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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의정부 역 주변을 서성이다 의정부 역 주변을 서성이다 보니 새로운 건물들과 조형물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느 도시에서나 유행처럼 청년들을 지원하는 청년몰이 의정부에도 지하상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자리를 잡으려는 시기에 코로나가 덮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콘테이너 박스형태의 의정부 아트박스도 이곳 저곳 유행처럼 번지려는 양상이다. '다른 곳에서도 하니 우리도 하자'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하니 우린 다른 걸로 하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나름의 멋도 있고 설치와 철거가 용이하나 어디나 똑같다면 식상할 것 같았다. 시승격 50주년 기념탑과 베를린 장벽의 일부를 전시한 전시물도 눈에 들어왔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Golden Sweat 란 제목이 붙어 있는 거대한 땀방울이었다. 더보기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효종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세종대왕 영릉(英陵) 옆에 있고 한글도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 (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 5월 22일 태어나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더보기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산(정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역모의 죄명으로 죽었으니 왕위에 오를 수가 없는 신분이다. 이에 할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의 형에게 이산을 양자로 들어가게 하는데 그가 장조다. 정조는 장조의 둘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그럼에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노론 신하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들의 목이 언제 달아날지 근심 걱정했을 것이다. 반면에 정조 자신도 그런 신하들 속에 하루하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여러 정황상 정조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며 독살설도 제기되고 있다. 지금처럼 CCTV가 있고 과학적 수사기법이 동원되었다면 진실을 밝힐 수 있으련만....... 정조가 조.. 더보기
살려만 달라는 아들을 죽이고 후회한들.....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라고 했거늘, 자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임금을 성군이라 칭할 수 있을까? 후대 사람들로 부터 성군이라고 칭송을 받지만 살려만 달라는 아들을 냉혹하게 죽음으로 몰아넣고는 나중에 후회해서 '사도'라는 칭호를 내린들 무슨 소용있으랴. 볕이 따갑게 내리 쬐는 날......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화성 융릉에 갔다. "날도 덥고 너무 멀다" "한맺힌 사도세자를 찾아가는 데 이런 건 고행이라 할 수 없지 험험~~" 영조는 사도세자를 '세자'의 신분으로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뒤주에 가두기 전에 일반 평민인 서인으로 폐한다. 또한 왕을 죽이려 했다는 죄를 물어 역적으로 몰아 죽인다. 자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정조)은 역적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역적의 아들이니 당연히 왕이 .. 더보기
김포 장릉 - 광해군의 이복동생 오늘 찾아가는 장릉의 주인, 정원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이며 인조의 아버지이다.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소문에다가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상소까지 올라오자 능창군을 강화도로 유배하고 정원군의 집은 몰수하여 자신의 궁궐을 지었다. 아들이 유배되어 목숨까지 잃게 되고 집까지 빼앗긴 이가 바로 장릉에 누워있는 정원군, 원종이다. 정원군은 걱정과 불안의 나날을 버티다가 40세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그로부터 4년 뒤에 동생과 아버지의 애통한 죽음을 기억하는 정원군의 맏아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의 16대임금 인조다. 결과적으로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린 기운은 능양군을 가리킨 것이었다. 애꿎은 능창군이 죽고,.. 더보기
고양 서오릉 5개의 능이 있는 서오릉 경릉, 창릉,익릉,명릉,홍릉의 5릉과 순창원, 수경원의 2원 그리고 장희빈의 대빈묘 이렇게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특이한 점은 익릉의 정자각 양 옆에 익랑이 붙어 있으며, 향로와 어로는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보기
장희빈은 어디에..... 조선 최고의 미인이라는 장희빈. 숱하게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진 장희빈이어서 묻혀있는 모습이 궁금했다. 빈으로 전락했으니 그다지 대접은 받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역시 왕릉에 비해 초라하지만 그래도 이곳 서오릉 안에 있어 관리를 받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하지만 장희빈은 한 울타리 안에 숙종을 두고 삼각관계였던, 연적 인현왕후가 왕후의 대접을 받으며 숙종과 나란히 누워있는 걸 지켜보는 지금 저승에서도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장희빈을 둘러싼 인물들.... 우선 숙종, 그리고 라이벌인 인현왕후 그리고 숙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그 주인공들이다. 인형왕후보다 먼저 숙종의 여인이었던 장희빈. 서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상황이라 하는 수없이 인현왕후를 왕비로 들였지만....마음은 장희빈에게 있었다. 숙종.. 더보기
고양 서삼릉 각기 왕세손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3살, 5살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도 신분이 다르니 저렇게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릉이 아닌 원이라 그런지 계단도 있고 가까이 다가가 석상등을 볼 수가 있었다. 서삼릉(西三陵)은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의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 처음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조성되면서 3릉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삼릉'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 이외에도 3기의 원과 1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 태실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3기의 왕릉중 희릉과 예릉은 공개했지만 효릉과 소경원, 후궁묘역은 개인 사유.. 더보기