품 다비드상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모조품 다비드상



시대를 훔친 미술

<시대를 훔친 미술/ 민음사 /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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