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배가 고팠던 선조가 수라상에 올라온 생선을 맛있게 먹은 후 그 이름을 물었다.
‘묵’이라는 생선이라고 하자 맛있는 생선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라며 즉석에서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환궁한 선조가 피난지에서 맛보았던 은어가 생각나 다시 먹어보았더니 옛날 그 맛이 아니었다.
형편없는 맛에 실망한 임금이 역정을 내면서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라고 해서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도루묵은 주로 강원도와 함경도, 그리고 경상북도 바닷가에서 잡히는 생선이다.
그런데 선조는 도루묵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간 적이 없다.
임진강을 건너 평양을 거쳐 의주로 갔으니 실제 피난길에서 도루묵을 먹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도루묵의 유래가 적힌 조선시대 문헌에도 선조가 도루묵을 먹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올겨울 도루묵이 풍년인지 동해안에는 이렇게 도루묵을 말리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도루묵의 유래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광해군 시절에 귀양을 갔을 때 쓴
전국 팔도 음식 평론서인 《도문대작》에 실려 있다. 은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동해에서 나는 생선으로 처음에는 이름이 목어(木魚)였는데
전 왕조에 이 생선을 좋아하는 임금이 있어 이름을 은어라고 고쳤다가
너무 많이 먹어 싫증이 나자 다시 목어라고 고쳐 환목어(還木魚)라고 했다”고 했다.
한자어 환목어를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 바로 도루묵이다.
허균이 전 왕조(前朝)라고 했으니 도루묵이라는 이름을 만든 주인공은 선조가 아니라 바로 고려 때의 어느 임금이다.
<내가 자유롭게 헤엄치던 저 바다가 그리워~~ 내가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아직도 난 저 푸른 바다를 헤엄치고 다닐텐데.....>
비슷한 이야기가 역시 광해군 때 벼슬을 산 택당 이식(李植)의 시에 나오지만
도루묵의 주인공이 선조 임금이라는 말은 없다.
“임금님이 왕년에 난리를 피해 황량한 (동해안) 해변에서 고난을 겪다가”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적었다.
선조가 아니라면 동해안 쪽으로 피난을 가서 도루묵을 먹은 임금은 과연 누구일까?
고려와 조선대에 서울인 개성이나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임금은 모두 다섯 명이다.
11세기 때 고려 현종이 거란족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간 적이 있다.
그리고 13세기에 고려 고종이 피난은 아니지만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해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14세기에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경상도 안동으로 피신했다.
조선시대에는 16세기 말,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는데 함흥으로 갈까 의주로 갈까 망설이다 결국 의주로 떠났다.
그리고 17세기 인조가 세 차례에 걸쳐서 한양을 비웠는데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그리고 이괄의 난 때는 충청도 공주로 몸을 숨겼다.
그러니 고려 이후 도루묵이 잡히는 고장인 동해안으로 피난을 떠난 임금은 한 명도 없다.
도루묵의 또 다른 이름인 은어도 그렇다.
배고픈 임금이 너무나 맛이 좋아 은빛이 도는 물고기라는 뜻에서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하지만
조선 후기 정조 때의 실학자 서유구가 쓴 《난호어목지》에는 이름의 유래가 다르게 적혀 있다.
“물고기의 배가 하얀 것이 마치 운모 가루와 같아 현지 사람들이 은어라고 부른다”고 했으니
은어는 임금이 하사한 명칭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부르는 이름이었다.
< 지금 이렇게 꼼짝없이 입이 꿰여 누군가의 입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도루묵이란 이름으로 부르면서 왜? 인간은 날 잡은 걸까? 왜?>
그렇다면 왜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처럼
전쟁의 와중에 쓸데없이 음식 투정이나 부린 임금으로 선조를 지목한 것일까?
선조와 도루묵이 왜 누명을 썼는지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굳이 짐작하자면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이 임금님에 대한 원망을 도루묵 이야기와 연결 지은 것이 아닐까 싶다.
도루묵의 유래로 인해 도루묵은 으레 맛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옛날 문헌을 보면 도루묵은 동해안의 특산물이었다.
지금은 경상북도인 울진 이북의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두루 잡히는 생선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정에 공물로 바치는 지역 특산물이었다고 나온다.
<음식으로 읽는 한국 생활사 / 깊은나무/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